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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8화 (48/150)
  • 48화.

    대개 침착하고 감정의 흐트러짐을 보여 준 적 없는 라빌이었다. 화를 내는 걸 본 적도, 언성을 높이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라빌의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다.

    데이비드는 깜짝 놀라 멍한 얼굴을 했다. 오웬이 황금 패를 받아 든 채 라빌과 데이비드를 돌아보다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패악을 부려도 감당되시겠어요?”

    오웬은 5서클의 마법사였다. 황궁 마법사들의 평균 서클은 3서클이었고 직급이 높은 마법사들이나 5서클을 소유하고 있었다. 태자궁에서 난장판을 만들어도 5서클 마법사들이 도착할 즈음이면 벨리타를 들고 튀어도 시간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오웬의 웃음에 라빌은 무뚝뚝한 얼굴로 한 걸음 계단을 내려왔다.

    “당장 내 딸 데리고 와.”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오웬은 미소를 지은 채 라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라빌은 아무런 대꾸 없이 오웬을 바라보았고 오웬은 데이비드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주문을 영창했다. 마차를 준비시켰다는 데이비드의 말은 도중에 끊어졌다. 오웬은 빛무리와 함께 빛이 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 신기하네…….”

    휑하니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데이비드를 부른다. 라빌이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라며 등을 돌려 계단 위로 올랐다. 데이비드가 졸졸 라빌의 침실까지 따라갔다.

    “어머니, 무슨 일이십니까?”

    “소문을 들었다.”

    답지 않게 심란한 얼굴이었다. 데이비드는 평생 볼 라빌의 표정 변화를 오늘 다 보았다고 생각했다. 라빌이 티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았다.

    데이비드가 조심스레 라빌의 앞에 서자 앉으라며 손짓했다. 데이비드가 자리에 앉는다.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라빌이 조곤조곤 말문을 열었다.

    “벨리타가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했다더구나.”

    “……들으셨습니까?”

    “알고 있었니?”

    아카데미의 학우들이 느그 누나 요즘 난리도 아니라며 편지를 보내오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빌은 축 늘어지는 한숨을 토해냈다.

    “귀족들의 분위기가 술렁이는 걸 아니.”

    “예, 압니다.”

    “이미 체르핀 공녀와 약혼을 했지만, 벨리타가 원한다면 체르핀 공작과 전면전을 해서라도 황후 자리에 올려줄 생각이란다. 듣자 하니 황태자 전하가 벨리타를 무척 귀애한다고 하더구나. 벨리타도 같은 마음이라면 어미로서 힘을 보탤 수밖에 없잖니.”

    라빌이 이 소식을 안다면 테일러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데이비드는 혼란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평온한 척했다. 라빌이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누른다. 귀태가 났다.

    “여태 해준 게 없으니 이제라도 해주고 싶어. 이길 수 없을 싸움이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 데이비드, 혹여 가문이 위태로워지면 달아나거라.”

    청천벽력이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애석하게도 라빌은 또 한 번 달아나란 소리를 강조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네 친가족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둘 테니 그대로 달아나야 한다.”

    가문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데이비드는 가족이 아니었다. 도와달라는 말이나 했으면 가문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하에 두 팔 걷고 나섰을 터였다.

    가문에 황후가 있으면 권력에서도, 핏줄에서도 강자가 된다. 그 과정에 일조하여 정말 가족의 일원이 된다면, 내심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달아나라니. 친가족에게 돌아가라니.

    인정받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테이블 밑에 모은 주먹을 힘주어 쥐고 위태롭게 웃었다.

    “……네, 어머님.”

    끝까지 가족일 수가 없었다.

    *

    태자궁의 집무실은 처음 와 봤다. 잭슨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집무실까지 찾아갔더니 책상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다 처리한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벨리타가 나타나자마자 서류 처리를 집어치운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회의 용도로 놓인 작은 테이블에 디저트와 차가 놓였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지만 먹는 건 잘 먹어야 하기에 간식을 주워 먹었다.

    엘라는 짐 싸러 갔다. 집무실에 잭슨과 벨리타뿐이었다. 호위와 시종들을 모두 물린 덕이다. 잭슨이 기분 좋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줄 줄은 몰랐는데.”

    “할 말이 있는데 기다리기 촉박해서 왔어요.”

    고개를 기울인다. 우선은 들어 보려는 눈치였다. 벨리타는 붙어 있는 새에 많이 침착해지고 평온해진 잭슨 덕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잭슨에 의해 말머리가 끊겼다.

    “말 편하게 해. 나도 그게 익숙하니.”

    아, 그럴까? 거절하는 법 없이 냉큼 받아들이자 잭슨이 미소를 띤다. 편안한 분위기였다. 목을 조르고 그리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냐는 듯 차분한 분위기.

    벨리타가 얌전하고, 잭슨이 벨리타를 곁에 두며 안정을 찾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려고 인사하러 왔어.”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졌다. 파동이 일었다. 잭슨의 인상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왜?”

    격양된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고 참아낸 티가 났다. 화를 내고 울컥하는 모습을 싫어하는 걸 알기에 겨우 삼켜내고 있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잭슨이 찻물을 들이켰다. 속이 탄다.

    “왜냐니, 나도 집에는 가야지.”

    “여기 있어. 내 옆에 있는 동안 괜찮았지 않나.”

    출근하는 엄마한테 매달리는 아이의 꼴이다. 출근하지 말라며 신발을 죄다 옷장 안에 숨겨놓고 울고불고 떼를 쓰던 딸. 나이를 먹으니 거들떠보지도 않아 섭섭함까지 느껴지던.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딸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게 당연하듯 온통 딸의 생각뿐이다.

