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이게 서클이야. 사람마다 나타나는 무늬도, 위치도 달라. 간단하게 말하면 몸에 마력을 저장해 두는 거야.”
“어떻게 저장……하는데?”
“마력을 모으는 거지. 다룰 줄 알면 저장하는 건 쉬워.”
오웬에게만 쉬운 일이었다. 벨리타는 정말 쉬운 일인 줄 알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 쓉새끼 내가 죽여 버린다, 소리를 지르게 될 일도 머지않은 것을 모르는 채.
치맛자락을 꾹 쥔 벨리타가 말했다. 더 이상 있으면 말려 들어갈 것 같았고, 이성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들어도 괜찮았다.
“큼, 아무튼 내가 여기로 올게. 내가 오기 전에 청소 정도는 싹 해놔.”
“우와, 잔소리.”
“잔소리하게 만들지를 말든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웬이 옷을 여몄다. 아아, 그는 좋은 가슴이었습니다. 벨리타가 시선을 돌렸다. 자꾸 말캉 딴딴했던 가슴에서 시선이 떠나질 않아서 곤란했다.
벨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휘둘리기 전에 떠나야겠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황태자에 대한 생각이 까맣게 흩어진다. 그냥 확 이 녀석이랑 결혼해 버릴까 싶기도 했다.
등을 돌린 벨리타를 돌아봤다. 오웬이 낮은 목소리로 지껄인다.
“기분 나아졌어?”
“뭐?”
“됐어. 난 언제나 여기 있으니까 시간 날 때 와.”
낮은 테이블에 앉은 채 허리를 휘어 벨리타에게 손을 흔든다. 벨리타는 알았다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리곤 오웬의 연구실에서 뛰쳐나갔다. 가슴이 일렁거리고 어쩔 줄 모르겠다. 펄쩍펄쩍 뛰고 싶은 심정이다. 벨리타가 복도를 쿵쾅거리며 내려와 마차를 탔다. 붉은 얼굴을 가린 벨리타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엘라에게 집이나 빨리 가자고 채근했다.
황태자랑 만나려면 머릿속에서 오웬을 까맣게 지워야만 한다.
*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작 쿵짝. 벨리타가 황궁 입구에 서서 작게 흥얼거렸다. 문지기들은 벨리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간밤에 마음을 다잡고 잭슨과의 결혼을 위한 플랜을 짜두었는데 다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찾아오라던 녀석이 누군데 미리 말도 안 전해놓고 벨리타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다. 추워서 얼어 뒈지기 직전이었다.
물론 먼저 간다고 이야기 안 한 벨리타의 탓도 있었다. 출발 전, 데이비드가 잭슨이랑 그만 좀 엮이라고 성질이란 성질은 다 냈지만 벨리타는 으른이 하는 일에 애는 신경 끄라며 뛰쳐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다.
그냥 갈까. 어쨌든 찾아오기는 했고 만나주지 않은 것은 잭슨이니 벨리타의 탓은 없었다. 오웬을 만나러 가야겠다, 등을 돌리는 순간 문지기가 문을 막던 칼을 넣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셔도 좋다 명하셨습니다.”
진짜 씨벌 타이밍도 구리다. 오만상을 찌푸린 벨리타를 마중 나온 남자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태자궁을 싸돌아다닐 때 도와주었던 얄상한 감자였다. 남자가 먼저 아는 체를 해온다.
“잘 지내셨어요? 파텔 영애.”
“누구 때문에 잘 못 지냈네요.”
단번에 잭슨 탓이란 걸 알아들은 노타가 멋쩍게 웃었다. 벨리타가 흥, 콧방귀를 뀌자 노타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미주알고주알 되도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복도를 거니는 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미친 사람처럼 태자궁을 휘젓고 다녔던 벨리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전하가 싫으시더라도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평소에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시거든요.”
“뭘 참아요? 난 안 참아.”
“파텔 영애……. 넓은 마음으로, 네?”
