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양다리가 싫어서 확 내 거 하라고 그랬거든요~ 잭슨 걔가 날 어~찌나 좋아하는지, 천하를 안겨 주겠다, 금은보화로 성을 지어 주겠다, 실없는 소리나 하지 뭐예요.”
분위기가 싸하게 식는다. 하녀들이 벨리타와 소르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엘라는 이미 혼이 반쯤 빠져 있었다.
소르니가 주먹을 꾹 쥐었다. 말없이 벨리타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미소 짓는다. 귀족 특유의 오만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전하께서 널 아끼나 보구나. 이루어 주지 못할 바람까지 속삭여 주시니 참 다정한 분이시네.”
소르니가 부채를 펼쳐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손끝에서마저 우아함이 느껴졌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악스럽고 투박한 자신과 대조되는 고상함에 벨리타는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여유 있게 산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우아함이 있었다. 현실의 삶에서 그리도 부러워했던 고아함이다.
대꾸 없이 머리카락이나 만지고 있는 벨리타를 보며 소르니는 부채를 탁, 접어 손에 쥐었다. 벨리타의 어깨를 가볍게 꾹, 누른다.
“네 소문을 알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칠 분이 아니란다. 미쳤다는 소문이 도는 여인을 황후의 자리에 앉힌다는 게 참 어불성설이지 않니?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까지 들고 일어설 일이야.”
완전히 기를 죽이려는 행동이었다. 벨리타를 깎아내리고 비웃는다.
“단 꿈을 꾸는 건 좋지만 현실까지 끌고 오지 마. 네 수준을 돌아보길 바라.”
웃음소리가 퍼진다. 소르니의 시선이 벨리타를 훑었다. 이 정도 주의를 주었으니 정신이 들었을 것이다. 유명한 파텔 후작가의 미친 영애가 황태자비를?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파텔 후작가가 명망 있는 가문이지만 벨리타는 아니다. 소문은 빠르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느 누가 미친 사람에게 권력을 쥐여 주고 싶을까.
다음 날이면 벨리타가 눈물 콧물 쏙 빼며 파텔 영지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들리겠지. 소르니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충분하다.
“기어코 황태자비를 주겠다는데 저따위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말씀대로 수준 낮은 미친 사람이 말해 봤자겠죠~?”
엘라가 풀리는 다리를 애써 다잡고 섰다. 가만히 있기에 이번만큼은 얌전히 넘어가나 싶었다. 벨리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장부였다. 소르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엘라가 제발 그만 끝내고 돌아가자며 우주의 힘을 빌려 간곡히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우주가 울어도 할 말 없다.
“미친년이 헛소리 좀 했다고 누가 들어주겠냐 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많네요. 너무 좋아서 잔치나 열어야겠어요. 와서 잔치 밥 좀 먹고 가요.”
말문이 턱 막혔다. 뭐 이딴 계집애가 다 있지? 소르니의 뒷목에 열이 올랐다. 미친 사람에게 주의를 주려던 것부터가 잘못이었을까. 정신 이상자에게 말을 해 보았자 통할 리도 없었는데.
벨리타의 소문을 간과한 탓이다. 다만 미친 사람이라고 치기에는 말이 조리 있고 호호 웃으며 돌려 까는데 여간 능숙한 게 아니었다. 소르니는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벨리타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해맑아서 더 얄미웠다. 웃으며 비꼬는 벨리타를 보니 소르니의 전두엽을 후려갈기는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미친 사람인 척하지만 어마어마한 망할 계집애다. 말로 타이른다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소르니가 인상을 구기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가만히 두면 분명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황태자비를 꿰찰 인물이었다.
진흙탕 싸움은 썩 내키지 않아 대화로 끝내려고 했건만. 소르니가 빙그레 웃으며 벨리타의 가슴 위쪽 부근을 부채 끝으로 툭, 툭 밀었다. 명백한 시비에 엘라가 인상을 찌푸렸고 벨리타는 태연했다.
