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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3화 (33/150)
  • 33화.

    아직 자신이 드러내고 해줄 수 있는 일은 마법사 나부랭이를 찾는 일 따위 정도다. 그러하면 이 제국에서 가장 명실상부한 마법사를 데려와야겠다. 그런 마법사를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나의 신이 취하는 모든 것은 최고의 최고여야 하니까. 조슈아는 자신의 말끔한 손등을 바라보았다.

    불가항력이다. 그녀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려 평생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조슈아는 욕망이 그득하게 들어찬 눈을 가늘게 접어 살갑게 미소 지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모르겠네요.”

    맨바닥에 앉으면 허리 아프다는 말을 덧붙인 벨리타가 손을 뻗어 조슈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유약한 힘이어서 조슈아는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조슈아가 일어나고 나서도 손을 놓지 않아 의아함에 벨리타를 내려다보니, 조슈아의 손등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이리 다정한 신은 조슈아는 본 적이 없었다. 벨리타가 그의 흔적 하나 남지 않은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잘됐다고, 이제 한여름에도 장갑 낄 필요 없겠다며 배시시 웃었다. 너무나도 성스러운 미소에 조슈아는 그만 녹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종교를 만들어야겠다. 벨리타교. 교주는 자신이다.

    “누님, 이야기 다 끝내셨습니까?”

    긴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를 들어 마중 나온 데이비드였다. 잡고 있는 손을 보고 인상을 찌푸려 빠른 보폭으로 달려왔다. 훽, 벨리타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겨 조슈아와의 사이를 떨어트렸다. 조슈아가 드러내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건 말건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지었다.

    “지지입니다. 가서 손 씻으십시오.”

    “뭐?”

    벨리타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곧잘 했던 말이다. 어렸을 적의 딸이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고 당최 무슨 짓을 하고 온 건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로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올 때마다 했던 잔소리였다. 한겨울에는 콧물도 질질 흘려 칠푼이가 따로 없었더랬다.

    귀여웠지. 질끈 묶어준 머리도 헤벌레하게 헤집어놓고는. 볼도 추위에 새빨개져서.

    아. 아아. 내 딸. 언제야 볼 수 있는 걸까.

    징그럽기만 한 황태자와 결혼을 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까. 대체 언제가 되어서야 얼굴을 보고 안아볼 수 있을까. 정말 몇 번이고 자살을 해야만 딸을 볼 수 있을까.

    벨리타는 생각했다. 나쁜 엄마라고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닐까. 착하고 소중한 우리 진아 고생 너무 시켰다고 벌 받는 거다. 언제 끝날지 모를 끔찍한 형벌. 이 벌이 끝나면, 악착같이 견디고 참아내서 끝을 낸다면 내 아이를. 내 소중한 딸, 진아를. 만날 수 있다.

    얼굴에 닿는 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데이비드가 알 수 없는 얼굴로 벨리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리타의 붉어진 눈가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손을 얹었다. 이 사람은 당최 우는 법이 없다. 그렇게나 자신을 울렸으면서 정작 본인은 안 운다.

    신관과 이야기가 잘 안 되었는지,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련히 벨리타가 말해주리라 생각했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옆에 붙어 걸었다. 조슈아도, 엘라도 못 미덥다. 소름 끼치는 녀석들이다.

    벨리타가 아는 것도 모르는 채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저 변태 새끼들에게서 떼어놔야겠다고 다짐했다. 뒤에 따라오는 둘 다 정상 아니다.

    *

    이틀을 걸쳐 수도로 돌아왔다. 조슈아가 마차를 멈추어 쉬어가는 틈틈이 바쁘게 움직인 듯 보였지만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긴 여행이라고 하면 긴 여행일 터다. 다들 마차에서 구겨졌던 탓에 비척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뻗었다. 데이비드가 따라와 주었던 호위들에게 보너스를 준 것 같긴 했지만 궁금하지도 않다.

    조슈아는 급히 볼일이 있다며 곧장 사라졌는데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다들 피곤해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까. 벨리타도 그러했다. 그냥 쉬고 싶었다. 생각은 복잡한데 사람이 복작거려서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막상 침대에 누웠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해 놓아버린 것이다. 머리도 쓰고 싶지 않고 몸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벨리타의 눈치를 보고 있던 하녀장이 슬그머니 문을 두드려 방문을 열었다. 피곤해 보여서 그냥 쉬게 두고 싶었는데 이 편지는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라는 말과 함께 편지를 내밀었다.