“넓은 마음이고 자시고, 안 참아. 개짓거리하면 뺨 싸다구 날려버릴 테니까.”
노타가 우는 소리를 냈다. 벨리타가 죽을까 봐 무서워졌던 탓이다. 벨리타가 코웃음을 쳤다. 한 번 때려봤으면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꼬와서 죽이면 벨리타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고, 사이가 멀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뒤에 펼쳐진 정원까지 걸었다. 집구석 참 더럽게도 넓다, 싶던 찰나에 정원 끄트머리에 놓인 온실로 안내받는다.
유리로 둘러싸인 화려한 온실. 잭슨의 취향은 확실히 아니었는데, 몇 대인지 모를 전 황태자가 꾸려 놓은 곳인 듯했다. 온실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다 비치는 유리였고 온실 안에 사람도 꽤 있었다. 겨울이었음에도 실내는 따뜻했다. 잘 자란 화초들과 화려한 꽃들 사이에 놓인 고급진 테이블에 잭슨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자기 집에 있는 곳인데 와 본 적도 없나 보다. 단둘이 보면 솔직히 싫었을 텐데 공개된 곳, 많은 사람 틈에 있으니 견딜 만했다. 벨리타는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며 잭슨의 앞에 마주 앉았다. 벨리타의 뒤에서 노타가 손가락을 구부려 OK 사인을 보낸다. 노타가 어딜 단둘이 만나려고 하냐며 조언해줬기 때문이다. 잭슨이 노타를 보고 인상을 옅게 찌푸렸다.
잭슨이 벨리타를 보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둘의 앞에 차와 디저트가 놓인다.
“오는 데 고생이 많았다 들었다.”
추운 겨울에 한참을 성문 앞에서 기다렸던 벨리타는 냉큼 그랬다고 대꾸했다. 추위에 얼었던 손을 비비적 문지르며 벨리타가 말을 잇는다.
“오라고 했으면 문지기한테 미리 말 좀 해놓지 그랬어요. 얼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
“다음부터는 유의하도록 하지.”
“다음에 또 부르시게?”
맹랑한 벨리타의 대답에 하녀들은 턱이 빠질 뻔했다. 쩍 벌어진 턱을 애써 다물며 하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둘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잭슨과 벨리타는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는 게 좋겠나?”
“어우, 싫어요. 내가 오고 말지.”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하녀 한 명이 헙, 입을 틀어막았다. 황태자 전하께 불경한 태도라니. 저 사람도 조만간 목이 달아나겠구나, 동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벨리타가 찻잔에 손을 얹었다. 따끈하니 순식간에 손이 녹는다. 잠시 주고받던 목소리가 멎었다. 노타도, 하녀들도 테이블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잭슨이 불그스름한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관을 만났다고 들었다. 그날 때문인가?”
어디에도 소문을 낸 적 없는 방문이었다. 알아봤자 타운하우스에 있는 사람들과 베르 신관, 조슈아뿐이다.
베르를 만났다는 일을 알고 있는 잭슨에게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그걸 왜 알고 있는지.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벨리타의 뒷조사를 하거나 사람을 붙였는지까지 의심이 돋는다. 테일러와 라빌조차 모르는 일이다.
황태자라고 후작가의 여식 따위가 신관을 만났는지, 지나가는 강아지와 쎄쎄쎄를 했는지 다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벨리타는 드러내듯 인상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했다.
벨리타의 태도에 잭슨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다는 걸 알아챈 탓이었다. 벨리타를 배려해서 만나는 장소를 선택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비밀스러운 행적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 돋기까지 했다.
벨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찻물을 들이켰다. 하뜨뜨,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분 나쁘다. 자신의 근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잭슨이. 여전히 물건 취급을 하는 모양새의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첫 만남 때보다 나아진 줄 알았는데.”
잭슨을 바라보는 눈빛이 서늘하다. 녹음을 두른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잭슨도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아니었구나.”
