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6화 (46/150)

46화.

벨리타가 손을 오므리자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거듭 입술을 문댄다.

“난 네가 다정한 사람인 걸 안다.”

눌린 입술이 움직이자 참을 수 없이 간지럽다. 손바닥에 뜨거운 숨이 터지고 목소리가 쏟아진다. 벨리타는 견딜 수 없는 가려움에 손가락을 굽혔다. 잭슨의 볼이 긁힌다.

“내 생에 다시 주어지는 기회란 없었다. 내게 그걸 주는 이는 너뿐이었다. 오로지 너였어. 옳지 않다 다그치고,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

가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미워질 정도로 간지러웠다. 덜어냈던 것이 개미 떼처럼 살갗을 기어올라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견딜 수 없었다. 벨리타가 손을 빼내었다. 잭슨이 쉽게 손을 놓아준다. 싫다고 한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는 잭슨이 이 순간 더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꽃을 꺾어 나에게 준 것도,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준 것도, 의미 없이 지어 준 웃음이 모두 네가 처음이었다.”

하지 말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살랑거리는 네 머리카락도 좋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네 눈도 좋아.”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다. 널 찾지 말았어야 했다.

“뼈마디가 보일 만큼 마르고 약한 만큼 보다 강한 네 용기를 사랑한다. 날 미워하고 두려워해도 결국은 날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다정한 네가 좋아.”

차라리 날 죽이지. 목을 베고 회복할 수 없을 수준으로 산산이 갈라놓지. 탓만 하고 갈 수 있게, 미친놈이었다고 쓰레기였다고 욕할 수 있게 해주지 그랬어. 널 이용만 하고 막 대한 날 용서하지 말지 그랬니.

억장이 무너진다. 잭슨을 위해서 해준 것은 어느 것 하나 없었다. 오롯이 현실로 돌아갈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같잖은, 대가 없는 호의 한 번 받아본 적 없어서 이기적인 벨리타의 행동에도 마음을 줘버렸다. 네가 사랑이라 느꼈던 내 행동은 모두 날 위한 거였는데도 내가 좋니.

벨리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덜어내고 또 내버렸던 인간성이 아직도 쌓여 있었다.

충분히 버렸어도 간절한 잭슨의 눈을 보면 한 줌, 실수하고 싶지 않아 눈치를 살피는 걸 볼 때 또 한 줌. 적선하듯 던진 호의에 설레하는 모습을 보면 또다시 한 줌. 미안함이 쌓였다.

미안함 위에 죄책감이 얹어지고 그 위에 자괴감이 흩뿌려진다. 벨리타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좋을 대로 속삭일 수 없었다.

자신의 한마디에 희비가 교차하는 아이를 두고 어찌 감히 거짓을 속살거릴까. 어떻게 내가.

내가 어떻게 그래.

벨리타는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삼켜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기엔 벨리타는 너무 낡아 버렸고 사랑하기엔 지쳐 버렸다. 애써 미루고 외면해 오던 감정이 솟는다. 짓누르고 밟아 싹을 꺾었음에도 잎을 틔우고 자라 버린다.

연민이었다.

*

감정에 발목이 묶여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엘라는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지 않는 벨리타에게 의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벨리타가 눈을 뜬 지 2일이 넘어가는 날이었다. 태자궁에 머문 지 5일째다.

엘라는 벨리타의 전속 하녀로서 태자궁에서도 착실히 벨리타를 보필했다. 엘라는 속이 너무도 쓰렸다.

여느 때라면 조잘대며 수다를 떨고 산책을 돌았을 벨리타였다. 태자궁 이곳저곳을 누비며 평소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넉살을 떨고 친밀하게 굴었어야 했다. 벨리타는 손님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잭슨이 자주 벨리타를 위해 드나들었지만 특유의 발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엘라는 이 일이 모두 황태자의 탓이라고 결론을 냈다. 그리고 정답이었다.

엘라는 결국 타운하우스로 편지를 적어 보냈다. 아가씨의 상태가 이상하시다고. 일어나신 지 꽤 되었는데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어 보이시고 미치시기 전의 아가씨 같다며 온갖 걱정을 적어놓았다. 황실 편이 아닌 따로 부친 우편이었으니 타운하우스에 도착하는 시간이 며칠 걸릴 터였다.

엘라가 손님방의 커튼을 걷었다. 순식간에 방이 환하게 밝아진다.

“아가씨, 식사 남기셨다면서요? 역시 드시던 걸 챙겼어야 했나 봐요. 김치라든가 고추장이요.”

“……그래.”

한참의 침묵 뒤 나온 대답이다. 벨리타는 곱게 땋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누워 있던 걸 겨우 일으킨 것이 엘라였다. 엘라가 눈썹을 휘었다.

“기력이 영 없으시네요. 걱정돼 죽겠어요, 아주.”

“그랬구나.”

벨리타가 부스스 웃었다. 웃음에서 매캐한 먼지 향이 난다.

엘라가 벨리타의 손을 덥석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앞으로 기울어 넘어간다. 맥없이 품에 안긴 벨리타를 재빨리 안아 든 엘라가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뒤로 걸음을 딛는다. 일으켜 세우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너풀거리는 걸음으로 품에서 늘어진 벨리타를 한껏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산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엘라가 조곤조곤하게 벨리타를 타이르며 두꺼운 코트를 입히고 겨우 손님방에서 벗어났다.

햇빛이 맑다. 화려한 황궁에 빛이 내리니 반짝거렸다. 벨리타의 손을 잡아 부축하며 뒤쪽 정원까지 끌고 나왔다.

