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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3화 (43/150)
  • 43화.

    벨리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약혼자?

    이내 벨리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결혼할 사람도 있는 새끼가 날 그렇게 쫓아다녔다고?

    벨리타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데이비드가 숟가락에 밥과 수육, 쌈장을 얹어 입에 아앙, 밀어 넣는다.

    약혼자가 누구냐는 벨리타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던 데이비드가 음식을 삼키고서야 입을 열었다.

    “체르핀가의 공녀입니다. 악랄하고 독한 사람이라고 유명한데, 모르십니까?”

    잊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이 있다면 악역도 있다는 것을. 잭슨과 그냥 결혼을 한다고 해도 싫어 죽을 지경인 판국에 방해꾼까지 나타나면 정말 하기 싫어진다. 벨리타만 쏙 빼고 둘이 결혼하게 두고 싶을 정도다.

    벨리타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짐을 느꼈다. 후작보다 높은 지위의 공작. 황권과 대등한 권력의 소유자.

    그 집안의 딸내미. 벨리타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등산 다녀와서 기분 좋았는데 바닥을 뚫다 못해 지구 반대편까지 갈라버릴 정도로 저조해졌다.

    데이비드가 아는 정도의 소문이면 이미 약혼자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잭슨을 만난 지 2일이 지났으니 조만간 또 만남이 있어야 했다.

    찾아가지 않으면 쳐들어올 테니까. 아 씨부럴, 입맛 뚝 떨어지네. 오웬한테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배울까. 언제든 도망쳐버리게.

    순간 오웬이 타운하우스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같이 사는 사람인데 데이비드에게 말은 해줘야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또 난리를 피우겠지만 어쩌겠는가.

    “조만간 마법사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 거야.”

    “예? 누님 좀 미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그래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말해주잖아.”

    “……회복을 위해서, 입니까.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누나 몸 안 좋다고 나름 신경은 쓰고 있나 보다. 벨리타는 시중을 들고 있던 시종에게 대충 명령했다. 사람 오니까 방 두 개 정도는 내줘라. 하나는 연구실, 하나는 침실로.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하녀장에게 달려갔다. 조만간 잭슨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역시 조금 미뤄야겠다, 생각하며 벨리타는 상추를 쌈에 찍어 욱여넣었다.

    *

    정확히 3일 뒤, 오웬이 짐을 가득 챙겨 벨리타의 집에 들어왔다. 책으로 산을 쌓을 정도인데 오웬의 생필품은 얼마 없었다. 시종과 하인을 시켜 짐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데이비드도 오웬을 반겼다. 데이비드가 소개하는 오웬은 유명하고 능력 좋은 마법사였다. 벨리타는 지금 알았다. 정리가 끝마칠 때까지 오웬과 벨리타, 데이비드는 응접실에 모여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벨리타가 걱정했던 것보다 꽤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지인을 만날 때마다 가시를 세워서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조슈아와 잭슨에게만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멀쩡한 녀석에게는 멀쩡하게 대했다. 오웬과 데이비드는 말이 잘 통했다.

    마정석의 유용성과 활용법 등을 가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에 벨리타는 할 말 없이 얌전히 간식을 베어 물었다. 들어 보니 마정석이 보석같이 생겨선 마력을 품고 있는 돌이라고 했다. 마법사의 마력 대신으로 사용도 하고 주문을 새겨 넣어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하기에 벨리타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벨리타에게는 쓸모없는 지식이었다. 몬스터를 잡으면 준다나 뭐라나. 몬스터 서식지 근처에 마정석 동굴이 꼭 하나씩은 있다나 뭐라나.

    벨리타가 베어 문 디저트를 입에 욱여넣자 오웬이 손을 내민다. 시선은 데이비드를 향해 있으면서 흘러내리는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줬다. 선수다. 이 녀석 어딜 봐도 선수다.

