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젠 죽음으로 돌아가는 법과 오웬의 도움밖에 남지 않았다.
“어미로 겹쳐 보이던 네게서 사랑을 받고 싶었던 욕심이었나 보아. 이번에야말로 사랑을 받고야 말겠다는 내 심정이.”
눈앞이 흐리다. 벨리타는 커헉, 폐가 쪼그라드는 감각을 여실히 느끼며 온몸에 힘을 풀었다. 이리 죽어 보았자 다시 눈을 뜰 게 뻔하다. 지친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니 고통마저 대수롭지 않았다.
“네겐 그저 가벼운 것으로 보였겠군. 넌 황족을 능멸했다. 하지만 널 해하고 싶지…….”
내가 다시 눈을 뜨기 전에 또 날 죽여줘. 벨리타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겨우 입을 달싹였다.
그를 정면으로 시야에 담던 잭슨의 얼굴이 하염없이 일그러졌다. 잭슨이 발작하듯 목을 붙들던 손을 치워내자 벨리타가 잭슨의 품에 힘없이 늘어졌다. 잭슨은 인형처럼 의지 없는 벨리타를 끌어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바란 건 이게 아니었다. 어미처럼 죽어 버린 껍데기를 부여잡고 온정을 갈구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가 제 손아귀에서 눈을 감는 그 순간, 제 어미가 죽는 찰나 지었던 미소와 같아서 힘을 주지 못했다. 죽이지 못한 것이다. 온전히 숨을 멈출 때까지 목을 졸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해방감을 느낄 정도로 자신이 끔찍한 존재인가. 죽음으로서 행복을 느껴야 할 정도의 고통이었나. 잭슨은 거칠게 콜록대며 호흡을 재개하는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뛰고 가슴께가 들썩인다.
기절한 벨리타의 눈가를 엄지로 느릿하게 쓸어내며 잭슨은 눈물 없이 오열했다. 잭슨은 사랑 받아보지 못한 채 자란 어린아이였고 사랑받는 법을 모르는 천치였다.
목을 조를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달아나지 못하게 뒷목을 쥐었을 뿐인데 죽음을 반기는 얼굴을 했다. 어미와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서 홀린 듯이…….
어린 잭슨의 손에 작은 칼을 쥐여 주고 자신을 찌른 수만큼 포옹을 해주겠다, 약속을 하던 황후의 것과 같았다. 하찮은 포옹 하나가 너무도 간절했다. 나이프를 다정히 함께 쥔 손이 따뜻했다.
다가갈 적마다 내쳐지고 뺨을 맞아 유치가 부러져도 사랑받고 싶었다. 아이를 혐오하는 어머니여도 아이는 자신의 탓을 하며 애정을 갈구했다.
잭슨의 세상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세상은 잭슨이 아니었을 뿐인데도. 어린아이는 그마저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 이유로 잭슨은 제 손으로 어머니를 거듭 찔러 죽이고 살점이 너덜너덜한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무력하게 늘어진 손을 끌어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고 피로 얼룩진 볼을 거듭 어깨와 가슴께에 문지르며 어머니를 찾았다. 황후는 온기를 잃어서야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은 것이다.
잭슨은 이후 후유증을 앓았다. 첫 살인은 너무도 절절히 가슴에 남아 누구를 베어도 충격 한 번 없었다.
그럼에도 벨리타를 원했다. 첫 기억이 강렬히 남아 있어 어머니를 죽일 때처럼이라도 애정을 받고자 했다. 혐오하고 밀어내는 그 모습이 어머니와 같아서 더욱 안달을 냈다. 스스로 토해낸 대로 벨리타를 어머니와 겹쳐 보았다.
희망이 없는 그때와 다르게 벨리타는 자신에게 응해줬고 혐오의 이유도 알려주었으며 관계를 발전해나갈 길도 지시해주었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려고 했다. 스스로도 벨리타를 위해 발전하고자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엇비슷하지만 다르다. 복잡하고 어지럽게 뒤섞인 이 감정도 사랑이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이 마음도, 여린 몸을 품에 안고 말갛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안정을 느끼고자 하는 이 욕심도. 더럽고 구질구질하지만 잭슨에게는 사랑이었다.
