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4화 (34/150)

34화.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오만상을 찌푸리고 싫어하는 벨리타의 반응을 보고 제 말이 틀렸음을 알았다.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인 오웬이 벨리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벨리타가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달칵, 열려 있던 문을 닫는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호흡 중에 그의 품에서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순간 과일인가, 싶어 베어물 뻔했다. 맞다. 사심이다. 아주 그냥 물고 빨고……. 경찰이 있다면 벨리타는 진작 잡혀갔다.

“건강해지려면 내가 필요하다며? 과일은 뇌물이라고 생각하고 잘 받을게.”

그런데 이 새끼는 언제 봤다고 반말일까. 벨리타는 잠시 몸 주인의 나이를 망각했다. 울컥했지만 필요한 사람이니 벨리타가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책으로 뒤덮인 책상에 대충 과일 바구니를 올려둔 오웬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소파에 책이 쌓여 앉을 수가 없었다. 우당탕, 오웬이 책들을 바닥에 던져놓는다. 벨리타가 기함했다. 돼지우리야, 뭐야.

남의 일터이고 알아서 기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을 얹지는 않았지만 거슬렸다. 왼손에 잠들어 있는 사랑의 매가 울부짖었다. 책을 밀어버린 소파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곤 반대에 놓인 소파에 앉는다.

어이가 없다. 정말 잘생긴 애들은 마음까지 착하던데, 소설 속 잘생긴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 밥 말아 먹었다. 속으로 투덜거린 벨리타가 오웬과 마주 앉았다. 짜증은 나지만 마법사를 실제로 보는 건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비록 쓰레기장 같은 방에 반말 찍찍 듣는 처지였지만 들떴다.

“얼굴 뚫리겠어.”

다리를 꼬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눈썹이 가볍게 휘어 능청스러운 꼴이었다. 벨리타는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닌데, 홀릴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라하고 큰 소파에 파묻혀 있는 오웬의 어깨에 검은 로브가 흘러내렸다. 벨리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굴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서.

“남작이 다 이야기는 해줬어. ……후작 영애가 신관을 한다고 신전 들어가는 꼴도 웃기긴 하지.”

“도와줄 수 있어요?”

“못 도와줄 건 없지만 말이야.”

오웬의 노란빛의 눈동자가 벨리타를 훑었다. 며칠 전부터 조슈아가 들이닥쳐 몇 번이고 설득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법사라는 종족이 그랬다. 같은 인간을 굳이 나누는 것도 우습지만, 마법사는 철저히 흥미본위의 일만 해낸다. 조슈아의 협박을 들어준 건 유달리 오웬이 사회성이 좋은 편인 덕이었다.

사람에게 관심도 없어 마법만 파고, 또 파는 존재들. 사회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 탑까지 건설해 그 안에 틀어박혀 연구해온 마법사들이다. 오웬은 타 마법사들에 비해 살가운 편이었고 예민했다. 벨리타가 방문 앞에 섰을 때부터 주위 마력의 기류가 흩어지는 걸 느꼈다. 그 덕에 술식이 도중에 터졌고.

선명히 느껴지는 마력이 무언가와 충돌해 바스라지고 다시 재생되어 부딪히는 것까지 느껴졌다. 처음에 조슈아의 파티에서 부딪쳤을 때에도 알아챘다. 넘치는 호기심 덕에 붙들고 연구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조슈아와 각별한 사이 같아서 참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직접 그 장본인이 찾아와줬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느끼지 못할 테지만, 오웬은 마탑의 근본이라고 칭송되는 수도 마탑에서 제일 잘나가는 마탑주의 자식새끼였다. 마력은 넘쳐났고 그만큼 민감했다. 기류를 훑고 판별했다.

벨리타의 주변에서 마력이 튄다. 오웬은 스물넷의 나이에 이런 광경이 처음이었다. 분석하고 싶다. 문제를 찾아내 연구하고 해결해 보고 싶었다. 논문이라는 녀석……. 쓰고 싶어졌다. 분명 벨리타인 줄 모르고 거절하고자 했었지만 벨리타인 걸 알고 나니 흥미가 생겼다. 오웬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고혹적이었다.

“분석하게 해줘, 너를.”

벨리타는 하마터면 네, 하세요. 하고 옷을 벗어 던질 뻔했다. 그 일을 꼭 침대에서만 밤에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오웬의 단정한 얼굴이 미소를 지어내자 위험할 정도로 야해빠진 낯짝이 된 탓이다. 신관이 했던 대로 자신의 힘을 이용해 상태를 판단하려는 건 알겠지만. 이 녀석은 요물이었다.

벨리타는 화끈거리는 얼굴 탓에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 의자에서 일어나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묵직한 걸음에 늘어진 로브가 휘날렸다. 다리도 잘 빠졌다. 책이 가득히 쌓여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걸터앉은 오웬이 긴 다리를 꼬았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벨리타가 자신의 주변을 감싸는 빛을 목도하며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지팡이로 휘적휘적하지 않던가? 이 소설 속 마법사들은 그런 거 안 하나 보다. 상상한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마법도 멋있었다.

그래, 인정하자. 오웬이 잘생겨서 뭘 해도 멋있었다. 차갑고, 배려도 없는 빛이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신력과 다른 감각이다. 머리를 관통하고 스쳤다가 뱃속을 맴돌아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상하게 불쾌함은 없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벨리타는 멀뚱히 앉아 제 몸을 들쑤시고 다니는 푸른빛을 보았다. 한참을 휘저어 나가던 빛이 불꽃놀이처럼 터져나갔다. 오웬이 얼굴을 심각하게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던 오웬이 테이블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든다. 벨리타를 바라보는 눈에 흥미와 당혹감이 서렸다.

