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5화 (35/150)

35화.

어지러운 속내 어디에 털어놓지도 못하고 애달프게 그리워만 했다. 속으로 앓기만 했다. 그리워서 앓고, 두려워서 앓고, 힘겨워서 앓았다. 딸의 얼굴이 선명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잔망 떨며 안겨 오던 체온이. 어느새 자신을 넘어버린 높이의 딸이.

순간 주말의 낮, 거실에 앉아 딸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었던 기억이 스쳤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에서 보냈던 시간. 길게 자란 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과일을 입에 넣어줄 때마다 도톰하게 올랐던 사랑스러운 볼. 웃을 때마다 무릎으로 전해졌던 자잘한 떨림까지.

견딜 수 없이 그리웠다.

이리도 소중한 줄 알았으면. 귀한 건 줄 알았으면. 잔소리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해줬을 것을. 방구석에 뒹구는 딸을 못 미더워하지 말고 응원해줄 것을. 안아 주고 그 어린 등을 다독이며 엄마는 항상 네 편이다 말해 줬을 텐데.

후회는 항상 지나치고서야 찾아온다. 이미 돌이켜 손을 댈 수 없을 즈음에서야, 후회는 속절없이 밀려들어온다. 그제야 뼈저리게 깨닫는 것이다. 더 나은 선택을, 더 나아질 미래를.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서럽게도 울었다. 귀하디귀해서 누군가에게 고개 한 번 숙이지 않았을 여인이 무릎을 꿇고 매달린다. 오웬은 심각하게 난처했다. 의식이 외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줄은 몰랐다. 빙의, 라고 하던가.

벨리타의 사정도 알 것 같았다. 원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몸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딸을 부르짖는 것을 보니 아이의 엄마인 것도 같다. 오웬은 벨리타를 내려다보며 멋쩍게 뒷목을 긁적였다. 벨리타가 선수 치지만 않았더라면 몸 상태가 흥미롭다고 연구할 수 있게 해 달라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울고불고 매달릴 줄은 몰랐지만 도와줄 생각은 있었던 거다. 오웬은 무릎을 꿇고 벨리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고개를 바닥에 파묻고 오열하던 벨리타가 희망을 바라는 낯으로 고개를 든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고, 눈은 붓고. 오웬이 섬세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너무 간절해 보여서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못해.”

벨리타는 좌절감이 들었다. 돌아갈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눈물이 쏟아진다.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웬의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벨리타의 눈가를 문질렀다. 다정하게 낮은 목소리가 다독이듯 이어진다.

“하지만, 도와줄게. 건강을 찾는 일도, 돌아갈 방법도 말이야. 나 능력 좋거든. 믿어봐.”

어둠 속에서 쏟아지던 빛이 허상이어도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벨리타는 잡을 수 없는 헛된 희망을 놓고 작은 가능성을 쥐었다.

세 가지의 길이 놓였다. 거듭 되풀이하여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죽음, 정신 이상한 남자 주인공과의 결혼, 언제 성공할지 모르는 마법사의 도움.

벨리타는 세 가지의 길 모두를 지나 보기로 했다. 소설과 현실의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간다면 벨리타는 벌써 6개월이나 이곳에 갇혀 있었다. 가게에 장사 쉰다는 글도 안 붙여 놨다. 손님 다 떨어진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잭슨과 만나면서 죽어 보기도 하고, 마법사의 도움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혹여 돌아갈 수 없으면 어떡하지, 싶었지만 무엇이라도 해 보고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벨리타가 오웬의 로브를 힘없이 잡아당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수없이 뇌까렸다. 오웬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달래주는 법을 몰라 한참을 허공에서 배회하던 손이 가녀린 등을 토닥인다.

그의 손이 로브를 잡아당겼다가, 다독이는 그의 팔을 긁어내리기도 하며 거듭 손에 쥐었다. 우는 자신을 달래주었던 누군가가 있었던 게 오랜만이었다. 여태껏 딸이 자는 밤에 홀로 숨죽이고 눈물을 훔쳐왔다. 딸이 들을까 두려워 필사적으로 참아왔다. 울음소리를 들어주고 괜찮다고 다독여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서럽게도 좋았다.

한참을 울었다. 눈이 붓고 콧물이 질질 흐를 때까지 펑펑 울었다. 오웬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묵묵하게 등을 토닥였다. 괜찮다, 잘될 거라는 말만 간헐적으로 뱉어냈다. 그 말에도 충분한 위안이 되어서 벨리타는 울음을 그칠 즈음이 되어서야 오웬을 놓아주었다.

“다 울었어?”

“…….”

체면도 없이 바닥을 기며 울었더니 창피했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표정만은 장난기를 띤 오웬이 벨리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제대로 말 섞어 본 건 오늘이 처음인데, 곡소리를 내며 울어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민망해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콧물은 시원하게 흘렀다. 벨리타가 코를 훌쩍였다.

“너 눈썹 빨개졌다.”

눈썹 앞머리를 문지른다. 거리낌 없이 눈썹을 엄지로 꾹 눌러 빙글, 돌리던 오웬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벨리타의 코에 얹었다. 벨리타가 손수건을 잡고 팽, 코를 풀자 오웬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손수건에서도 달큰한 향기가 난다. 벨리타는 오웬이 정말 과일이 사람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힐끔,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자 시선에 화답하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웃음은 반칙이다. 레드카드. 내 마음속으로 퇴장. 당장 퇴장. 볼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손길이 간질거렸다.

“나 옷 다 젖었어. 어떡할 거야~ 이거밖에 없는데.”