    잭슨에게 동정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고 난 뒤 벨리타는 잭슨에게 유해졌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찾아온 다 큰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기도 했다. 정신을 반쯤 놓은 덕이었다. 전과 다르게 잭슨을 말로 타이르게 되었다.

    벨리타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 소리가 울린다.

    “좋았어. 그래도 가긴 가야지. 여긴 내 집도 아니고, 또 오면 되잖아.”

    “혼인하면 여기에 있어야 할 텐데, 꼭 가야 하나?”

    마주 앉았던 잭슨이 몸을 일으켜 벨리타의 옆에 파고들었다. 벨리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잭슨은 어리광이 많아졌다. 어느 누구 하나 의지하지 못해 자라온 탓이다. 필요한 시절에 하지 못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벨리타가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니 둘만 있으면 부쩍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다 큰 애다, 아직도 애다, 생각만 했는데 정말 몸뚱이만 큰 애였다. 벨리타는 잭슨을 밀어내지 않고 베어 문 과자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잭슨의 품에 쏙 안긴 벨리타는 심드렁하게 잭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잭슨이 더 엉겨 붙어 온다.

    “붙어 있으니 이리도 좋지 않나. 여기에서 나랑 있어.”

    “어허, 가야 한다니까.”

    “……으응.”

    어디서 앙탈이야. 벨리타가 잭슨의 머리를 툭, 쳤다. 며칠 붙어 있었다고 벨리타의 사랑의 매도 익숙해진 잭슨이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는다.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껌딱지는 엘라로 족했다. 벨리타가 잭슨의 품을 피해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잭슨이 딸려온다. 잭슨의 무게와 덩치 탓에 속절없이 소파에 몸을 뉜 벨리타가 잭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잭슨의 품에 갇혔다. 코가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숨이 닿았다. 잭슨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났다. 허튼 분위기는 차단하고자 싶은 마음에 고개를 훽, 돌리자 잭슨의 큰 손이 볼을 감싸 자신 쪽으로 돌려놓는다. 벨리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입 맞춰줘.”

    “뭐?”

    잭슨이 벨리타를 따라 눈을 가늘게 접어 미소 지었다. 웃는 얼굴은 오웬이 가장 예쁘고 야한데. 벨리타의 얼굴 반을 감싸버린 그의 손이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검을 오래 쥐어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투명할 정도의 하얀 살결을 문질렀다. 며칠 전 다급한 마음에 입을 맞추긴 했었지만 굳이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품에 갇혀 있던 팔을 버둥대며 빼내자 잭슨이 다시금 부둥켜안아 가로막는다.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해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을 거다.”

    “염병하네.”

    다시 얼굴이 가까워졌다. 잭슨의 숨이 닿는다. 입술이 닿을 거리에 잭슨의 입이 달싹인다.

    “못 믿겠다면 시험해도 좋아.”

    입을 맞추고 싶진 않지만 이미 한 번 거하게 입술 비볐던 거 두 번은 못하랴. 후딱 해치우고 끝내버리자 싶어 벨리타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말캉한 입술이 짧은 순간 닿았다가 떨어진다.

    “됐지?”

    샐쭉하게 시선을 돌리자 위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퍼진다. 웃음을 뱉어낼 때마다 자잘한 호흡이 얼굴에 쏟아졌다. 민망해진 벨리타가 이거 놓으라며 몸을 펄떡거리자 잭슨의 다부진 팔이 벨리타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린다.

    “한 번 더.”

    “줘 터지는 소리 할래?”

    “으응, 한 번 더.”

    좀 받아줬다고 앙탈이 는다. 벨리타가 팍 인상을 찌푸리자 잭슨이 말갛게 웃는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응접실에서 입을 맞춘 뒤로 다시 뽀뽀를 해달라는 요구는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집으로 떠난다고 하니 응석을 잔뜩 부리고 이렇게나마 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벨리타가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물었다. 입술이 사라지자 잭슨이 숨죽여 웃는다. 확실히 잭슨의 태도가 많이 순해지고 차분해지기는 했다. 벨리타의 덕일 것이다.

    더는 싫다며 벨리타가 고개를 도리질 치자 잭슨의 손이 벨리타의 뺨을 다시금 고정시켰다. 없어진 입술에 잭슨이 쪽쪽, 짧게 입을 맞춘다. 바짝 말아 문 입술 사이로 으아악, 괴성이 울렸다.

    펄떡거리는 여린 몸을 다잡고 잭슨이 무게를 실어 눌렀다. 압박감에 앓는 소리를 토해내는 벨리타의 입이 원 상태로 돌아온다.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붉게 부은 입술을 입술로 물었다. 부드럽게 당긴다. 떨어진 입술을 다시 내리눌러 쪽, 입 맞춘다.

    아, 이거 딱……. 벨리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한다. 딱 하는 타이밍이다. 분위기가……. 이대로 그냥 해버린다면. 순탄하게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품에 갇힌 손이 잭슨의 허리를 더듬었다. 탄탄하고 다부지니 꽤. 순간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양심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미친년아, 정신 안 차릴래?!

    놓을 뻔했던 이성이 벼락처럼 머리에 내리꽂힌다. 콱, 벨리타가 잭슨의 입술을 물었다. 잭슨이 파드득, 놀라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내가 싫다고 했지? 나 가야 한다고.”

    씹힌 입술 탓에 미간을 옅게 찌푸린 잭슨이 어물거린다. 아직도 벨리타를 품에 안은 채였다.

    “가지 마.”

    “뽀뽀해주면 보내준다며!”

    무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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