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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8화 (38/150)
  • 38화.

    맞잡은 손을 거듭 쥔다. 놓고 싶지 않은 듯.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매달리는 것처럼. 벨리타는 장미에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해준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목매는 조슈아나 데이비드, 하다못해 엘라에게도 무언가를 해주었다. 온정을 베풀고 동정이라도 주었다. 잭슨에게는? 잭슨에게는 뭘 해줬지? 그저 여자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매달리는 걸까?

    초면에 미친년처럼 굴었다고 납치 감금을 시도하고 이렇게나 안달복달하는 게 맞는 진행인가? 벨리타는 기이한 불쾌감이 발목부터 기어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잭슨은 벨리타를 연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감금하려고 들 때에나 비슷한 감정이었지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아이가 부모의 정을 갈구하는 듯한…….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쁨받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아이의 꼴이다. 친엄마를 죽였다고 했다. 잭슨이 직접, 제 손으로. 그 사건이 잭슨의 큰 결핍으로 남아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벨리타를. 벨리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알고 싶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의 결핍이고 자시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도 짜증 난다. 이걸 내가 왜 알아야 돼? 벨리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면 복 달아나는데. 이미 달아날 복도 없다. 복이 있었으면 벨리타는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너 나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이대로 나도 너 좋아. 우리 결혼할까, 까칠한 아기 고양이? 라고 대답하면 그대로 식장 들어가면 되는 건데. 없는 복도 걷어찼다.

    벨리타는 잭슨을 사랑하지 않아도 잭슨은 벨리타를 사랑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몸 주인이 너무도 불쌍하다. 원래의 소설대로 잭슨이 본래의 벨리타를 지금과 다른 연애 감정으로 사랑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여자 주인공에게 모성애를 갈구하는 남자 주인공이라니. 소름 끼친다. 역겹다.

    그저 자신이 아이를 키운 어머니라서, 우연히 잭슨의 결핍을 건드려서 이렇게 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제 딸의 얼굴을 태연하게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돈 벌기에 바빠서 딸을 챙겨주지 못한 탓일까. 그래서 이런 거북한 소설을 쓴 걸까. 벨리타가 잭슨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잭슨이 인상을 찌푸린다.

    “좋아한다는, 정확히 뭐지?”

    “뭐?”

    진짜 염병첨병을 한다. 벨리타는 뒷골이 당겼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애를 키운다, 애를 키워.

    “생각만 해도 행복한 거. 몰라 이 새끼야, 쓸데없는 거 물어보지 마.”

    벨리타도 정확히 무엇이다 짚어줄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게 뭐더라. 가물가물하다. 신경질적인 답변에 잭슨이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확신할 수 없다는 모양새로 잭슨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거라면, 맞아. 네가 좋다.”

    “그럼 날 사랑해?”

    또 사랑이 뭐냐고 물어보려고. 벨리타가 잭슨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선수 쳐 말을 쏟아낸다.

    “내가 귀해서 어쩔 줄 모르겠어? 소중하고 막 그래?”

    “그래.”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네가 귀하고 소중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손에 넣고 싶고 내 울타리 안에 가두고 싶어. 오직 나만 널 소유하고 싶다.”

    “그건 집착이고, 또라이야.”

    잭슨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가 가라앉는다. 집착. 잭슨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렇게 절절한 감정이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지. 간절해서 안달이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맞잡은 손에 가벼이 힘을 준다. 이대로 제 궁에 가두어놓고 탐하고 싶은데.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서 간직하고 싶다. 타인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 분명 사랑이었다.

    “너 나 사랑 안 하잖아. 나로 네 욕심 채우고 싶은 거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모르면 말아.”

    벨리타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딱히 나서서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 샐쭉하게 고개를 돌린다. 이곳 등장인물들은 어린아이에서 멈추어 자라지 않았다. 몸만 큰 어린아이. 징그러울 정도로 결핍으로 뭉친 캐릭터들이다.

