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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2화 (42/150)

42화.

그리 오래 오르지도 않았는데 땀이 송글, 묻어난다. 차가운 공기가 맑았다.

멍하니 절경을 바라보았다. 이리도 작고 부질없는데 아등바등한 꼴이 우스웠다. 이 조그마한 것들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은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뭘 위해 그리 뼈와 살을 갈아가며 살았는가. 언제나 무섭고 거대해 보이던 황궁과 저택들이 별 게 아닌 듯했다.

벨리타가 작은 나무잔을 내밀었다.

“어때요, 죽이죠?”

맥주였다. 차가운 맥주. 평민들과 같아 보이기 싫어서, 얕보이기 싫어 입에도 대지 않던 맥주였다. 홀린 듯 받아 들었다.

“사람이 몸도 움직이고, 햇빛도 받으면서 살아야 해. 기분 좋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벨리타를 보자, 자신의 숨이 거칠고 목이 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슈아가 조심스레 맥주를 넘겼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맥주가 맛있는 거였구나. 일부러 천시하고 외면하던 것도 막상 접해 보니 꽤 괜찮았다.

벨리타가 가볍게 조슈아의 등을 토닥인다.

“나한테는 이게 휴식이었어요. 하루 시간 들여서 산을 오르고 술 한잔 걸치고 내려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벨리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오를 때에는 그리도 힘들고 위태로웠는데 정상에 올라서니 감회가 남달랐다. 꼭 지금의 자신과도 같았다. 지금의 자리까지 정신없이 기어 올라와 지나쳐 온 과거들을 내려다보는 감각이었다. 그 시기에는 죽지 못해 살았고 살기 위해 죽은 듯 견뎌 고통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이제 보니 썩 그렇지만은 않더라. 괴롭고 버거운 삶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 덕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까지 생겼다. 훗날의 겨울에도 지금을 돌이켜보며 그때는 피곤했지, 라고 감상을 남길 거다. 바닥에 나뒹구는 썩은 음식을 주워 먹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고, 무능력하고 한심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제 사람을 위해 도움을 줄 정도로 자랐다. 이후에는 더 성장하겠지.

나, 꽤 열심히 살았구나.

조슈아가 맥주를 비워냈다. 벨리타가 곧장 잔을 채워줬다.

“꼭 거창한 걸 해야만 쉬는 건가요. 나 하고 싶은 거 하면 쉬는 거지. 그쵸?”

“그러네요.”

“요새 기분 좀 별로였는데 등산하니까 좋네.”

벨리타가 제 잔에 있는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 신음인지 주문인지 모를 말을 뱉어내고 허리를 돌린다.

조슈아도 따라 맥주를 죄 삼키곤 기지개를 켰다. 개운하다. 겨울바람에 땀이 식어 얼어붙었지만 견딜 만했다.

벨리타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또 다른 천을 꺼내 바닥을 덮었다.

길게 얹어진 천 쪼가리 위에 그릇을 놓았다.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뿐 아니라 삶은 돼지고기와 김치, 상추가 얹어졌다. 조슈아는 어안이 벙벙해져 이게 뭔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벨리타가 천 위에 털썩 주저앉고는 옆자리를 두드렸다.

“먹고 내려가요. 안 먹으면 내려가다가 다리 풀려.”

“아, 네……. 이게 뭔, 가요?”

“수육인데~ 입에 안 맞을까 봐 샌드위치도 챙겨 왔어요.”

조슈아가 벨리타의 옆에 앉아 밥상을 훑어봤다. 김치를 보자 움찔, 몸을 떤다. 그때 강렬한 기억 탓에 몸이 반응했다. 샌드위치를 먹자. 저 음식에 관심도 두지 말자. 조슈아가 잘 먹겠다며 샌드위치를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섣불리 먹기에는 벨리타에게 당한 것이 있었다.

상추 위에 삶은 돼지고기를 얹고, 얼마 전에 담근 김치를 길게 찢어 올린다. 바쁘다고 챙겨오지 못한 마늘과 쌈장이 없는 게 흠이지만 이대로 먹어도 맛은 있다. 벨리타가 상추를 잘 여며 한입에 욱여넣는다. 이거지! 벨리타가 허벅지를 내리쳤다.