“후회할 짓 하는 거야, 너. 올해까지 시간을 줄 테니 밑바닥까지 보기 전에 포기하도록 해.”
말을 마친 소르니가 몸을 돌리자 하녀들이 길을 텄다. 하녀들 사이를 지나쳐 온실을 벗어난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꼭 어린아이들 같았다.
소르니가 정원을 가로질러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엘라가 풀린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벨리타가 엘라를 돌아본다. 혼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엘라를 일으키려 하니 엘라가 잠시만 가만히 둬 달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등짝을 때리니 엘라가 펄쩍 뛴다.
“어딜 더럽게 아무 데나 주저앉고 그래?”
“아가씨가 하신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고서 이러세요?!”
유연한 엘라는 벨리타에게 맞은 부근을 손으로 문지를 수 있었다. 세모난 눈으로 벨리타를 쏘아본다. 책망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권력 싸움 하자는 거잖아요! 체르핀 공작가가 어떻게 약혼까지 해냈는지 아시고 그런 말을 하셨어요?”
모른다. 알고 싶은 정보도 아니었다. 본래 벨리타의 기억으로 황태자비 후보들을 둔 가문들이 박 터지게 싸운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소르니가 어떻게 황태자비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심각해져선 조잘거리는 엘라를 보니 사태를 조금은 파악하게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잣 되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쟁쟁한 후보들을 몇은 독살하고 불구로 만들고 가문을 휘청거리게 해 치열하게 쟁취했다. 귀족들이 숙덕거려도 당당하게 증거 있냐며 발뺌할 정도로 뻔뻔한 가문인 데다 오리발을 내밀며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군사력과 권력이 있었다. 제국에 셋뿐인 공작가였다.
하고자 한다면 쉽게 이루고 마는 체르핀 가문의 황태자비 후보는 당연한 듯 잭슨의 약혼자가 되었다. 그 자리를 탐내는 자가 생긴다면 죽여서라도 자리를 지키는 게 이치였다. 진흙탕 싸움이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잭슨이 만에 하나 혹시라도 소르니와 파혼하고 벨리타와 약혼을 한다면 추후에 내전이 일어나도 납득이 될 사유였다.
엘라의 설명을 들은 벨리타는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한마디로 아주 잣 되었다는 소리였다. 체르핀 가문과 싸워서 이길 도리는 희미했다. 군사력이 수준이 달랐다. 벨리타와 소르니만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현실성 없이 전쟁을 하든 결혼을 하든 거기서 거기인 벨리타에게는 아쉽게도 그리 크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울먹이는 엘라를 다독이고 끽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니라는 말을 했다가 엘라의 잔소리 폭격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벨리타는 잭슨을 만나고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데이비드는 꽤 믿음직스러우니 이 일을 전해준다면 해결방안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
편지로 벨리타의 몸 상태를 전해 받은 테일러와 라빌은 서로 얼싸안고 오열했었다. 부모가 무지해서 아이만 고생했다는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벨리타가 너무도 보고 싶었던 둘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도까지 올라왔다. 저택에 들이닥친 둘을 반긴 건 데이비드와 생전 처음 보는 남정네였다.
벨리타를 보기 전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던 터라 라빌과 테일러는 타운하우스에 눌러앉았다. 오웬은 울고 싶었다. 방을 준 지 얼마나 됐다고 집주인은 홀라당 사라져버리고 진짜 집주인이 들이닥쳐 버린 탓이다.
다행히도 데이비드는 라빌과 테일러에게 오웬을 잘 소개해 줬고, 라빌과 테일러는 울면서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고 얘기했다.
오웬은 벨리타의 현 몸 상태,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나아지기까지 걸릴 시간 등을 이야기해 줬고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들어야 했다. 프러포즈도 하기 전에 장인어른 장모님과 단란한 상견례를 한 꼴이었다. 혹은 선생님과 학부모의 만남.
