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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7화 (37/150)
  • 37화.

    일어선 그녀를 쏘아보는 눈빛이 노기가 어렸다. 살얼음판 위에 위태로운 기류가 흐른다. 살얼음판을 걷든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스핀을 돌든 개의치 않았다. 벨리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쐐기를 박았다. 막 나가기로 한 것이다. 잭슨이 상처를 받더라도 그건 스스로 저지른 행동의 대가였다.

    “네가 이러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겠어? 누가 좋아해. 대체 누가!”

    쾅! 테이블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찻잔이 넘어지고 디저트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테이블 위로 뚝, 뚝 찻물이 흘러내린다. 잭슨이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꽂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분개를 참다못해 표출한 것이다. 뜨거운 찻물이 손에 닿아 벌겋게 물들어도 터지는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깜짝 놀란 벨리타가 멀뚱히 잭슨의 하는 양을 바라보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에라이, 씨부럴. 이게 어디서 지랄이야, 지랄이.”

    콱 그냥. 사랑의 매가 잠들어 있는 왼손이 허공으로 뻗어졌다. 잭슨만 화를 내나, 벨리타도 화낼 줄 안다. 그것도 찰지고 기똥차게 낼 수 있다.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가 허공을 맴도는 손을 내렸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랬다. 때린다고 말을 잘 들으면 그게 사람인가. 매를 들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잭슨이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붉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처량함.

    벨리타는 깨달았다. 죽고자 자극했더니 눈물샘을 자극했다는 걸. 여자 주인공은 입으로 똥을 싸도 남자 주인공이 반한다는 법칙을 다시금 상기했다.

    차라리 죽이라니까?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칼로 모가지를 슥 삭. 한 방에 깔끔히! 답답해 죽겠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봐주는데?”

    또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제발 그만 좀……. 이 소설 남자 캐릭터들은 툭하면 트라우마를 쏟아낸다. 보물찾기냐고. 딸내미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기에 주연 캐릭터들이 죄다 엄마 엉엉, 누나 엉엉, 이 지랄이냐 말이다.

    불행도 정도가 있다. 건들면 울고 쏘아붙이면 발작을 하는가. 딸은 허구한 날 침대에 굴러다니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나. 현실로 돌아가면 진짜로 등짝 백 대다. 넌 죽었다, 이 기지배야.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처울든지. 벨리타는 달래줄 생각이 없었다.

    “잘못해도 만회하고, 어? 잘하려고 노력했어야 될 거 아냐. 배려도 하고. 어? 역지사지 몰라? 어?”

    쏘아대는 책망 어린 말에 잭슨이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악물었다. 주먹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억울하고 서러워 미치겠는, 괴로움 섞인 목소리였다.

    “잘……하려고 했다."

    “퍽이나.”

    고개를 살포시 돌린다. 검은 머리카락에 파묻힌 얼굴이 파리하다. 꾸역꾸역 말을 잇는다.

    “네가 날 무서워하리란 말을 듣고 단둘이 있지 않도록 조치했다. 네가 말한 대로 천천히…… 부담스럽지 않게 주위에 들리는 소문으로 이야기를 텄고.”

    낱낱이 제 입으로 떠벌리게 된 상황이 수치스러운 듯했다. 잭슨의 어깨가 자잘하게 진동한다. 넓은 어깨가 순간 작아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벨리타가 잭슨을 동정하지 않으려 미간을 찌푸렸다. 잭슨이 물기 어린 눈으로 벨리타를 올려다본다.

    “내가 무얼 더 어찌해야 하나…….”

    불쌍해 보인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갈 곳 잃은 아이 같았다. 치고 박고 머리채라도 잡으며 싸울 줄 알았는데 애처로운 모양으로 가엾게 굴면 어쩌라는 말인가.

    벨리타가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골치 아프다. 측은하게 느껴지는 순간 화가 꺾이는 법이다. 그 자체로도 답답해서 화병으로 죽는 것도 새로운 시도일지 모른다.