너무도 야무지고 맛깔나게 먹는 벨리타를 보니 그렇게 맛있나 싶다. 침샘이 돋는다. 샌드위치도 맛이 없지 않지만 벨리타가 너무 맛있게 먹는다. 볼을 가득 채우고 우물우물 씹는 게 귀엽기도 하고. 수육이라는 음식은 대체 어느 나라 음식일까. 제국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음식이었다.

오는 길이 오래 걸리지 않아 얼지는 않은 식어버린 수육이 아쉬운 벨리타였다. 보온병 같은 게 있었더라면 수육도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다시금 고기를 두 점 얹은 쌈을 크게 욱여넣던 벨리타가 조슈아의 시선을 느꼈다. 벨리타가 척척, 쌈을 싸 조슈아의 입에 들이밀었다.

당황해하든 말든 손짓으로 먹어 보라고 종용하는 벨리타 덕에 조슈아는 속는 셈 치고 한입에 받아먹었다. 김치의 매운 맛을 고기와 상추가 상쇄시키고 있었다. 고기가 식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맛있었을 게 분명했다. 김치도 전보다 매운 맛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볼을 빵빵하게 채운 쌈을 열심히 씹었다.

투박하지만 맛있다. 새로운 맛의 세계를 느껴 버렸다. 잘 먹는 조슈아가 보기 좋았던 벨리타는 쌈을 더 싸서 조슈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살갑고 다정하다. 손수 챙겨주는 상냥함이 어색했지만 황홀하다. 춥지만 개운하고 녹아버릴 듯 행복했다. 조슈아는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신이다. 아쉬운 식사는 끝나 버렸고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벨리타가 가방을 고쳐 들었다.

“자, 갈까요?”

“네, 또 보약이라고 풀 뜯지 마시고요.”

“어디 가서 구하지도 못해~”

또 뜯겠다는 말이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상쾌하다. 일벌레면 어떻고 괴로운 삶이면 또 어떤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우니 그로도 충분했다.

*

데이비드는 미간을 짚었다. 벨리타가 또 산을 올랐다가 괴상한 풀을 뜯어와 조리를 하고 있던 탓이다.

이번에는 무슨 잡초를 뜯어왔냐 물으니 냉이라고 하더라. 듣도 보도 못한 잡초였다. 고추를 대량으로 구해다가 말려서 갈고 웬 꾸덕한 양념을 만들지 않나. 들어 보니 영지에서는 시종들을 들들 볶아 콩을 삶고 웬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벽돌 같은 걸 만들었다고 했다.

책을 그렇게 읽더니 이상한 걸 만드는 모양이었다. 벨리타가 요구한 탓에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외국의 식재료들을 공수해 오는 것도 일이었다. 물론 파텔 상단이 식재료를 유통하고 판매해 그리 품이 들지는 않았지만 썩지 않게 가져오기 위해 마법사나 아티펙트가 필요했던 터라 돈이 들었다. 벨리타는 모르겠지.

평민들이나 먹는 쌀을 구해오라며 짜증이라는 짜증은 죄 내다가 직접 괴이한 식사까지 만들어 혼자 싹싹 비우기도 했었다. 냄새는 썩 괜찮았지만.

오늘도 주방을 차지하고 주방장들이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가며 요리를 했다. 이상하게 요리를 잘해서 대체 자신이 없는 그 긴 기간 동안 뭘 했나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친구들과 만났더니 친구들이 네 누나 황태자랑 쎄쎄쎄 한다며? 라는 소문을 이야기해 줬던 터라 누님을 들들 볶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엌에 있어 들어가기도 요원하다. 데이비드가 식당에 놓인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하녀가 눈치를 보며 데이비드에게 말을 건넨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식사를 준비하셨는데 드시겠어요?”

싫다. 절대 싫다. 그 이상한 음식을 어떻게 먹느냔 말인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음식이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하녀가 눈에 띄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아쉬워했다.

“아가씨께서 도련님 생각하셔서 요리하신 건데……. 안 드시나요, 정말?”

