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래도 신관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잘된 일이었다. 신전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부터 연애는 물론이요,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시릴리우스 신만 섬겨야 했다. 먹으라고 주는 건지 의문인 풀떼기에 좁은 신전에서 다닥다닥 붙어살며 봉사만 하며 살아야 한다.
신력도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강력해지는데, 벨리타가 신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분명 라빌과 테일러가 알면 기절할 노릇일 터다. 신관과 의원에게 그리도 돈을 쏟아부었는데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 부아가 치밀겠지. 진작 대사제를 찾아 딸을 보였어야 했다며 가슴을 부여잡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허무할까.
데이비드를 데려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얼마나 한탄을 할까. 벨리타의 상태와 해결 방안을 전해주면 이제 자신은 정말 필요 없어질 것이다. 아카데미도 자퇴시키고 본래의 집으로 돌려보내겠지. 자신의 전부이자 유일했던 목표인 가주는 벨리타에게 향할 테다.
쓸모없네, 나. 여태껏 파텔가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밉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며 견뎌왔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진다. 본가를 가든, 계속 이곳에 있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는 쓰게 웃었다.
벨리타가 갑자기 축 처진 데이비드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너 뭐냐? 표정 뭐야.”
“뭘 말입니까.”
“무슨 생각하는데 얼굴이 그따위야.”
데이비드는 입을 달싹였다. 수치스러워서 말 못 하겠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데이비드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깜짝 놀란 데이비드가 맞은 손을 감싸 쥐고 벨리타를 바라본다. 벨리타가 수프를 떠먹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땅굴 파지 말고 얘기해. 막상 말하고 보면 다 별거 아니야.”
“누님이 뭘 아십니까.”
“별거 아닌지 별거인지 우선 말해 보라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벨리타는 어떤 반응을 해 보일까. 우스워할까? 옳다구나 할까? 혹시, 정말 혹시라도…… 가족으로…….
입이 도통 떨어지지 않는다. 돌아올 반응이 두렵고 염려되어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벨리타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가볍게, 정말 가볍게 떠보자.
“누님이, 건강해지시면 저는 진짜 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네가 왜 가?”
“예?”
“난 가주 안 할 거라니까?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야.”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개소리를 듣고 넘기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데이비드가 손을 꿈지럭거렸다. 가슴께가 울렁거려서 어쩔 줄 모르겠다. 여전히 자신을 필요로 한다. 라빌과 테일러는 몰라도, 벨리타만은 데이비드를 필요로 했다. 제 삶의 전부였던 목표를 잃지 않도록.
귓가가 붉게 물든 데이비드가 헛기침을 했다. 수프가 바닥을 드러내자 빵이 놓인다.
“그럼 누님은, 큼……. 하고 싶으신 게 뭡니까?”
“몰라.”
그러면서 뭘 어쩐다고? 데이비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벨리타가 빵을 길게 찢어 먹는다. 하고 싶은 거라면 딸을 보는 거. 딸에게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거. 그러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고 있다.
그새를 못 참고 데이비드가 또 시비를 걸고, 벨리타는 맞받아치며 식사가 이어졌다. 퍽 단란해 보였다.
*
“야아익, 개애새끼이야!”
“악! 머리, 머리!”
단정히 차려입은 벨리타가 보랏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카락을 쥐고 뜯었다. 오웬이 벨리타의 손을 챱챱, 쳐 가며 단말마를 질러댔고 우악스러운 손이 흔드는 대로 머리가 신명 나게 휘저어졌다. 그 이유인 즉, 오웬이 서클이고 나발이고 더럽게 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전날 잭슨의 나 좋아해줘 찡찡, 사건 덕분에 찾아가지 못해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마탑으로 갔다. 오웬은 양치를 하며 벨리타를 맞이했다. 그래도 쓴소리 들었다고 청소는 싹 해두었다.
벨리타는 오웬이 마탑에서 사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집이 없나. 벨리타의 합리적인 의심은 정답이었다. 오웬은 마탑주인 아버지와 싸워서 마탑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술식에 들어가는 철자 하나 틀렸다고 싸우다가 저택 끄트머리를 날려 먹어 그대로 집을 나와 마탑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마법사들이 많은 덕에 오웬은 자연스럽게 밥도 잘 먹고 잘 싸고 잘 씻으며 살았다.
천재 마법사 오웬은 사회성이 좋지만 그뿐이었고 가르치기는 젬병이었다. 만약 교수를 했다면 F 다발을 학생들에게 선사해 줬을 능력만 좋은 교수였을 것이다.
서클은커녕 마력을 다룰 줄도 모르는 벨리타에게 눈 감으면 마력이 느껴지고 마력들을 덕지덕지 모아 응축하면 서클이 생긴다고 했다. 정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왜 못하지……? 라는 말은 덤이었다.
설명을 들어도 당최 감도 잡히지 않아 아침부터 해가 지는 이 시각까지 마력을 감지하려 진땀 뻘뻘 흘려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곁에서 오웬이 잘한다, 잘한다, 응원까지 해 줬지만 얄밉기만 할 뿐이었다. 수만 번의 헛고생 끝에 참지 못한 벨리타가 결국 오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오웬이 다급히 벨리타의 허리를 움켜쥐어 번쩍 들었다. 어어, 당황해하는 벨리타를 든 채 성큼성큼 걸어 소파에 풀썩 앉혀버린다.