“너 정말 정체가 뭐야……?”

미묘한 적개심이 뒤섞인다. 벨리타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받아칠 말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오웬이 벌떡 테이블에서 일어나 엉망으로 쌓인 책들을 들추어댔다.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벨리타가 오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몸을 일으켰다.

순간 오웬이 주문을 영창해 벨리타를 강제적으로 소파에 앉혔다. 보이지 않는 힘이 벨리타를 눌렀다. 소파에 앉으니 더 이상의 악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벨리타는 본능적으로 달아나야겠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이 소설의 남자 캐릭터들은 멀쩡한 애들이 없었으니까. 경험으로 쌓은 데이터베이스였다.

오웬이 두꺼운 책을 덮었다. 방의 구석에서 책을 뒤졌던 오웬이 다가왔다. 평민이나 입을 법한 차림새가 로브 사이로 드러난다. 벨리타와 거리를 둔 채 멈춘 그가 혼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벨리타는 약간의 두려움 섞인 낯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신관이 이걸 눈치 못 챘다고?”

“…….”

“너 여기 사람 아니지?”

“무슨, 무슨 말이에요.”

식은땀이 났다.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벨리타의 처지를 파악하고 하는 말인지. 내가 남의 몸을 훔친 도둑년이라는 걸, 알고 하는 말일까. 벨리타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딱히 숨기려고 든 적은 없었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킨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긴장되고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쿵, 쿵 거세게 뛰었다. 들킬 거짓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 여겨왔지만,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온다. 손에 땀이 배어난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요.”

오웬의 입 끝이 매혹적으로 올라갔다. 벨리타는 뻔뻔한 체, 고개를 돌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모르길 바라며 가쁜 숨을 억눌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벨리타의 눈앞까지 다가온 오웬이 고개를 기울인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분석하는 시선.

“나보단 신관이 더 잘 알았을 텐데. 이상하네.”

“…….”

“신력과 마력이 충돌하는 건 맞아. 서클을 만들려던 흔적도 찾아냈고. 근데 말이야. 네 의식이 외부와 이어져 있어.”

“네, 네?”

“나도 이게 뭔가 해서 한참을 분석했는데, 의식 맞아. 영혼이라고도 하고. 어디까지 이어져 있나 따라가 봤는데……. 튕겼어. 자존심 상하게.”

벨리타는 오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져 있다고? 외부와? 외부라면, 현실이 아닌가.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야 하는 현실.

힘을 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속이 일렁거렸다. 정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저어댄다. 자살 시도 안 해도 되고, 황태자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오웬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덮쳐 질척하게 적셨다. 눈물이 쏟아진다. 간절하고, 꿈에서조차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심장이 내려앉고 몸이 떨렸다. 갑작스레 찾아온 희망이 정신도 차리지 못하게 한다.

“그럼, 나, 돌아갈 수 있어요?”

“……어?”

“이어져 있다며, 그러면, 그럼, 나…….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돌려보내줄 수도 있어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감정적인 태도는 오웬을 당황하게 했다. 오웬은 자신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 여인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달래주는 것도 체질이 아닌 데다 위로도 할 줄 모른다.

슬쩍 잡은 손을 빼내려다 이어지는 벨리타의 말에 굳어버렸다. 이 여자가,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나 돌아가야 해요. 내 딸, 우리 진아 만나야 해. 거기에 다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게, 내 삶이……, 내 전부가 거기 있어요.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난 여기 없어요, 내가 아니야.”

“…….”

“제발, 나 돌려보내줘요. 나요, 내 딸 진아 결혼하는 것도 봐야 하고요. 딸이 쓴 책도 다 못 읽어 봤어요. 엄마가 돼선, 내 새끼 만든 책도 못 읽어 봤다고요. 고생만 시켰는데, 내 딸 나 때문에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우리 딸이 최고라고, 믿고 있다고 말도 못 했는데…….”

물러난 오웬 덕에 벨리타가 고꾸라졌다. 바닥에 엎드려 오웬의 손만 힘주어 잡고 흐느꼈다. 값비싼 드레스가 먼지에 엉망이 되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뒹굴었다. 마루가 눈물에 젖는다. 벨리타는 개처럼 무릎으로 기어 오웬의 로브 자락을 쥐었다. 형편없이 구겨졌다.

“사랑한다고 말도 못 해줬어요……. 마지막인데,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내 새끼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어요, 내가. 끝까지 엄마 노릇 못 해줬어. 나쁜 년, 천하의 빌어먹을 년이야, 내가.”

“저기, 있잖아.”

“제발요, 나 가야 해요. 제발, 제발요. 마법사라면서요. 내가 몸 뺏은 도둑년인 것도 알잖아. 나도 몸 돌려주고 싶어, 그러고 싶다고…….”

어둠 속에서 빛이 들면 그 빛만 맹목적으로 좇게 된다. 어둠 속에 묻힌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빛만 유일한 것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무섭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을 희망을 발견하면 죽자 살자 달려들게 되니까. 주위를 볼 수 없게 되니까.

벨리타는 매달렸다. 곡소리를 내면서까지 울음을 쏟아냈다. 그간 다시 일어설 수 없을까 두려워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거짓들 속에 거짓인 척, 제 것이 아닌데도 제 것인 척. 평생을 거짓으로 살아야 할까 두려워 매일 밤 잠들지 못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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