    그보다 자신이 신관을 만나고 온 일이 소문났다는 게 이상하다. 벨리타가 고개를 기울인다.

    “내가 신관을 만났다는 소문은 어디서 들었어?”

    “……시종장에게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놀란 기색이다. 어리둥절한 잭슨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멍청하게 깜빡였다.

    “걔는 뭐 하는 새끼인데 그걸 알어?”

    “……네가 갔다 온 영지의 둘째다만.”

    앗. 벨리타도 멍청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아이참. 범인은 얄상한 감자 새끼였잖아. 엉뚱한 녀석 데리고 화내버렸다. 제대로 말 안 해준 잭슨도 잘못이 있다. 게다가 화 좀 냈다고 명령이나 해대고 죽이겠다고 협박한 죄도 크다. 벨리타가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 감자 녀석이 어떻게 알았지? 벨리타가 의자에 도로 앉았다.

    “그 놈팽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조용히 다녀왔는데.”

    “정말 조용히, 라고 생각하나?”

    헛소리를 다 한다는 듯 바라보는 잭슨이었다. 벨리타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브루노 영지의 마을에서 조슈아와 데이비드가 언성을 높여 싸우는 걸 몇 번 보긴 했는데. 그때가 밥 먹을 때였던 것도 같았다. 동네 사람들 다 쳐다봐서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벨리타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멋쩍어서 차라도 마실까 했지만 이미 다 엎어져 있는 테이블은 엉망진창이었다.

    디저트도, 차도 먹을 수 없는 상태. 벨리타는 자신이 오해했고 과하게 처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과를 해야 하지만 당한 것도 많으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게 애초에 잘했으면 좀 좋나. 벨리타가 잭슨을 힐끗 흘겨본다. 에이, 몰라. 벨리타가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내가 말이 심했어. 상처 줄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다.”

    잘못임을 알아도 사과는 원래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필요한 어려운 것이다. 벨리타는 사과와 감사 인사는 아끼면 똥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오해도 싫었고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마울 정도라는 것도 안다.

    사과를 들은 잭슨의 얼굴이 미묘하게 풀어진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였다. 잭슨의 인생에서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한 적 없었다. 말랑말랑해지는 기분. 부아가 치밀 정도로 화가 났는데 이젠 이상할 정도로 잠잠해졌다. 이런 감각이 낯설고 기이해서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 보았다. 찻물에 덴 부분이 저릿하다. 저릿해서 현실감이 들었다.

    “너도 말이야, 응?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 얘기하면 당연히 오해하지.”

    벨리타가 고개를 허공으로 돌렸다. 귓가가 붉었다. 잭슨은 멍하니 바보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화 좀 난다고 명령하고 죽이겠다, 하면 돼?”

    “…….”

    “돼, 안 돼.”

    “……안, 된다……?”

    허벅지를 찹! 내리친다. 그라췌! 벨리타가 잭슨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잭슨이 얼떨떨한 얼굴을 한다. 혼나 본 건 처음이었다. 삿대질을 해가며 다그치는 벨리타가 괘씸하지도 않았고 불쾌하지도 않다. 그냥 놀라웠다. 당황스럽고 몰아치는 말들에 휩쓸려갈 뿐이다. 벨리타가 큼, 헛기침을 했다. 내가 지금 다 큰애 데리고 뭘 하고 있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진작 도망갔지. 너도 어? 성깔 좀 죽여라. 노력한 건 알겠지만 그렇게 굴면 누가 좋아하냐.”