잭슨이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아직은 따뜻하다. 살아 있는 한 기회는 있다. 만회할 수 있다.
*
잭슨이 늘어진 벨리타를 안고 나오니 엘라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물음은 하지 못했다. 무려 상대는 황태자였고 엘라는 감히 황태자에게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처지였다.
벨리타는 잭슨과 뜨거운 아침을 보냈던 방에 머물렀다. 엘라는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지 않고 벨리타의 곁을 지켰다.
연유는 알 수 없이 아가씨께서 쓰러지셨고 태자궁에 머물고 있다는 편지를 데이비드에게 보냈다. 편지는 반나절 만에 도착해 데이비드가 파랗게 질려 태자궁으로 돌진하려는 것을 오웬이 뜯어 말렸다. 벨리타가 정신을 차리면 어련히 돌아오지 않겠냐며 지금 가도 어차피 만날 수가 없다고 붙들었다.
태자궁만 가면 기절해서 돌아온다. 한 번 걸러 한 번 꼴이다. 데이비드는 이를 빠득 갈았다. 대체 제 누님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태자궁에 처음 머물렀던 벨리타가 돌아왔을 때를 잊지 못한다. 붕대로 감긴 몸과 상처투성이의 발, 엉망으로 구겨진 하얀 옷에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 있는 벨리타를.
마음 같아서는 황태자의 다리 하나라도 부러트려야 속이 시원했다. 안절부절못하며 거실을 빙글빙글 도는 데이비드를 의아하게 바라본 오웬은 마법사들에게서 배워 온 강의법을 잊지 않으려 메모하고 있었다. 벨리타가 당한 꼴을 알았다면 오웬도 데이비드와 함께 거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을 것이다.
벨리타가 신력과 마력의 충돌로 자빠져 자고 있는 사이 벨리타의 몸 상태에 대한 편지를 받은 라빌과 테일러가 부리나케 수도로 올라왔고, 체르핀 공녀가 소문을 듣고 이를 갈고 있었으며, 잭슨은 벨리타의 옆에 책상을 두고 일정을 해결했다.
*
기절한 지 3일이 지나 저녁이 되어서야 벨리타가 눈을 떴다. 낮은 신음성과 함께 벨리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발, 또 못 죽었어. 또!
맥없이 침대 시트를 내리쳤다. 팡, 소리와 함께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벨리타가 몸을 돌렸다. 잭슨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고 있었다.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잭슨의 손에 두 번 죽을 뻔했다. 목이 졸려서.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도, 죽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무감해진다. 결혼하고자 했던 계획도 어그러진 판에 잭슨에게 화를 낸다고 다 무슨 소용이랴. 벨리타는 완전히 단념했다. 그냥 오웬 머리털이나 뜯으며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거나 반복해서 죽을 생각뿐이었다.
덤덤한 벨리타의 시선을 마주하며 잭슨이 무릎을 꿇었다. 벨리타가 며칠 먹지 못해 덜덜 떨리는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잘못했다. 네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내가 관계를 그르쳤어.”
잭슨이 고개를 떨군 채 손을 떨었다. 고개를 숙인 적도, 무릎을 굽혀 본 적도 없는 황태자가 일개 여인에게 사랑을 구걸하려 자신을 낮추었다. 역사적으로도 황족은 죽는 순간 외에 무릎을 꿇지도 고개를 숙인 적도 없었다.
놀라운 순간에 벨리타는 무감각한 태도로 잭슨을 내려다보았다. 기대를 하지 않으니 상대가 무엇을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용서…….”
말을 이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잭슨은 목 안쪽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다. 놓아버린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투명해서 그 무엇도 깃들지 않은 눈을 하고 잭슨을 담는다. 혼도 없는 육체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잭슨이 다급히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벨리타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왜 안 죽였어? 그냥 죽이지 그랬어.”