아 진짜……. 짜증……난……다……. 먹기 싫은데. 정말 먹기 싫은데.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위해 요리했다고 하니 거절하기도 그랬다. 이미 만들었는데 이제 와 안 먹겠다고 입 다무는 것도 벨리타를 화나게 할 테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의 얼굴이 밝아진다.

식사 놓아드리겠다며 사라진 하녀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던 데이비드는 고개를 숙였다.

맛있는 척해야 하나. 황태자와 관련하여 따질 것도 많았는데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쾅!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린다. 화들짝 놀란 데이비드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벨리타였다. 시종들이 트레이에 음식을 들고 벨리타의 뒤를 따라왔다. 식탁에 음식들이 놓인다.

음식을 두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며 벨리타가 직접 나서서 식기를 내려놓았다. 데이비드는 제 앞에 놓이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애써 웃음 지었다.

“누님, 이게 뭡니까?”

“밥.”

“그걸 누가 모릅니까. 이름이 뭐냐고요.”

벨리타가 뭐 그딴 것까지 물어보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손가락으로 짚으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냉이 된장국, 밥, 냉이 무침, 김치, 수육, 쌈장, 마늘, 상추 등등. 완벽한 한식이었다. 데이비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음식이었지만.

설명을 마친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앞에 마주 앉았다. 외국에서나 쓰는 젓가락을 어디서 또 구해왔는지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벨리타가 먹는 방식을 따라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꽤…….

“맛이…… 괜찮습니다.”

“그래? 맛있지? 더 먹어, 이것도 먹고.”

흰 쌀밥 위에 냉이 무침과 수육을 얹어준다. 어설프게 숟가락으로 떠먹으려니 우수수 떨어지고 만다. 벨리타가 비웃는다. 데이비드는 열이 받았다. 반드시 이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 콧대를 눌러주고야 말겠다.

불쑥, 벨리타가 쌈을 싸 데이비드의 입에 들이밀었다. 데이비드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린다.

빨리 먹으라며 채근하니 더 민망하다. 직접 입에 갖다 대주는 건 어린아이에게나 하는 태도 아닌가. 데이비드가 우물쭈물, 슬쩍 쌈을 베어 물었다가 벨리타에게 쌍욕을 얻어먹었다. 얌전히 한입에 욱여넣는다.

“으읍!”

맵다! 데이비드가 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굴레에 갇혀버리자 벨리타가 배를 감싸 안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테이블까지 팡팡 내리치며 자지러진다.

데이비드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대체 뭔 개짓거리냐는 눈으로 원망을 가득 담아 쏘아보았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한참을 웃은 벨리타가 뱉어도 된다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더는 참지 못해 손수건에 쌈을 뱉어냈다. 마늘이 다섯 개다. 벨리타가 또 처웃는다. 데이비드가 손수건을 감싸 구겨버렸다.

“뭐하는 짓입니까?”

“아~ 재밌다. 먹어, 먹어.”

“매워서 입맛이 달아났습니다.”

“어허~ 음식 해 주면 고마운 줄 알고 싹싹 비워 먹어야지.”

능숙하고 익숙하게 쌈을 싸 먹고 국으로 입가심을 하며 야무지게도 먹는다. 데이비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매운 것 빼고는 꽤 먹을 만했던 음식인지라 숟가락과 포크를 이용해 우수수 흘려가며 그릇을 비워냈다.

데이비드가 은 숟가락으로 밥을 한 덩이 퍼내며 황태자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누님께서 황태자 전하와 관계가 깊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아십니까?”

“아, 그거 걔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야.”

“누님은 무슨 미친놈 수집가입니까?”

맞는 말 아닌가. 조슈아도 변태고, 잭슨은 살육을 일삼는 폭군의 희망이다. 벨리타가 파하! 웃어 버린다. 웃을 때가 아닌데. 진짜 웃을 때 아닌데. 데이비드가 국을 떠 마시며 인상을 찌푸렸다. 잘못 얽히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다 죽은 목숨이다.

“약혼자의 귀에 들어갔으면 어쩌시려고 그리 얽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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