얇은 음색의 목소리에 날이 가득 서 있었다. 멀찍이서 사람들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벨리타가 당장에라도 자리를 뜰 태도를 취했다. 잭슨이 짜증이 서린 말투로 대꾸한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가 여기서 더 뭘 해야 하지?”
거만하고 권위적인 낯짝과 위압적인 공기였다. 자신은 최대한 네게 맞춰주었다는 태도. 벨리타는 역겨움을 느꼈다.
“무얼 해도 싫은 내색을 하는 네게 더 어찌해야 하느냔 말이다. 까다로운 네 입맛에 더 어떻게 맞추느냐고.”
어이가 없었다. 퉁, 어이가 튀어 나가서 어디로 굴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벨리타가 이마를 짚는다. 대화를 더 해 보았자 다람쥐 쳇바퀴 도는 꼴일 테다. 벨리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잭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위협적이기까지 한 반응이다. 벨리타는 잭슨의 태도를 보고 화까지 났다. 이딴 새끼랑 결혼을 하긴 뭘 해. 테이블을 짚고 쏘아붙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데 그게 맞춰지겠어?”
“괘씸하군. 당장 앉아.”
“내가 왜?”
“명령이다.”
그럼 그렇지. 벨리타가 헛웃음을 뱉었다. 맞춰주겠다고 해놓고선 자기 심사가 뒤틀리니 명령이나 해댄다. 권위적인 면이 구역질 날 정도로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 내가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어차피 죽는 거 할 말도 못 하면 한 남아서 안 된다. 참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지겹도록 해보았다.
“너. 네가 사람 대해 본 적 없어서 헛짓거리하는 걸 내가 왜 받아줘야 하냐?”
벨리타의 뒤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가 퍼졌다. 황태자가 벨리타의 가문까지 멸문시키리라 짐작한 탓이다. 잭슨이 살기를 띤 채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벨리타는 상관없다. 할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 화를 참으면 병 된다.
“네가 나 좋다며? 내가 맞춰줘야 하냐고.”
“죽고 싶은가?”
“죽여. 죽여 봐. 좋다는 사람 죽이고 참 잘하는 짓이다. 그치?”
“입 닥쳐!”
사나운 기백이었다. 범의 포효 같기도 했다. 포식자의 압도적인 위엄. 하녀들과 노타는 새파랗게 질렸고 온실에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적막이었다.
벨리타는 그조차도 아니꼽고 열이 받았다. 죽어도 상관이 없으니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아무도 벨리타를 막을 수 없다. 미친 듯이 돌진하는 황소였다.
“이게 뭘 잘했다고 성질이야, 성질은! 대문짝만하게 현수막 걸어놓고 자랑이라도 하지? 어?”
졸지에 눈앞에서 살해 현장을 목도하게 될 사람들은 덜덜 떨며 입을 꾹 다물었다.
파텔 영애 제발 입 좀 다무세요, 목 날아가는 장면 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노타가 두 손을 꼭 모으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튕겨 나갔다. 어딘가 화초 사이에 뒹굴고 있을 터였다.
잭슨이 분노로 점철된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테이블이 잘게 진동한다.
“다 나가.”
분노와 수치, 일말의 이성이 담긴 무거운 목소리였다. 겁에 질린 하녀들과 노타는 머지않을 미래에 펼쳐질 참혹한 현장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벨리타가 소리 내어 비웃었다.
“나가긴 뭘 나가. 사람들 앞에서 욕먹으니 쪽팔린 건 아나 봐?”
“안 나가고 뭐 하고 있지?”
거듭 되풀이되는 위협적인 명령에 사람들은 줄행랑치듯 우르르 온실을 빠져나갔다. 현란한 발소리가 멎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벨리타가 잭슨을 돌아보았다. 비꼬는 것이 확실한 말투와 태도였다.
“참 나. 나 생각해주는 척하더니 화 좀 난다고 이러는 꼴 좀 봐라. 내가 언제 협박하라고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