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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1화 (41/150)

41화.

오웬의 입술 끝이 유려하게 휘어 올랐다. 미소가 예쁘다. 벨리타는 그저 예쁜 얼굴을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는지 오웬이 벨리타의 볼을 엄지로 옅게 문지른다.

눈이 마주친다. 오웬이 고개를 숙여 벨리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카락을 비집고 목덜미에 닿는 입술과 숨이 간지럽다.

“난 좋은데, 너.”

“……엉?”

“되게 재미있어. 네 몸 상태도 흥미로워. 연구하고 싶어.”

그런 의미였구나, 맥이 풀린다. 그럼 그렇지. 이상형과는 연애 못 한다더니. 더군다나 벨리타에게는 결혼해야만 하는 남자 주인공이 있지 않은가.

벨리타가 오웬을 밀어냈다. 꿈쩍도 않던 오웬은 쉽게 밀려나 테이블에 다시 걸터앉는다. 후, 더워진 공기 탓에 손부채질을 하자 오웬이 능글맞게 웃는다.

“나 때문에 더워?”

“시끄러. 마력 다루는 거나 마저 알려 줘.”

“이론은 아까 다 설명해 줬잖아.”

꼬부랑글씨가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고 정체도 모를 도형들이 그려져 있는 그 종이가 이론이라면 벨리타는 다시 한번 오웬의 머리채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살벌함을 오웬도 느꼈는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가 방긋 웃는다.

“난 바로 됐는데, 그걸 왜 못하지?”

벨리타의 주먹이 날아갔다. 오웬의 얼굴은 건들지 말자는 다짐 덕에 주먹이 배에 꽂힌다. 오웬이 다시금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천재들은 너무 쉽게 해내어서 설명을 못 한다던 속설이 딱 맞았다.

벨리타가 살기를 가득 담아 오웬을 내려다보았다. 쿨럭, 오웬이 마른기침을 했다.

“너, 짐 챙겨.”

“컥, 쿨럭, 뭐, 뭐?”

“같이 살아. 하루 종일 나 가르쳐. 알았어?”

오웬이 기침하는 것도 잊고 멍청한 얼굴을 했다. 꼴사납게 바닥에 뒹구는 건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으며 가련하게 다리를 모으고 앉은 오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거 프러포…….”

“입주 가정 교사야. 방 빼줄 테니까 짐 챙겨서 빨리 들어와. 가뜩이나 촉박한데 왔다 갔다 시간만 아깝지.”

후작 영애라 그런지 호탕하고 멋있으십니다. 오웬이 손을 딸랑딸랑 흔들며 아부했다.

자신이 마탑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아버지가 들으면 기절하겠지만 아직 마탑주는 오웬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오웬의 아버지가 마탑주의 직급을 내려놓으면 그 뒤에 돌아가도 괜찮았다. 7서클이시니 늙지도 죽지도 않아 평생 마탑으로 돌아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수련했는데도 실패한 벨리타가 겉옷을 입었다. 오웬이 벌떡 일어나 벨리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연구실을 지나 마탑의 출입구까지 배웅을 간 오웬이 마차로 가려는 벨리타를 불러 세웠다.

“그럼 짐 챙기는 대로 갈게.”

“집 주소 알지? 짐 너무 많으면 편지 써, 사람 보낼 테니까.”

돈 많고 배려 넘치는 벨리타 멋지다.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기 힘들었는데 빛 자체였다.

벨리타는 대충 손 인사만 건네고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오웬은 연구실로 돌아가며 다른 마법사들에게 강의하는 법을 배우고 벨리타에게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벨리타는 일도 안 하는데 참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후식을 먹고 있는 중에 조슈아가 찾아온 것이다.

데이비드가 있었으면 분명 문전박대를 했을 텐데, 데이비드는 친구랑 논다고 상가로 떠나버렸다. 그런 이유로 벨리타는 조슈아와 후식을 먹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찾아오고.”

“연락 보냈는데 닿지 못했나 봐요. 데이비드 님께서 실수로 버리셨을지 모르고요.”