공녀와 얽히고 싶지 않아 다급하게 굴었던 게 화근이었다는 걸 안다. 괜히 잭슨을 자극했고 관계를, 미래를 망쳤다. 벨리타는 이제 잭슨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몇 번이나 죽이려고 들었던 가해자가 손을 잡고 빌어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폭력은 익숙하고 가해자가 미안하다고 비는 것도 곧잘 보았던 풍경이다. 새삼. 대수롭지도 않다. 그저 얼굴을 보기 싫을 뿐이다. 마주치고 싶지 않고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더는 볼일도 없었다. 잭슨이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죽지 마. 내가 잘못했다. 나는 널 죽일 수 없어.”
“잘만 했잖아.”
“제발. 그리 말하지 마. 내가 경솔했어. 용서해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약속하지.”
말하는 패턴도 어쩜 이리 똑같을까. 벨리타는 대답 없이 잭슨을 응시했다. 잭슨이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비련하고 구슬프게 연심을 토해낸다. 구성맞게 매달렸다.
“네가 원한다면 황태자비든, 황후든 자리에 앉혀 주마. 떠나지 마. 날 두고 가지 마라.”
“…….”
“비참해도 좋다. 날 가지고 놀아도 좋아. 내 옆에 있어…….”
이미 가지고 놀았다. 간사하게 사람의 마음으로 저울질했다. 못할 짓을 했다. 애정결핍인 아이에게 간절함을 두고 농락했다. 이 짓이 얼마나 끔찍하고 못된 짓거리인지 안다. 아이는 농락당한 걸 알면서도 애정이 고파서, 한 줌의 애정이 필요해서 매달린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처절한 발악이다.
웃음이 나왔다. 성장하지 못한 아이의 바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낀 자신이 한심해서. 현실로 돌아갈 방법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기뻐해서. 벨리타는 자신이 너무도 같잖다고 생각했다. 비겁하고 간사하다. 자괴감이 뼈아프게 짓누른다. 능력도 없어서 남을 이용이나 하는 자신이 꼴사나웠다.
스스로가 혐오스럽다. 자책하는 와중에도 잭슨의 손을 맞잡아 자신을 사랑하느냔 질문이나 하고 있으니.
“……사랑해. 사랑한다.”
과거의 상처와 흉터로 점철된 아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음에도 이용할 생각에 들떠 있는 자신이 구역질이 났다.
사랑한다는 말만 한다면. 비록 저를 죽이려 들었던 남자여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속삭일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이었다. 벨리타가 입을 열었다. 가슴이 먹먹한 만큼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탕발림이 뭐가 어렵다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진실을 외면한 아이에게 그저 달게 조잘대기만 하면 끝인데.
맞잡은 손이 들려 잭슨의 볼에 닿는다. 손등에 온기가 옮는다. 벨리타는 뱉기만 하면 끝날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도 덜어냈는데 아직도 인간성이 남았나 보다.
“……너는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래?”
온실에서는 듣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번에도 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다. 너무 답답해서, 버거워서 탓하고자 지껄인 질문이었다. 잭슨이 주저 않고 입을 열었다.
“처음은 재미였고, 그 뒤는 오기였다. 내 어미에 빗대어 너를 본 건 인정하마. 그렇다고 널 내 어미로 보는 건 아니야.”
묻는 말에나 대답하지, 길게 서두를 늘인 잭슨이 조심스레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벨리타의 양손을 잡는다. 언제든 빼낼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 천천히 잭슨의 쪽으로 손목을 끌어온다.
반항 없이 얌전히 손목을 내놓자 잭슨이 벨리타의 손바닥에 양 볼을 대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어미에게 입을 맞추고 밤을 보내고 싶은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네가 날 호되게 혼내는 것도 좋았다. 미친 척 내게 화를 내고 차게 굴어도 오기만 생겼어.”
잭슨이 고개를 돌려 벨리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문질렀다. 여린 살갗에 닿는 뜨겁고 말캉한 감촉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