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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9화 (39/150)

39화.

모래들을 지르밟는 발소리가 겹쳐 퍼진다. 무슨 강아지 기다려 시키는 것도 아니고.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멈추었다.

“따라오지 말랬지. 네가 개야?”

“날 버리지 마라. 더는 버려지고 싶지 않아.”

“네가 버려지고 싶지 않은 게 나랑 뭔 상관이야. 네가 잘했어야지.”

틀어쥐면 쉽게 손안에 가두어둘 수 있을 텐데. 원하는 대로 맞추어주면 신기루처럼 닿지도 못한다. 억지로 쥐면 얼마 못 가 달아나겠지. 달아나지 못하게 하면 잭슨의 모든 것을 거부하며 말라 죽어갈 거다. 이제 알겠다. 벨리타는 붙들고자 하면 흩어진다. 손안에 쥔 모래처럼.

가지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어찌해야 곁에 둘 수 있지?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개를 꺾고, 달리려는 말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최선책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잭슨은 최악의 선택지 중 차악을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가면 권력을 행사하겠다.”

“얼씨구.”

“가족들이 차례로 목이 잘려 나가는 꼴을 보고 싶은가?”

“……너 진짜 또라이구나.”

“그렇게 해서라도 널 곁에 두고 싶은 나는 보이지 않나?”

“내가 그걸 왜 봐야 하냐니까?”

정말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다. 차라리 지금 죽으면 황천길 따라 탭댄스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을 잘 들어서 오냐오냐해주면 바로 헛짓을 하니 골치가 아프다. 진짜 맞아야 정신을 차리나?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가? 때리고 화내는 자신을 왜 좋다고 매달리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벨리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착잡하다.

“야. 내가 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지. 싫다고 했지.”

벨리타가 마른세수를 했다. 짜증이 가득 묻어나온다. 잘 정돈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화를 쏟아냈다.

“기회 줬잖아, 내가. 왜 싫으냐고? 너 하는 짓거리를 봐. 좀 괜찮아진다 싶으면 바로 정 다 떨어지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좋아라 해? 내가 왜 널 좋아해야 돼? 싫은 짓을 해도 난 널 좋아해야 해? 네가 뭔데. 나 붙잡아 두려고 가족 목을 썰겠다는데 왜 좋아해야 하는데.”

한마디 한마디마다 비수를 꽂는다. 울렁거릴 정도로 심장이 속절없이 내려앉는다. 냉혹하게 찔러오는 벼려진 칼날이 가슴에 쌓였다. 진저리 나게 혐오하는 얼굴이, 목소리가 괴로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잭슨이 가슴께를 움켜쥔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질 않는다. 코가 맵다.

“널 만족시킬 방법을 몰라. 모르겠어.”

“모르겠으면 공부해.”

“알려줘.”

다리가 풀린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 포기하고 벨리타를 놓아버리고 싶다. 막무가내로 떠밀어 눕히고 목을 감싸 쥐어 무게를 실으면 제 품에서 얌전히 안겨줄 텐데.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 굳어가는 사지를 끌어안으면 간단한데.

간혹 보여주는 웃는 얼굴이 너무도 좋다. 그릇된 행동을 하면 옳지 않다 혼을 내는 엄한 모습도 좋다. 잡은 손이, 단 향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이 온기를 띠길 바라서. 살아 움직이기를. 멈추어 버리는 건 이미 한 번으로도 족하다.

“배우겠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면…… 완벽하게, 네가 바라는 대로 해낼 테니.”

‘내가 왜 좋아?’ 답을 모르겠던 질문이었다. 툭, 쏘아붙이던 날카로운 질문. 입이 틀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할 수 있다. 하루 종일이라도 지껄일 수 있다.

잭슨은 마른 눈가를 찌푸리며 떨리는 입을 겨우 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천하를 거머쥘 제국의 미래, 결코 고개를 숙여 본 적 없을 권력자가 한낱 계집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랑을 구걸하는 순간이었다.

절절하기도 하다. 벨리타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는 않았지만 아침부터 따귀를 올려붙였고, 악담을 퍼부었는데도 왜 좋다고 목을 맬까. 어린 시절 갖지 못한 모성을 갈구하려 드는 것쯤은 알겠다. 하지만 이렇게 몰아붙이니 친엄마여도 넌더리가 났을 테다.