설마 데이비드가 이유 없이 버리진 않았겠다 싶어 벨리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데이비드는 조슈아의 구구절절 벨리타를 찬양하는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벽난로에 던져 불쏘시개로 썼다는 사실은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나의 빛이라느니 신이라느니 역겨워서 그만. 벨리타에게 전해 줄 필요도 없는 편지들이었다.

오늘 날도 좋아 등산하려고 했는데 조슈아가 있으니 여의치 않다. 손님 왔는데 내쫓기도 뭐하다. 수도 끝자락의 산세는 험하지 않고 완만했으며, 그 산에 나물들도 많다. 봄이었으면 더 많겠지.

벨리타가 슬쩍, 조슈아를 떠보기로 했다. 같이 등산하면 좋고, 안 하면 쫓아내지 뭐.

“사실 제가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제가 가도 되나요? 당연히 가죠. 얼마든지요.”

칼같이 매정한 벨리타가 먼저 어딜 가자고 권유한 것이 기뻤다. 조슈아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장렬히 후회했다.

아가씨 가는 길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앗 등산이요? 다녀오세요!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엘라가 동행을 자의로 거부할 정도인 것에 의심을 했어야 했다. 벨리타가 평민 남성의 옷을 입고 상인들이 멜 법한 가방을 메고 맥주를 담아 가는 기이한 행동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마차를 타고 뒷산에 가서 산을 오르는 것까지는 좋았다. 눈이 얼어 자칫하면 미끄러져 넘어질 땅을 밟고 오르는 것도 괜찮았다. 벨리타는 침대에서만 살았다고 했으면서 어찌 미끄러운 땅을 성큼성큼 딛고 바위 위에 올라서 나무 사이에 핀 잡초들을 뜯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저것 담은 가방이 무겁지도 않은지 들고 잘도 오른다. 잔뜩 뜯은 정체 모를 풀들을 천에 싸서 가방 안에 쑤셔 넣질 않나, 바닥에 나뒹구는 두꺼운 막대를 들고 휘두르다가 지팡이 삼으라며 주질 않나. 물론 잘 짚고 다녔다. 튼튼하고 가시도 없어서 유용했다. 벨리타는 그걸 어떻게 찾았는가 이 말이다.

이제 좀 본격적으로 오르나 싶더니 벨리타가 구석으로 향했다. 또 풀 뜯고 있다. 조슈아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어 오르며 벨리타의 뒤에 섰다.

“……영애, 대체 뭐 하세요?”

“이게 다 약초야, 약초.”

“대체 무슨 약초……인데요?”

“냉이. 눈에 좋은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 물으려다 벨리타가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책에서 나온 걸까. 조슈아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봐서는 뭐가 냉이이고 뭐가 잡초인지 몰라보겠는데 벨리타는 이상하게도 흙을 헤집고 쏙쏙 풀을 뜯어 천으로 감싸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저러고 또 주저앉아 풀을 뜯겠지. 조슈아는 벨리타의 가방을 대신 들었다. 무겁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어떻게 산에 올랐지?

벨리타가 조슈아의 팔뚝을 가볍게 토닥이며 가방을 빼앗아 든다. 멋있는 척하려고 했지만 무거운 걸 들고 산을 오르기에는 엄두도 나지 않아 얌전히 빼앗겼다.

가방을 들쳐 멘 벨리타가 다시 흙길을 밟았다. 조슈아도 벨리타의 뒤를 쫓아 올랐다. 시린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겨울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린다. 얼어 있는 바닥을 밟아 부스러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산짐승들이 부리나케 뛰어가는 뜀박질도 들렸다. 겨울의 산은 이러했다.

하늘은 푸르지만 산은 거무죽죽하다. 계절의 끝을 직면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끝난다면 이런 장면일까 싶기도 했다. 두꺼운 나뭇가지를 짚어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청량하다. 벨리타가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겨울 산도 꽤 괜찮지요?”

“아, 그럼요. 좋네요.”