    한참 어린 애기들이라고 생각하면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려고. 어른 탓이지. 어른들이 잘 보살폈다면 샤를로트 백작가 아들, 타린처럼 밝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 터였다.

    으레 자주 속으로 되새기던 말이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느그들 엿대로 해라. 나는 내 갈 길 갈란다.

    새침하게 맞잡은 손을 끌어 앞장선다. 잭슨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장미 꽃밭을 지나니 보랏빛의 라일락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꼭 잭슨의 눈동자와 비슷해서 벨리타가 무심코 뚝, 가지를 꺾어냈다. 손아귀에 라일락이 가득하다. 또 무슨 미친 짓인가 경계하는 잭슨에게 라일락을 들이밀었다.

    손이 닿지 않아 뒤꿈치를 들고, 귀 위에 꽂았다. 킥킥, 장난스럽게 벨리타가 숨죽여 웃는다.

    “눈이랑 똑같은 색이네. 잘 어울려.”

    잭슨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꽃들 사이에 파묻혀 처진 눈을 접어가며 웃는 꼴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누구도 자신과 눈을 마주한 적 없다. 신의 사랑을 받는 보라색의 눈이라 칭송받아도 누구 하나 깊게 들여다본 적도 없었다.

    잭슨의 얼굴이 붉게 타오른다. 지나쳐온 장미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꽃잎이 하나씩 나풀거린다. 가지가 꽂힌 귓가가 붉다. 벨리타는 고개를 기울였다. 얘, 진짜 나 좋아하나? 지 엄마를 빗대어 보는 게 아니었나?

    바닥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든 잭슨이 장미와도 같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날……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벨리타가 빙글, 등을 돌렸다. 다시 천천히 발을 딛는다. 천연덕스럽게 꽃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응. 싫은데?”

    “그럼 왜…….”

    찰나였지만 기대가 솟았다. 잭슨은 빈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실망한 티를 숨길 수 없었다. 등을 진 채 앞장서던 벨리타가 고개만 돌려 잭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꽃 닮았다고 하지도 못해? 너 그렇게 보수적이야?”

    “뭐?”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앞을 향해 척척 걸어 나가는 벨리타를 겨우 쫓아간다. 머리에 꽃을 꽂은 채로. 잭슨은 몽글거리는 가슴께가 근질거려 긴장했다. 이대로 보내면 언제가 되어서야 또 만날 수 있을까. 걸을 때마다 눈앞에 너풀거리는 주황색의 머리카락이 자기 전까지 생각날 것 같다.

    다음 날이 되어서도, 그다음 해가 떠서도. 꽃이 응집된 향유와 지나치는 꽃들의 내음이 섞여 코를 맴도는 단 향도 틈만 나면 떠오를 터다. 손아귀에 남김없이 들어차는 여리고 작은 손도 기어코 생각나고 말겠지. 매일 이 순간을 회상하며 안달을 할 것이다.

    자신을 찾아와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리고, 견디다가 결국 참지 못해 또 실망시킬 테고. 그냥 꺾어버리자. 가지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 억지로라도 가지면 된다. 잭슨은 빈손을 벨리타를 향해 뻗었다.

    “아이고, 해 지네.”

    고개를 유리 너머로 틀어낸 벨리타가 탄식을 뱉어냈다. 우악스럽게 뻗어내던 손이 굳는다. 벨리타가 잭슨을 돌아보았다. 이 손은 웬 거야. 미간을 찌푸리니 잭슨이 급히 손을 내렸다. 벨리타가 맞잡고 있던 손을 뺐다. 손안이 휑하다. 무심코 거듭 주먹을 쥐었다가 편다.

    긴장해 굳은 어깨를 벨리타의 손이 툭툭 토닥였다. 꽤 살가워서 잭슨이 헛숨을 들이켰다.

    “가야겠다. 할 일이 있거든.”

    콱, 잭슨이 반사적으로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연약한 손이 맥없이 사로잡혔다.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린다.

    “가지 마.”