    오웬은 데이비드와 대화에 열중하며 디저트가 쌓인 트레이를 벨리타 쪽으로 밀었다. 벨리타가 오웬을 힐끗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오웬의 눈가가 사르르 접히자 벨리타가 훽,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아프다.

    데이비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둘의 행각을 지켜보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이었다.

    화목하면서도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문이 두드려진다. 시종이 들어와 벨리타에게 도착한 편지를 내밀었다. 황실에서 도착한 편지였다. 안 봐도 뻔하다. 아니 황태자는 할 일도 없나 허구한 날 편지만 써대네.

    벨리타가 대충 편지 봉투를 주욱 찢어 편지지를 꺼냈다. 데이비드와 오웬의 관심이 편지지에 쏠렸다.

    [왜 안 오나? 기다리고 있다.

    ps.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성문 앞에서 기다리며 흥얼거렸던 노래는 어찌 알았는지 추신까지 적어가며 협박한다. 문지기가 듣기에는 상당히 협박성의 노랫말로 들렸기에 잭슨에게 보고되었다는 건 잭슨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나름 친숙한 장난으로 쓴 가사가 벨리타에게 짜증을 주었다는 건 잭슨은 모를 일이다. 벨리타가 편지지를 구기자 데이비드가 걱정스레 질문한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오웬이 깜짝 놀라 질문한다. 벨리타가 황태자와 편지까지 주고받는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벨리타가 구겨 버린 편지지를 테이블에 던져놓자 오웬이 주문을 짧게 읊었다. 그러자 편지지가 공중에 떠 활활 타는 벽난로로 직행했다. 장작과 함께 황태자의 편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신기하다. 마법사 짱이다. 벨리타가 눈을 빛내며 오웬을 바라보자 벨리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낮게 소곤댔다.

    “나 두고 다른 남자랑 편지 주고받으면 속상해.”

    누가 들어도 오해할 법한 말을 해놓고는 능청맞게 웃는다. 벨리타의 주먹이 어깨를 강타했다. 얻어맞은 어깨를 부여잡으며 끄으응, 신음을 앓는다.

    벨리타가 씨근덕거리고 오웬이 소파에 상체를 뉘어 아프다 호소했다. 나 죽어, 나 아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데이비드가 차를 조용히 홀짝이며 누님이 오늘도 누님 했군, 생각했다.

    가벼운 티타임을 마치고 내일이나 내일모레 가라며 매달리는 오웬을 떼어놓았다. 낯선 곳에 예민한 자신을 혼자 두지 말라고 불쌍한 척하는 오웬의 어깨를 토닥인 벨리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웬이 희망에 찬 얼굴을 하자마자 벨리타는 그를 홱 밀어버려 마차를 타고 떠났다. 엘라가 마차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해맑게 손을 흔든다.

    “들어갑시다. 누님은 원래 저런 분이십니다.”

    데이비드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저택 안으로 들인다. 오웬이 미련이 뚝뚝 남은 시선으로 마차를 바라보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열심히 달려 태자궁에 도착했다. 정말 미리 지시라도 해뒀는지 파텔 가문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들어서자 문지기들은 벨리타가 있는지 확인하고 곧장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하녀가 그새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엘라가 벨리타의 뒤에 붙어 선다.

    하녀가 안내하는 대로 긴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도착했다. 잭슨이 업무를 보고 있어 조금 늦어진다는 말과 함께 차를 내온 하녀는 바로 사라졌다.

    벨리타가 엘라에게 몰래 쿠키를 나누어 주고 차를 반쯤 비웠을 때, 잭슨이 문을 벌컥 열었다. 잭슨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강아지처럼 반가워하는 낯짝이다.

    화려한 응접실에 잘 차려입은 잭슨이 벨리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약간 식어 버린 차를 개의치 않고 홀짝이며 잘도 마셨다.

    “그대는 말도 없이 쳐들어오는 것에 일가견이 있군.”