멸망의 끝이 보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투에서 묻어나는 어두운 기색에 벨리타는 신발코로 바닥을 긁어 밀어냈다. 땅에 묻혀 있던 도토리가 파헤쳐졌다. 다시 신발 바닥으로 덮어 묻었다.

“휑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초라해 보여도.”

느린 조슈아의 걸음에 맞추어 벨리타가 큼지막한 돌덩이 위에 엉덩이를 기댔다. 주위를 둘러보는 벨리타의 얼굴이 온화하다. 마른 가지들에 가려 빛이 들지 않던 바닥에 조각난 햇빛이 드리워진다.

“다시 활짝 피고 새 생명이 돋아날 거야. 다 끝난 것처럼 보여도 새 시작을 위해 쉬어가는 중인 거지요. 그 과정이 눈에 보이는 게 멋지지 않아요?”

추위에 얼굴이 붉다. 벨리타는 붉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겨울은 쉬는 계절이잖아요. 돌아오는 봄을 위해서 마음을 느긋하게 내려놓고 찬찬히 준비하는 시기.”

“…….”

“동물도 겨울잠을 자는데 사람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세상 만물이 다 쉬는데. 사람이 언제나 봄이고 여름일까요.”

어느새 조슈아가 두꺼운 나뭇가지를 바닥에 짚어 벨리타의 앞에 섰다. 벨리타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시 천천히 조슈아의 속도에 맞추어 산을 오른다.

“너는 쉬고 있어요?”

선뜻 그렇다 대답할 수 없었다. 여태껏 쉬어본 적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위해 뜀박질만 해오며 살아왔다. 뒤 한 번 돌아본 적 없고 멈추어 본 적도 없다. 잘 살기 위해서, 다들 바쁘게 살아오니까. 그들을 제치고 우위에 서기 위해서 그들보다 더 뜀박질을 하고 쉴 새 없이 달렸다.

쉬어도 될까.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까. 또다시 버러지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무언이 대답이었다. 벨리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길게 뱉어냈다. 입김이 퍼져나간다.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아 봐야 남는 건 몇 없더라고. 돌이켜 보면 미련만 남아요. 그때 놀았어야 하는데, 그때 내 행복이 뭔지 찾아도 괜찮았을 텐데, 하고. 지나치고 나면 지친 나밖에 안 남아요.”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뭐, 미친년이 또 미친 소리 한다, 생각해요.”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벨리타의 얼굴에 후회가 묻어난다. 겪어본 것처럼 그 감정을 절절히 느껴본 것처럼 생생하다.

조슈아는 피어나는 의심의 싹을 애써 자르고 묻어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아는 벨리타는 이런 사람이고,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여인이 세월을 겪은 노인처럼 굴어도 이상하지 않다.

“저는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부터 쉬면 되죠. 여름처럼 뜨거웠으면 이제 겨울이 와야 될 때잖아요.”

“어떻게 쉬면 되나요……?”

“그걸 나한테 물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쉬는 거예요. 먹고 자고 뒹굴어도 쉬는 거고, 여행 가고, 취미 만들고.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게 쉬는 거죠. 그걸 난 너무 늦게 알았지 뭐야.”

연륜이 묻어나는 답이다. 이질감이 뒷목까지 기어 올라오지만 애써 갈무리했다.

겨울. 그래, 겨울이다. 만물이 쉬어가는 시기. 그렇기에 무엇도 일을 하지 않아 가장 적막하고 고요한 계절. 메마르고 척박한, 매정한 계절이자 더 나은 이후를 위해 잠에 드는 순간. 스스로를 위해 숨을 돌리고 몸을 뉘는 보상. 쉬지 않는 자신은 이상한 사람인가? 사람들이 일컫는 일벌레, 따위인가.

조금 더 걸으니 어느새 산 정상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도의 건물들과 멀리 뻗어나가는 푸른 하늘. 손안에 다 잡히는 황궁. 모든 것이 작다. 손을 뻗으면 모조리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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