혹시 변태인가? 혼나고 맞는 것에 희열을 느끼나?

벨리타는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현실에서 만났더라면 당장 경찰에 넘기고 콩밥 자유이용권을 선물해 줬을 것이다. 자신을 현실로 돌려보내 줄 동아줄이라서, 벨리타에게 선택지라고는 없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 해도 잭슨과는 마주치게 되겠지. 벨리타는 여자 주인공이고 잭슨은 남자 주인공이니까. 이 세상이 정해준 운명이니까.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저치는 계속해서 벨리타의 곁에 알짱댈 것이다. 체념. 포기였다.

머리에 꽃을 달고 본새 나는 제복에 흙을 덕지덕지 묻힌 채 한 번만 봐달라고 비는 잭슨에게 벨리타가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한 번뿐이야. 더는 없어.”

잭슨의 얼굴이 환해졌다. 벨리타는 감흥 없이 밝아진 그를 바라보다가 마저 걸음을 뗐다.

“벨리타, 네가 언제든 올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겠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온실을 벗어났다.

뒤쪽 정원과 이어진 통로에서 노타가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벨리타는 아는 체하지 않고 지나쳤다. 노타가 뛰어 벨리타의 앞을 가로막는다.

“영애! 괜찮으신 거예요?”

“네가 말했다면서요?”

“……예?”

노타는 짚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잭슨에게 사람들과 함께 개방된 온실로 가라 조언도 해 줬고, 가볍게 근황을 이야기하라고 벨리타의 최근 행적들도 전해줬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되도록 겁주지 말고 상냥하게 대하라고도 했다.

연애는커녕 사람들이랑 관계 만들기도 못하는 잭슨에게 많은 도움을 줬었다.

어라? 잘못한 게 없는데?

노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노타는 깔끔하게 딱 필요한 부분만 짚어 족집게 강의를 해주었다. 벨리타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뭘…….”

“내가 어디서 뭘 하던 댁이랑 뭔 상관이세요.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면 좋아요?”

사나운 말투를 들으니 알 것 같았다. 우리 불쌍하고 친구 없는 황태자 전하를 위해 벨리타의 소식을 전해준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오지랖이었구나. 타인이 제 자잘한 소식 전해 퍼트리는 건 기분 나쁠 법도 했다.

노타가 주저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고 소리쳤다.

말로 머리채를 잡아 두들겨 팰 준비를 하던 벨리타는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바로 사과하니 할 말이 없어진 탓이다.

끙, 미간을 짚고 잠시 울컥하는 화를 가라앉힌 후 새침하게 앞을 막은 노타를 비켜 지나쳤다. 노타가 졸졸 벨리타를 따라온다.

“마차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필요 없어!”

“영애께서 두고 가신 드레스도 준비해뒀어요!”

“갖다 버려!”

틈을 주지 않는다. 말로 꼬드기는 것에 자신이 있던 노타였지만 어째 한 번을 파고들지 못했다. 철옹성이다.

둘은 긴 복도를 뛰듯이 걸었다. 우리 황태자 전하 친구 생기는 꼴 좀 보자. 노타가 표정으로 열심히 울었다. 벨리타는 앞만 보느라 보지 못했다.

“전하께서 영애 엄청 기다리셨다고요! 또 와 주실 거죠?!”

“몰라!! 그만 따라와요!”

어느새 타고 왔던 마차 앞까지 도달한 벨리타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은 노타를 앙심 가득 담아 째려본 후 쾅! 문을 닫고 출발해버렸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노타가 손을 다소곳이 모아 기도한다.

영애가 또 와서 우리 전하랑 친구 하게 해 주세요……. 사람 만들어 주세요…….

터덜터덜, 풀이 팍 죽은 채 노타가 태자궁으로 돌아갔다.

*

벨리타는 잭슨을 만나고 오웬에게 찾아가 서클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했었지만, 잭슨 탓에 기력을 다 써서 그냥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가씨 가는 길, 제가 빠질 수 없죠! 하다가 등짝 맞고 나가떨어진 엘라는 마차가 보이자마자 뛰어나와 반겼다. 브루노 영지에서 손 한 번 잡아줬다고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손을 내미는 엘라였다.