오웬은 어색했다. 침실 옆 방을 연구실로 만들어 준 덕에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역시 어색하다. 게다가 라빌과 테일러가 벨리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던 터라 벨리타가 돌아오기를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연구실 문을 벌컥 열고 나온 오웬이 검은 로브를 둘렀다.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어디 가실 예정이시냐 물었다. 로브 끈을 여미며 걸음을 서두르던 오웬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집주인 데려올게.”
시종이 졸졸 따라오며 마차를 준비하겠다, 후작님께 말씀드리겠다, 조잘거렸다.
오웬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다 데이비드와 마주쳤다. 어딜 가시냐 물으니 시종이 대신 답했다.
데이비드가 화들짝 놀라 기다려 보라며 오웬의 로브 자락을 부여잡았다. 오웬의 얼굴에 짜증이 어린다.
“왜 막아?”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마차도 준비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필요 없어.”
힘을 주어 로브 자락을 당긴다. 데이비드의 손아귀에서 옷자락이 빠져나갔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데이비드의 얼굴을 본 오웬이 빠르게 답했다.
“순간이동 하면 돼.”
“그거 불법입니다.”
알게 뭐야.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오웬이 주문을 영창하려 하자 데이비드가 황급히 오웬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에 입술이 짓눌린 오웬이 힘 한 번 쓰지 않고 데이비드의 손을 떼어냈다. 혀를 내어 손바닥을 핥은 것이다.
데이비드가 기겁이란 기겁을 하며 손을 떼어내고 펄쩍펄쩍 뛰었다.
주둥이가 자유로워진 오웬이 다시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데이비드가 다급함에 버럭 소리를 지른다.
“누님이 인질인데 조심하시지 않으시고!”
진심 어린 일갈에 오웬의 입이 다물어졌다. 맞는 말이다. 성급히 움직였다가 벨리타의 안위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황궁과 친밀하지 않은 마탑의 마법사, 마탑주의 아들로서도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벨리타가 앓아누운 지 며칠이 지났던가. 자그마치 5일째다. 걱정이 됐다.
죽음에 초연히 웃던 얼굴과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으려던 처연한 표정이 아른거린다. 위태로운 사람이다. 눈을 돌리면 무너져 있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에 갇힌,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터져버린다면 속절없이 슬픔에 떠밀려가 흩어질 것만 같았다.
다급해지는 초조함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색하다, 부모가 찾으니까 둥은 핑계였다.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앓아눕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오웬이 투박하게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벨리타가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면 분명, 죽을 뻔했기 때문에.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벨리타를 데리고 와야만 한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당장에 태자궁으로 쳐들어가 벨리타를 데려오고 싶었다. 오웬이 인상을 찌푸리고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체통 없이 소리를 지르면 쓰나.”
라빌이었다. 오웬과 데이비드가 동시에 계단 위에 서 있는 라빌을 돌아봤다. 무덤덤한 얼굴의 라빌이 무신경하게 무언가의 덩어리를 던졌다. 정확히 오웬을 겨냥해 던져진 물체였다. 묵직한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황금 패였다.
“다녀와라.”
오웬이 받은 것은 황궁 출입패였다. 라빌이 테일러의 짐 속에서 훔쳐 온 것이다. 제국에 다섯 있는 귀한 후작으로서 황궁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황궁 관광 프리패스권이었다. 오웬이 황금 패와 라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빌이 시종에게 눈치를 주자 시종이 부리나케 뛰어나가 마차를 준비했다.
계단 난간을 우아하게 쥔 라빌이 무심히 고개를 까딱인다.
“뭐 하니, 가질 않고.”
“……감사합니다.”
라빌이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가서 내 딸 데리고 와. 어떤 패악을 부려도 책임지마.”
변화 없는 표정에서 살기가 어렸다. 난간을 쥐고 계단을 내려오는 라빌의 우아한 자태에서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황실을 적으로 돌려도 감당하겠으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 딸을 데려오라는 협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