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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4화 (44/150)
  • 44화.

    잭슨이 허옇게 질린 얼굴을 했다. 엘라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아가씨! 라는 말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도 깜짝 놀라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벨리타가 마저 비스킷을 삼켰다. 태연한 벨리타 탓에 잭슨도 할 말을 잃었다. 잭슨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러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곳에서 평화로운 사람은 벨리타뿐이었다.

    귀족이라면 익히 알고 있어야 할 예비 황태자비였다. 타국의 공주도 아닌 제국의 공녀였고 정치적인 수단을 위해서라도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었다. 최소한 사교계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다못해 평민들까지 알고 있는 정보였는데도 벨리타는 자신의 무지함을 자랑했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았으면 또 만나러 안 왔죠. 오늘 이 이야기 하려고 왔어요.”

    정석적인 로맨스라면 악녀와 여자 주인공이 기 싸움하고 서로 물고 뜯고 남자 주인공에게 사랑받기 위해 서커스까지 해대지만 벨리타는 귀찮았다.

    딸보다 어린 여자애와 기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고 잭슨에게 사랑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 나이 먹고 사랑 하나 하자고 머리를 쥐어짜며 경쟁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랑 만나고 싶으면 파혼해요.”

    아주 제대로 미친 소리였다.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당장 저 미친 사람의 목을 쳐야 한다고 일갈했을 것이다.

    하녀들의 얼굴과 엘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잘게 진동했다. 평소였다면 벨리타에게 허튼소리 말라며 조언했을 터였지만 너무 놀라서 굳어 버렸다.

    잭슨 또한 매한가지였다.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말을 잘못 들었나, 잭슨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벨리타는 여전히 강고한 태도로 차나 홀짝거렸다. 잭슨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 말, 무슨 의미를 담는지는 알고 하는 건가?”

    “그런 거 모르겠고요. 난 남의 남자랑 어떻게 해 볼 생각 없어요.”

    “나랑 어떻게 해 볼 생각이긴 하다?”

    잭슨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잭슨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기분은 좋군.”

    “남의 남자 뺏는 나쁜 년 되기도 싫고, 양다리 걸치는 남자 만나고 싶지도 않으니까 파혼하세요.”

    엘라가 풀리는 다리로 애써 서 있었다. 자작의 셋째 딸, 엘라는 벨리타가 얼마나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미치셨어요? 아, 미치셨지. 공작가와 척을 지고 황태자에게 정치 수단을 포기하라고 하는 말과 다름없었다. 국방력으로는 제일인 체르핀 공작가다. 황태자가 놓쳐 2황자와 편을 먹게 되면 언제든 목이 날아갈지 모를 정도로 힘이 있다.

    그런 공작가에 척을 지겠다는 뜻이다. 황태자와 짝짜꿍하자고 무력으로 압도적인 공작가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소리였다. 후작가와 공작가의 전면전이 될지도 모른다.

    엘라가 애써 평온을 유지했지만 다 드러났다. 하녀들이 있으니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다. 잭슨이 벨리타를 바라본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모든 일을 그르칠 셈은 아니었다.

    “널 첩으로 들이고자 한다.”

    “싫은데요.”

    “네가 원하는 건 권력인가? 그 연유로 내게 온 건가.”

    잭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태자비를 노려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피가 차갑게 식는 감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을 홀리고 사랑에 빠지게 했나.

    잭슨이 오해를 시작하건 말건 무관한 태도로 일관하던 벨리타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 사랑하는 거.”

    뒤에서 힉, 엘라의 숨소리가 울렸다. 잭슨도 멍청해진 표정으로 돌아온다. 잭슨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목까지 덮어갔다. 얼핏 손을 대면 화상까지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입을 손등으로 가리며 잭슨이 시선을 돌렸다.

    “이미 하고 있지 않나.”

    “그 과정에서 다른 여자가 끼어드는 건 질색이라니까요. 그래서 파혼할 거야, 말 거야.”

    아가씨 그러다 진짜 죽는 수가 있어요. 엘라가 눈을 질끈 감고 벨리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야무지게 튕겨 찻물에 퐁 담가졌다. 정치적으로 큰 파란이 이는 순간이었다.

    잭슨은 엘라에게 시선을 두어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파란만장한 대화를 듣는 게 재미있었던 엘라와 하녀들은 미련 가득 두며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래도 우리 아가씨, 황태자에게 파혼해라 마라 하는 모습 너무 멋있어요. 아가씨 짱. 힐끗 돌아보는 벨리타에게 엘라가 쌍 따봉을 날렸고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엘라와 하녀들이 나가고 넓은 응접실에 단둘만 남았다. 잭슨이 곤란한 티를 팍팍 내며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결혼이다. 이제 와 어찌할 수 없어.”

    “…….”

    “황태자비를 사랑하지 않아. 황태자비가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일은 없을 거다.”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잭슨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벨리타를 향했다. 탓하는 듯, 말투가 퉁명스럽다.

    “넌 날 사랑하지 않지 않나. 싫어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

    벨리타가 다 비워낸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너, 아니, 전하께서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척을 해줄 수 있다. 벨리타는 할 수 있었다. 해야 한다면 해야만 했다. 원하지 않아도 벨리타의 선택은 없었다.

    “내가 사랑해주길 바라잖아.”

    벨리타가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주춤하는 잭슨에게 상체를 기울인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해줄게요. 날 황태자비로 들여.”