벨리타가 심드렁하게 손을 얹어 내리자 엘라가 아가씨 손……. 욕망에 찌든 눈으로 바라보기에 파박, 쳐냈다. 쟤는 갈수록 기분 나빠진다.

따끈한 저택 내부로 들어왔다. 저녁 준비를 하는지 벌써부터 냄새가 좋다. 데이비드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벨리타를 반겼다.

“늦게 오신다기에 맛있는 거 먹으려고 했는데. 왜 일찍 오셨습니까?”

“피곤해서 그냥 왔어.”

“황태자 전하 만나고 오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서 맛있는 거 안 줍니까?”

“그 자식 얼굴 보면 입맛 떨어져.”

“만나러 간 사람이 누군데.”

“뒈져, 진짜.”

벨리타의 코트를 받아주던 시녀가 훈훈하게 애정 넘치는 남매간의 대화에 슬슬 뒤로 물러났다.

벨리타와 데이비드가 오순도순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데 하녀가 끼어들어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 식사하러 오시라며 전했다. 둘의 대화가 뚝, 멎었다. 싸우더라도 밥은 먹고 싸워야 한다. 밥 먹고 싸우면 더 기운 넘친다.

뽈뽈뽈, 식당으로 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니 식사가 놓인다. 애피타이저를 입에 물자 데이비드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말을 걸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왜 만나고 오셨습니까?”

“아.”

까먹고 말 안 해줬다. 조슈아가 어련히 해줬을 줄 알았다. 입에 있던 과일을 삼킨 벨리타가 몸이 아팠던 이유와 해결 방법을 이야기해줬다.

데이비드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렸다. 길다면 긴 이야기를 짧게 압축한 벨리타가 마저 사과를 먹었다. 데이비드가 손가락으로 입을 감싸며 진지하게 고뇌한다.

이내 데이비드가 테이블을 약하게 내리친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데이비드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게 밥상머리 앞에서.”

“그만 때리십시오! 머리 나빠집니다!”

“나빠질 머리도 없으면서 엄살은.”

데이비드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맞은 부근을 문지르며 벨리타를 쏘아본다. 벨리타가 손을 치켜드니 눈을 내리깐다. 때리고 싶지 않은데 꼭 때려야 말을 듣는다. 소설이나 현실이나 이런 부분은 다른 게 없다. 동생은 매로 다스린다는 건 어디에서도 똑같다.

눈을 내리깔았던 데이비드가 힐끔 벨리타를 흘겨봤다. 서운하다는 티가 팍팍 묻어나온다.

“누님은 아셨으면 얘기 좀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까먹었어.”

“누님 진짜 미치셨습니까?”

“미친년한테 미쳤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되냐.”

데이비드가 신경질적으로 사과를 욱여넣는다. 싸가지 없는 태도였지만 잘 먹으니 봐주기로 한다.

애피타이저 옆에 수프가 놓였다. 데이비드가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적거리며 투덜거렸다. 밥상머리 예의가 똥 같았다. 거슬려 죽겠다.

“그럼 전부터 드나들던 신관들은 그냥 무능해서 몰랐던 겁니까.”

“그렇지.”

“영지에 전해야겠습니다. 부모님이 아셔야 합니다.”

“예쁘게 잘 돌려서 얘기해라. 까무러치실라.”

벨리타의 무심한 말을 들은 데이비드가 수저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짜증이 역력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로틀 남작이 먼저 압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걔가 엿들은 걸 왜 내 탓을 해.”

“그 변태 자식이 마법사를 구해오는 그 시간 동안 저는 아무것도 몰랐단 말입니다! 가족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일 아니냐고요!”

“그 녀석이 좀 변태 같기는 해~?”

벨리타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능글맞게 웃는다.

논점을 벗어난 대답에 현기증이 인 데이비드가 이마를 짚었다. 와중에도 조슈아가 변태인 건 인지하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아니 아는데 왜 친하게 지내는 건데. 누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걸 데이비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르게 숨을 내쉬며 애써 침착함을 챙긴 데이비드가 타는 속을 메우려 찬물을 들이켰다.

로틀 남작이랑 친하게 지내는 건 둘째치고 서운하다. 가족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나도 잘하는 마법사 구해올 수 있는데! 부모님이랑 엉엉 우리 누님 너무 고생했다 얼싸안고 눈물 흘릴 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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