    손을 빼내 보려 팔을 휘두르고 어깨까지 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잭슨은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벨리타만을 눈에 담았다.

    손을 붙든 미련한 손등에 힘주어 매질을 했다. 붉게 부어오를 뿐 미동이 없었다. 벨리타가 이를 빠득, 갈았다.

    “너, 또 이렇게 막……”

    “가지 마. 여기 있어.”

    “이거 안 놔?!”

    “나랑 있어.”

    가녀린 손을 볼에 댄다. 억지로 갖다 댄 볼은 전에 이 손으로 싸다구를 맞은 쪽이었다. 또 때려달라고 볼을 대나. 지가 뭔 흥부야 뭐야. 말랑하고 매끈하기는 한데. 벨리타의 손에 뺨을 가져다 대고, 그녀의 손을 겹쳐 잡은 잭슨이 눈썹을 늘어트린다.

    응석이다. 아쉬워서 부리는 투정이다. 벨리타가 잭슨의 뺨을 꼬집었다. 아악, 잭슨이 얼굴을 떨어트렸다. 말랑해서 찹쌀떡인 줄 알았다.

    한 걸음 물러난 잭슨에게 벨리타가 돌진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벨리타는 보자기가 아니었고 드디어 왼손에 잠들어 있던 사랑의 매가 울부짖었다.

    “악!”

    잭슨의 넓고 잘 짜인 등에 손바닥이 내리꽂힌다. 짜악! 타작 소리가 온실에 매섭게 울려 퍼졌다. 잭슨이 상체를 웅크린다.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때리기는 수월해졌다. 벨리타의 손이 다시금 높이 치켜 올라갔다가 공기를 가르며 목표를 향해 추락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이 새끼가! 말을 하면! 쳐들어야! 될 거 아냐!”

    한마디가 토해질 때마다 등짝을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매타작이 끊임없었다. 악, 악! 잭슨의 등에서도 입에서도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잭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찮다.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치욕스러워하며 바들바들, 등을 더듬는 잭슨에게 벨리타가 씨근덕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내가 어?! 몇 번이나 말해! 내가 진짜 속 터져서, 죽겠다. 죽겠어!”

    실컷 사랑의 매를 휘두르고도 화가 식지 않아 벨리타가 자신의 가슴을 팡팡 주먹으로 쳐댄다. 잭슨이 소중한 황태자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공허한 눈을 하고 꽃밭을 바라봤다. 등이 저릿저릿 아프다. 아까 데인 손보다 더 아팠다. 마음도 아프다. 굴러떨어진 존엄성이 꽃밭으로 굴러갔나.

    바닥에 처량하게 뭉그러진 잭슨을 두고 지나쳤다. 분노가 가득 담긴 발걸음 탓에 치맛자락이 살랑, 흔들려 스친다. 잭슨의 목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날 두고 가지 마.”

    “갈 거야.”

    낮은 음성이 옅게 떨린다.

    “널 기다릴 자신이 없어.”

    “기다리지 마.”

    잭슨이 축축한 숨을 뱉어냈다. 흙바닥이 손 갈퀴에 긁혀 부스러졌다. 멀어지는 거리를 견디지 못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묻은 흙들을 털어낼 새도 없다. 얼룩덜룩해진 옷자락을 당기며 엉거주춤 다가간다. 벨리타가 고개를 돌린다.

    “오지 마.”

    유려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울 것 같은 낯인데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잭슨이 흙투성이가 된 소매를 늘려 잡았다. 벨리타가 말한 대로, 벌어진 거리를 두고 섰다. 바라보는 눈빛이 애달프다.

    “넌 내가 왜 좋아? 그렇게 구는 이유가 뭔데?”

    “……왜냐고……?”

    “나한테 맞아도 내가 좋아?”

    입을 다문다. 꽃잎들이 무성한 가지가 검은 머리카락에 엉켰다.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벨리타는 여태 그래 왔듯 미련 없이 걸음을 독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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