    잭슨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혹스러움과 설렘이 가득한 어지러운 낯짝이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이 움찔, 떨렸다. 숨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다. 테이블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치 않는 일을 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는다. 갖고 노는 꼴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를 데리고 장난질을 치는 불쾌감.

    정치 상황을 고려할 틈을 주면 안 된다. 벨리타와 체르핀 공작가를 두고 저울질할 시간을 주면 그르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상황을 주어야 했다.

    벨리타의 목표는 그저 남자 주인공과 결혼해 현실로 돌아가는 것. 방해꾼은 필요 없다. 시기만 늦춰질 뿐이다.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혼인을 해낸다면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첩 따위가 아닌, 유일무이한 결혼 상대가 되어야만.

    죄책감이 일었다. 자괴감도 든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간절한 마음을 두고 간악하게 수작질이나 하는 꼴이 우습고 비참하다. 벨리타는 벨리타를 팔아 넘겼고 자신을 위해 인간성을 하나 덜어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함께 살 수 있어.”

    입술이 맞닿는다. 벨리타의 입술이 잭슨의 벌어진 입술을 덮고 진득하게 내리눌렀다.

    크게 트인 창문 너머로 햇빛이 내린다.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며 보석처럼 빛났다.

    벨리타의 긴 머리카락이 잭슨의 위로 흘러내렸다. 주황색의 가락들이 볼을 간질이고 어깨 너머로 흐트러진다. 말캉한 입술이 짓눌린다. 벨리타의 가는 팔이 잭슨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잭슨은 첫 키스를 벨리타에게 내주었다.

    벨리타가 고개를 뒤로 물리자 잭슨의 입술이 쫓아 다시 덮는다. 집요해서 숨이 가쁘다. 잭슨은 생전 처음 사탕을 맛본 아이처럼 굴었다. 달콤한 디저트의 맛과 함께 마신 차의 떫음이 뒤섞인다. 눈을 감은 벨리타가 다급하게 잭슨의 뒷머리를 헤집었다. 잭슨의 손이 벨리타의 허리를 감쌌다. 벨리타에 의해 저지당한다.

    벨리타가 잭슨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입술을 옷소매로 투박하게 닦아낸 잭슨이 열기가 오른 채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거칠다. 벨리타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내게 마음이 없는 걸 안다.”

    “…….”

    “사랑해주겠다고 했지, 날 사랑한다고 하지 않은 것도 알아.”

    잭슨의 위에 무릎을 벌려 앉은 벨리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크고 굳은살이 잡힌 손이 벨리타의 발목을 잡는다. 한 손에 쉽게 잡혔다.

    “입을 맞추니 황홀할 지경이야.”

    발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벨리타가 낮게 침음을 삼켰다. 발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고통에 잭슨에게 시선을 돌리자 벨리타는 가슴 안쪽이 무너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만큼 비참하군.”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잭슨의 입술이 희게 질릴 정도로 꽉 다물렸다. 벨리타가 무릎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붙들린 발목이 끌려 잭슨의 어깨에 엎어진다. 상체를 일으키기도 이전에 빠르게 등이 악력에 의해 짓눌렸다. 벨리타가 신음성을 뱉어냈다. 분노와 참담함이 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황태자의 연심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이는 벨리타, 너뿐일 것이다.”

    “……윽.”

    “그냥 발목을 부러트리고 가둬둘 걸 그랬어. 목을 꺾어 놓을걸.”

    억눌리는 듯 갈라졌다. 잭슨이 한마디 한마디를 씹어 뱉을 때마다 벨리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벨리타를 무력으로 제압해두지 않았음을 원통해하고 있었다. 강제로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두고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내면을 죽여 놓을 것을 그랬다고.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테지.”

    지금이라도 숨을 앗아버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더한 상실감을 느끼기 이전에 제 손으로 해내어 육체라도 가질 수 있도록.

    벨리타는 잭슨의 팔뚝에 손을 얹어 힘을 주어 밀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손에 힘이 풀렸다. 맥이 풀린다. 지금이라면 벨리타를 죽이고 다시 목을 베어주지 않을까. 살아날 수 없도록.

    “황태자비가 그리 탐이 나던가? 주인이 있다고 하니 빼앗고 싶던가?”

    벨리타의 등을 압박하던 손이 부드럽게 선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처음은 흥미였다. 네가 재미있었어.”

    가는 목덜미를 틈 없이 감싼 손이 느긋하게 힘이 들어간다. 안마라도 하는 양 아주 천천히. 벨리타가 목을 쥐기 편하게 고개를 들었다.

    “뺨을 맞고 나니 오기가 생기더군. 시체 따위가 아닌 온전한 품으로 안고자 했어. 다 굳은 시체를 끌어안고 매달리는 꼴은 지긋지긋했으니까.”

    목이 답답해진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의 악력이었다. 벨리타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말을 뱉어낼 때마다 황량하게 갈라졌다.

    “너에게서 내 어미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리도 안달이 났나 싶기도 해. 욕심을 채우고 싶은 거라는 말, 이제는 알겠다.”

    숨이 막힌다. 벨리타가 잭슨의 어깨와 팔뚝을 긁어내렸다. 죽이려면 빨리 죽였으면 했다. 눈치채지 않길 바랐는데. 사랑으로 속여서 결혼하면 쉬운 일이었는데. 다 그르쳤다. 남자 주인공과의 결혼은 완벽하게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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