    아이고 씨벌. 내 주둥이가 잘못이지. 잘못이야. 스위치 누르는 것도 아니고 툭 치면 꺼지고 툭 치면 켜지냐. 잭슨이 또 시무룩해졌다. 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꽃들이 만연하니 산책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테이블도 이 모양이고 예쁜 거 보면서 걸으면 기분도 좀 나아질 테니. 벨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잭슨이 화들짝 놀라 벨리타를 잡으려 했다. 벨리타의 앞까지 뻗어 나간 손이 멎는다.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벨리타의 말이 기억난 탓이다. 한숨을 뱉어낸 벨리타가 머뭇대는 잭슨의 앞에 선다. 성질머리가 수그러든 모양이니 잘 타이르면 되겠거니, 싶었다.

    “좀 걷자.”

    훽, 할 말만 하고 등을 돌려 먼저 걸음 한다. 잭슨이 엉거주춤 일어나 벨리타의 뒤를 따랐다.

    양옆에 펼쳐진 붉은 장미들이 치맛자락이 스칠 때마다 작게 흔들린다. 밖은 녹지 못한 눈이 쌓여 있는데 온실 속은 푸르다. 물길을 대었는지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도 났다. 벨리타의 뒤를 따르던 잭슨이 포복을 늘려 벨리타의 옆에 선다. 툭, 어깨가 부딪힌다. 벨리타가 고개를 들었다. 잭슨이 귀 끝이 붉어진 채로 벨리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리타의 팔에 닿았던 잭슨의 손이 조심스럽게 팔목을 쥐었다. 움찔거리며 멈추었다가 천천히 팔목에서 손목으로 내려온다. 손목까지 그러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건드린다. 벨리타가 주먹을 쥐었다. 큼지막한 손가락이 주먹을 쥐어 구부러진 마디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손, 잡으면 안 되나?”

    “잡긴 뭘 잡아.”

    “잡고 싶어.”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싫다 했더니 잭슨이 꼬리를 잔뜩 말아 눈치를 본다. 어지간히 벨리타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벨리타의 매서운 말 탓에 이 짧은 새만 해도 트라우마를 여럿 들추어버렸다.

    본능적으로 기대고 싶은 욕망. 자신보다 단단해 보이는 사람에게 유약한 부분을 맡기고 싶어 하는 아이 같은 욕구. 모두에게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티 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

    어리광이다. 이런 응석에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벨리타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벨리타가 주먹을 쥔 손을 폈다. 잭슨이 벨리타의 눈치를 본다. 태연한 반응에 괜찮나? 괜찮은가? 슬금슬금 손가락이 내려와 벨리타의 손을 겹쳐 잡는다. 작고 따뜻하다. 손안에 잡히는 온기와 덩어리감이 평온하다. 크고 굵은 손이 소심하게 손가락 사이에 파고든다. 손가락이 겹쳐져 깍지를 꼈다.

    멈추었던 걸음이 느릿하게 이어진다. 맞잡은 손에 열이 조금은 오르는 듯했다. 장미가 활짝 피어 있어서 그렇다. 분위기가 뜨뜻미지근해서. 그래서 그렇다. 벨리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잘하잖아. 노력하니까.”

    잭슨의 얼굴이 붉어진다. 처음부터 이렇게 굴었다면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100번 잘못해도 한 번 잘해주었기 때문이니까. 안절부절못하다 드물게 찾아오는 다디단 행동에 빠져서 나쁜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거다. 벨리타는 나쁜 남자가 좋을 때는 훨씬 지났고 나쁜 남자에게 다친 상처가 깊었다. 좋아할 수 없다.

    연애 감정으로 좋아할 시기는 놓쳤다. 잭슨을 용서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없다. 진심이 되기에는 벨리타의 감정은 낡았고 잭슨은 어설펐다. 열정적으로 감정을 부딪쳐 싸우고 화해하며 맞추어 가지 못한다. 소설의 진행대로 결혼하게 되어도 목표를 위함이지 마음 한편을 내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잭슨이 벨리타의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길게 긁었다. 간지러웠다. 꽃이 흔들릴 때마다 짙은 꽃내음이 풍겼다.

    “그러면…… 날 봐주는 건가?”

    “보고 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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