손길도, 목소리도 다정하면서 말투만은 짓궂었다. 능청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미소 지은 오웬이 자신의 셔츠를 가리켰다. 벨리타의 눈 코 입의 위치가 얼마나 조화로운지 보여 줄 만큼 젖어 있었다.

너무도 선명해서 자신도 모르게 벨리타가 풉, 웃어 버린다. 수치스러운데 너무 웃겼다.

처연할 정도로 붉은 얼굴에 말갛게 웃음을 짓는 벨리타를 보자, 오웬은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병인가? 마력의 문제인가? 오웬이 제 가슴께를 문질러 보았다. 심장에 문제가 있나? 오웬이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벨리타의 드레스와 머리카락이 깔끔해졌다. 깜짝 놀란 벨리타가 눈이 동그랗게 뜨고 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왜 귀엽지? 오웬이 미간을 찌푸린다.

“어떻게 했어? 이거 마법이야?”

“갑자기 말이 짧아졌는데?”

“너도 반말하잖아. 못 볼 꼴 다 보여줬는데 못 할 게 뭐 있어?”

뻔뻔스러운 태도도 귀엽다. 왜 귀엽지? 왜 귀엽다고 느끼는 거지? 이거 귀엽다고 느끼는 거 맞나? 뇌에 문제가 생겼나?

오웬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벨리타가 소파에 풀썩 앉았다. 먼지가 날린다. 벨리타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소파를 팡팡, 쳐보았다. 먼지가 휘날렸다.

콜록, 기침이 터진다. 벨리타가 오웬을 쏘아보았다.

“너. 먼지가 이렇게 쌓일 정도로 청소도 안 하고 뭐 했어?”

“청소를 왜 해? 연구하느라 바빠.”

“먼지 좀 봐. 이게 사람 사는 곳이야?”

품에 안겨서 울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오웬이 크게 웃었다. 벨리타가 웃을 때가 아니라며 오웬을 째려보았지만 열심히도 웃었다. 오웬이 바닥에서 테이블로 엉덩이를 옮겼다. 무릎에 팔을 걸치고 손등으로 턱을 괸다. 벨리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은근했다.

“벨리타.”

“어?”

목소리가 죽여준다. 벨리타가 목구멍에 잔소리를 장전하다가 쏙 다시 넣어버렸다. 시선이 달달구리한 게 명치 쪽이 간질거린다. 능글맞은 게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하다. 울고 나니 정신이 없었는데 오웬 탓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얼굴도 목소리도 능력 좋은 것도 다 잘나서 잘난 게 죄라면 오웬은 무기징역이다. 벨리타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네가 올래, 내가 갈까?”

뭐가 가. 주둥이가? 벨리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해할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아닌가.

“뭐, 뭐가.”

“도와주는 거. 내가 보니까 서클을 늘리면 몸 상태는 좋아질 것 같단 말이지. 서클이 뭔지 알아?”

“몰라.”

그럴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오웬이 셔츠를 풀어헤쳤다. 워메. 워어메! 벌어진 셔츠 사이로 가슴팍이 드러난다. 야아, 좋다. 뒈지게 좋다. 탄탄하니 새가 날아와서 들이받아도 튕겨낼 정도다.

벨리타는 손이 근질거리는 걸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냈다. 천국이 따로 있나. 이곳이 천국이지. 만질 순 없어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극락이 따로 있을까. 가슴팍을 드러낸 오웬이 상체를 숙여 다가왔다.

뭘 믿고 남자가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다가오나. 물론 벨리타는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데, 가슴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웬이 셔츠 깃을 당겨 가슴을 더 내보였다. 벨리타는 급히 자신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세상에 감사합니다. 딸내미야 고맙다. 엄마 열심히 살고 있다.

벨리타가 정신이 있든 없든 오웬이 자신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점이라기엔 괴상한 무늬가 여럿 박혀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옮긴 벨리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늘게 뜨면 더 잘 보인다.

“점이야?”

“서클이야. 만져볼래?”

“응.”

좋은 기회는 걷어차는 게 아니다. 기회가 오면 잡는 거다. 벨리타가 입을 틀어막은 채 다른 손을 뻗어 오웬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참…… 죽여준다.

차마 주무르지는 못하고 더듬더듬, 살갗을 문지르자 오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벨리타의 손등에 손을 얹어 겹쳐 잡는다. 천천히 손을 당겨 서클이 수놓인 매끈한 피부에 얹었다.

“그렇게 만지면…… 부끄러워.”

오웬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난처한 듯 얼굴을 옅게 찌푸렸다. 그럼에도 입매는 올라가 제법 야시꾸리한 낯짝이 되어버렸다. 벨리타가 헛숨을 들이켰다. 가슴에 얹은 손은 빼내지 않았다.

“더 만지고 싶어?”

아니 씨부럴, 당연한 말을 해.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 고개를 숙이고 작게 떨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파묻힌 귀가 붉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능글능글한 낯짝이다. 재미있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더 가까워지면 실컷 만지게 해줄게.”

“……됐어…….”

“진짜로. 나 못 믿어?”

단정한 얼굴이 왜 이렇게 선정적인지. 표정을 찌푸리거나 능청맞게 웃을 때마다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벨리타가 슥, 손을 빼낸다. 오웬이 다시 벨리타의 손을 쥐었다. 파드득, 벨리타가 놀라 오웬의 얼굴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친다. 눈을 접어 웃는다.

“내 얼굴이랑 가슴 좋아하는 것 같은데. 보는 건 실컷 해. 어차피 보여줄 데도 없거든.”

다 들켜버렸다. 벨리타의 얼굴이 뜨겁게 타오른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고개를 훽! 돌린 벨리타를 보곤 웃음을 흘리던 오웬이 자신의 서클이 수놓인 문양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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