    “편지 받자마자 왔는데 싫어요?”

    “싫을 리가. 좋다는 뜻인데. 언제든 와도 좋아. 여기에서 살아도 좋고.”

    잭슨이 미소 짓자 벨리타도 마주 미소 지었다. 벨리타는 잭슨에게 웃는 모습 한 번 잘 보여주지 않았던 터라 잭슨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헛소리하면 나 가요.”

    “안 하겠다.”

    진작 그럴 것이지. 벨리타가 차를 들이켰다. 잭슨은 사적인 자리에서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마음만 급해져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벨리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래 보고 싶지도 않아 단번에 진도나 뺄까, 싶었던 벨리타였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오라고 해서 왔는데 차만 먹이고 돌려보낼 건가요?”

    “……무어라고 해야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기야 결혼하면 남편이라는 애 하나 더 키운다고 하니. 이왕 남편을 키운다면 제 입맛으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가르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오래 볼 것도 아닌 데다 귀찮은 게 제일 큰 흠이긴 하지만. 벨리타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잘 지냈어요? 뭐 하고 지냈나요? 난 어제 등산을 하고 왔어요. 몸 움직이고 하니까 기분 좋더라고요.”

    “어, 음, 난…….”

    잭슨이 할 말을 골랐다. 벨리타에게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싫어하고 폭력적인 면을 혐오하는 걸 알고 있기에 황후의 세력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수하들을 시켜 목을 베고 증거를 인멸했으며 황후의 침대맡에 협박 쪽지도 두었단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평화롭고 일상적인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나지 않는다. 벨리타와 연관된 일이라면 고작.

    “벨리타, 네가 꽂아주고 간 꽃을 말려놓았다. 황궁 마법사를 시켜 보존시키려 했지만 시종장이 반대하더군. 바짝 말려 간직하는 것이 낭만이라던데.”

    시종장이라면 벨리타의 최근 행적을 낱낱이 까발린 사람 아니던가. 벨리타는 아니꼽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가 꼴에 낭만은 아나 보다 싶어 반대쪽 눈썹도 움직여 보였다.

    벨리타가 눈썹만 까딱거릴 뿐 평소처럼 야 이 새끼야, 저 새끼야 하지 않아 잭슨이 눈치를 살폈다. 적당히 넘어갈 정도의 이야깃거리인 모양이었다. 잭슨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책갈피로 쓰면 좋다고 하기에 곧잘 읽는 서적에 꽂아놓았다. 책에서 마른 꽃 향이 나더군. 썩 기분이 좋아.”

    “처음으로 예쁜 짓 했네.”

    “어느 부분이 예쁜가?”

    그걸 꼭 이야기해 주어야 아느냐 쏘아붙이려 했지만 벨리타를 바라보는 얼굴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배우겠다, 알려달라고 하더니 제대로 배울 생각인 듯했다.

    벨리타가 상체를 숙여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엘라가 티 나지 않게 화들짝 놀랐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경거망동을!

    엘라가 놀라 자빠지건 삼바를 추건 알 리 없는 벨리타가 잭슨의 요구대로 사소한 부분까지 짚어내 칭찬했다. 칭찬해 주면 더 잘하려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황태자도 섹시댄스 추게 만들 수 있다.

    벨리타가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오만함이 기본 장착이 되어 있는 잭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의 말 잘 듣고, 꽃 안 버리고 간직하고 있는 점과 헛소리 안 하고 편한 이야기를 했다는 점 등등.

    잭슨이 붉어진 얼굴을 옅게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잭슨의 반응을 벨리타의 뒤에서 직관하고 있던 엘라의 얼굴도 민망하게 붉어진다.

    벨리타가 비스킷을 한 입 베어 물며 말을 덧붙인다.

    “약혼자도 있으신 분이 예쁜 짓 하나 마나지만요.”

    “……새삼.”

    “엄맘마? 나는 몰랐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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