벨리타의 양어깨 위로 손을 얹어 소파에 지탱한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가깝다. 벨리타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오웬이 아양 떨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을 이렇게 막 대해도 돼?”
거의 벨리타 위에 올라탄 듯 하는 오웬의 자세가 제삼자의 눈으로 본다면 분명 아이고, 하던 거 하세요, 하게 될 상황이었다.
벨리타의 허벅지 옆, 소파를 누르는 오웬의 무릎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벨리타가 오웬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가볍게 민다. 오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이야! 저리 안 가?”
“왜? 선생님으로는 만족 못 해?”
와, 이 미친……. 벨리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들이대주면 감사하긴 한데요. 어리고 잘생긴 남자가 예쁜 짓 하니까 기분은 좋은데. 양심이 원 투 펀치를 날리고 있다.
오웬보다 나이 많은 딸이 있다, 정신이 있는 거냐, 양심이 소리 지른다.
오웬의 어깨를 꾸욱 밀었다. 오웬이 더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선생님이 열심히 강의해 주는데 머리채나 잡고. 못된 학생한테 혼을 내줘야겠지?”
그 목소리로 그런 멘트를 치면 정말 반칙이다. 당장 내 침실로 아웃. 큰일이다. 이성이 점점 아득해진다. 올라가는 손을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으로 잡아 내리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다.
순간 돌아온 제정신에 벨리타가 이마로 오웬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악, 오웬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벨리타가 씨근덕거리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얼굴은 건들지 말걸. 조금 후회했지만 사고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마를 부여잡은 오웬이 원망 어린 눈으로 벨리타를 올려다봤다. 벨리타가 콧방귀를 뀐다.
“뭐! 선생이 잘 가르쳐야 선생이지!”
“네가 못하는 거잖아! 그 쉬운 걸 왜 이해도 못 해?”
“너 진짜 내 손에 죽어 볼래?”
“머리 맞으면 머리 나빠진댔어! 네가 나 책임져!”
응! 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방심을 할 수가 없다. 틈만 보이면 훅 들어와 버리니 정신 줄 단단히 잡고 있어야 했다.
오웬 같은 부류는 바람둥이라 마음을 주면 줄수록 손해만 본다. 여기저기 껄떡거리기나 할 거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여자는 많을 터였다. 역시 딱 이 정도 거리의 관계가 좋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멀어 눈요깃거리나 하면 충분하다.
벨리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웬이 비틀대며 일어선다. 이마에 붉게 자국이 남았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오웬이 벨리타를 돌아본다.
“새삼…… 너 마법에 재능 전혀 없구나.”
벨리타는 마법은커녕 검도 다루어 본 적 없다. 식칼이면 몰라도. 당연히 지식도 없고 재능도 없을 게 분명했다. 벨리타는 부루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없어도 살려면 해야지.”
“네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을 해도 될까. 벨리타가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어차피 자신이 이곳 사람도 아닌 걸 아는데 말해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벨리타가 혼잣말하듯 대답했다.
“죽으면 현실로 돌아갈 것 같아서, 자살하면 신력 때문에 회복돼. 신관이 계속 죽다 보면 죽을 수 있다고 했는데 힘 충돌 때문에 기절하는 사이에 신력이 계속 회복되어서 못 죽고 있어.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야.”
“……어?”
오웬의 멍청한 대답 탓에 벨리타가 시선을 돌렸다. 오웬의 얼굴이 멍하다. 털썩, 전에 그랬듯 테이블에 걸터앉아 벨리타를 마주 본다. 눈빛이 퍽 진지해졌다.
“그 방법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어쩌려고?”
벨리타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죽었다고 해서 현실로 돌아갈지 미지수임을. 어쩌겠는가. 목표는 명확하고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면 안 된다. 게다가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죽음도 나쁘지 않았다. 거짓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다면 죽어도 뭐…….”
태연한 말을 듣자마자 오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앉은 채로 상체를 숙여 벨리타를 올려다본다.
위에서 보는 얼굴이 잘생겼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걸까. 이렇게 이용해 먹나. 벨리타가 시선을 피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헛소리 마. 이게 기회일 리가 없어.”
“벨리타. 네가 지금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정말 이곳이 싫어?”
“난 돌아가야 하는데 좋고 싫은 게 뭐가 중요해?”
“나는?”
벨리타의 마른 손에 큰 손이 얹어진다. 고생해 본 적 없는 섬섬옥수가 얇고 앙상한 손등을 가볍게 쓸어낸다. 손등이 간질거린다.
어느새 오웬이 벨리타의 앞에 서서 상체를 숙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협적이지 않지만 심장에는 극도로 위험하다. 보석의 호박과도 같은 눈동자에 벨리타의 붉어진 얼굴이 비친다.
“나는 어떤데?”
천천히 다가온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오웬이 상체를 숙이면 숙일수록 달고 무거운 향이 풍겼다.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오웬의 눈가에 드리워졌다.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와 표정이지만 색정적이다. 단정한 눈매가 가늘게 접힌다.
“좋아? 싫어?”
“…….”
오웬의 손이 부드럽게 벨리타의 볼을 감싼다.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벨리타의 볼에 온기를 더했다.
열이 오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좋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오웬은 벨리타의 취향 그 자체였고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성격도 썩 나쁘진 않았다. 궁금하고 신기하던 마법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비교적 멀쩡한 정신머리다.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가 목 안쪽에서 목소리를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그저 입만 벙끗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