벨리타의 녹음과 하늘이 섞인 눈에 햇볕이 부딪혀 밝게 초롱댄다. 눈이 쌓인 마른 풀을 밟으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벨리타가 옅게 미소 지었다. 엘라가 벨리타의 손을 끌어 걸음을 독촉했다.

“날씨 정말 좋죠? 저기 온실인가 봐요. 아가씨, 저기도 가 볼까요?”

“응.”

뽀드득, 눈을 밟으며 엘라가 앞장선다. 비틀. 벨리타의 몸이 기울어졌다가 돌아온다. 며칠 만에 걷는 터라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눈이 쌓인 정원을 가로질러 온실로 뛰어 들어갔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밖은 눈이 쌓였는데 내부는 봄꽃들이 만연했다. 벨리타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이 형형색색으로 펼쳐져 있고 가운데의 작은 분수를 기준으로 물길이 여럿 트여 뻗어져 흐른다. 벨리타는 분수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비쩍 마른 손에 차갑고 맑은 물줄기가 쏟아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휘적거리자 물이 튄다. 코트가 부분 젖어버렸다. 웃음이 터졌다. 엘라가 벨리타의 옆에 서 맑게 웃는다.

“기분 좋아지셨죠?”

“응?”

엘라가 상체를 숙여 분수대에 고인 물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꽤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했어요.”

벨리타의 웃음이 멎었다. 꽃잎이 살랑댄다. 온실의 바닥에서 따뜻한 바람이 퍼져 나온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흐트러졌다. 코끝이 달았다.

잭슨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나니 죄 포기하고 싶어졌었다. 덜 자란 아이와 결혼을 하는 것도, 자신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헐뜯으며 달아날 방법을 깎아내는 일도. 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을 몰아세우는 순간도 괴로웠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생각을 멈추고 결혼을 해내려는 생각도 괴로웠다. 사면초가였다.

고작 소설 속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머리는 아팠다. 속이 시렸다. 태자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잭슨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과거를 전했다.

타국의 왕녀였던 어머니가 학대를 했고, 사랑받고 싶어 어머니의 부탁대로 칼로 찔러 죽였으며, 그 이후 살기 위해 악착같고 살벌하게 살아왔던 일들을.

이해가 된다. 잭슨의 불안정한 감정들과 표현들이 납득되었다. 그래서 싫었다. 알고 싶지 않았고 미워하고 싶었다. 폭력성에 타당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폭력에 근거를 두고 싶지 않았다. 미워서 사랑할 수 없었고 안타까워서 원망도 할 수 없었다. 이 모호한 감정이 두려워 잭슨에게 틈을 주고 싶지 않았었다.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마음고생을 했다는 걸 엘라도 눈치챈 모양이다. 벨리타는 내심 미안해졌다. 어린아이에게 도움받을 정도로 자신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뼈아프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딸과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소설 같은 꿈을 꾸었노라 허풍도 떨어야 했다.

잡히지도 않을 물줄기를 쥐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흘러내린다.

“이젠 괜찮아.”

괜찮다면 다행이라며 엘라가 수줍게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벨리타가 엘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엘라의 콧김이 거칠어지기에 슬쩍 손을 치워냈다.

그래도 엘라 덕에 기분전환도 했고 슬슬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온실의 문이 부서져라 열린다. 여럿의 발소리가 동시에 뒤섞여 흙을 짓밟는다. 벨리타가 뒤를 돌았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붉은빛이 짙게 감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틀어 올린 젊은 여자는 하녀들을 대동해 쪽수로 밀고 들어왔다.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낀 여자는 벨리타를 같잖은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엘라가 뒤에서 조용히 속삭인다.

“소르니 R. 체르핀 공녀님이세요.”

남작 다음은 자작, 백작, 후작…… 그다음이 공작이던가. 벨리타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은 처음 봤다. 벨리타에겐 황태자인 잭슨은 그냥 불쌍한 애였다.

벨리타는 한국에서 했듯 넙죽 상체를 숙여 인사하려다가 치맛자락을 잡았다. 어색하게 끊어진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맛자락을 살짝 올리며 무릎을 짧게 굽힌다. 소르니의 눈썹이 까닥인다.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체르핀 공녀님.”

뒤에 몰려 있는 하녀들이 수군거린다. 벨리타의 인사에도 소르니가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벨리타의 나름 예의바른 인사가 씹혔다. 이 싸가지 없는……. 쌍욕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소르니를 바라보자 성큼, 벨리타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거리가 가까웠다.

“난 안 반가운데 어쩌지?”

순한 표정을 지으며 벨리타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럼 꺼지던가. 미처 말로 뱉지는 못했다. 사고 칠까 무서워 뒤에 있는 엘라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격 같아서는 톡 쏴주고 싶지만 참았다. 딸보다 어린 아이다. 화를 내면 어른 아니다. 속으로 열심히 되뇌었다.

“황태자비가 되고 싶으시다면서? 네까짓 게 감히.”

소르니의 뒤에 있는 하녀들이 깔깔대며 소리 내어 웃었다. 벨리타의 기를 누르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셈이다.

벨리타는 티 나지 않게 헛웃음을 지었다. 5년간 시어머니를 모셨던 벨리타의 삶에서 이 수준의 기 싸움은 싸움도 아니었다. 정다운 안부 인사였다.

벨리타가 말갛게 웃는다. 악녀와 부딪히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즐겁게 누려줄 수 있는 짬이었다.

“어머머, 어디서 들으셨어요? 소문 너~무 빠르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짓는다. 소르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엘라가 헛숨을 들이켰고,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녀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뻔뻔한 작태였다.

소르니가 무어라 말을 얹기 전에 벨리타가 선수 쳤다. 쉼 없이 떠드는 일은 쉽다 못해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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