    황궁에서 온 편지다.

    아마 잭슨이 보낸 편지겠지. 신변이 위험한 자신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벨리타를 불러들이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겠지만, 벨리타는 황궁은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았다. 안 좋은 기억이니까. 하지만 가야 했다. 죽음으로 현실에 돌아가길 바란다면 오래 걸릴 터였다.

    벨리타가 대충 북북 편지 봉투를 찢었다.

    [사과하고 싶다.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 태자궁에 방문해라.]

    딱 저 문장뿐이었다. 구구절절 긴 편지만 받아보았던 벨리타는 의아함에 편지지 뒷면도 확인해 보았다.

    [오지 않으면 데리러 간다.]

    살벌도 했다. 그간의 기억으로 분명 곱게 데리러 오지 않을 터였다. 만나야만 하는 관계라면 잡혀 들어가는 것보다 스스로 가는 것이 보기도 좋고 마음도 편하다. 벨리타는 종이와 펜을 건네받아 침대에서 대충 답장을 끄적거렸다.

    [ㅇㅇ 곧 감.]

    *

    이제 인연도 끝이라고 생각했던 조슈아가 찾아왔다. 약속도 지켰고 그리 오래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으니 다시 볼 일 없겠다 생각했었던 탓에 놀랐다. 데이비드가 오만상을 쓰며 조슈아를 쫓아내려 했지만 거머리처럼 쫓아내지지도 않았다. 데이비드가 징글징글한 새끼라며 역겨워했다.

    “마법사를 찾았어요, 영애. 하지만 아무리 구슬려도 넘어오지 않네요.”

    “무슨 마법사, 말입니까? 갑자기요?”

    벨리타와 음흉한 변태 새끼로 추정되는 조슈아를 둘만 둘 수 없었던 데이비드가 끼어들었다. 데이비드는 갑자기 무슨 일이냐 돌아보았지만 벨리타도 모르는 눈치였다. 조슈아가 데이비드는 공기 취급하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조슈아의 멱살을 잡을까 고민하는 찰나.

    “너 다 들었어?”

    평온한 태도로 일관하던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슈아도 데이비드도 쫄아 버려서 입을 꾹 다물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벨리타는 누가 들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곤란하진 않다. 어차피 말해야 하나 했던 문제였고 가족들에게는 전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까.

    가족도 아닌 조슈아가 나서서 마법사를 알아왔을 줄은 몰랐다.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데……. 그냥 좀 소름 끼쳤다. 쟤는 뭔데 다 알고 있지? 화가 나 보이는 벨리타 탓에 혼나는 아이처럼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던 조슈아가 다 들었다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혼자 답답해 죽으려고 하는 데이비드를 무시하고 벨리타가 찻물을 들이켠 후 말했다. 데이비드는 그만 좀 무시하라고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지만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원래 장본인이 찾아가서 부탁 좀 드린다고 하는 거지. 선물도 준비하고 해야겠네. 엘라야, 가서 과일 세트 좀 사 와라.”

    엘라가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벨리타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주소 적어놔. 오늘 시간 괜찮대?”

    “오늘 시간 많아요, 저.”

    “너 말고. 마법사.”

    쭈글. 데이비드와 함께 소파에 쭈그러진 조슈아를 뒤로하고 벨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내에 찾아가서 설득해와야겠다. 잭슨은 그 후에 만나도 늦지 않다. 만나고 싶지 않아서 미루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아니다.

    주소를 받고, 이름도 듣고, 나갈 준비를 끝마치니 엘라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조슈아와 데이비드가 함께 가겠다고 땡깡을 부렸지만 뒈지게 처맞고 싶으면 따라오라는 말에 벨리타를 놓아주었다. 수도 안에 있는 곳이라 멀지는 않다. 근데 마탑이 뭘까.

    벨리타는 자잘한 건 신경 쓰지 않는 멋진 사람이었다. 마법사를 볼 생각에 두근두근했다. 귀족이야 현대에도 비슷한 게 있었고, 황태자도 신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는! 마법사는 마법도 부리는 신기한 존재 아닌가!

    입학통지서를 부엉이로 배달해주고 꼬꼬마들이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던 마법 학교 영화를 영화관에서 제때 보았다. 그때의 신기함이 다시금 떠오른다. 벨리타는 높은 건물을 훑어봤다. 마탑이라더니 탑이 아니었다. 솔직히 벨리타는 조금 실망했다. 들어가려니 기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벨리타의 앞을 막았다.

    “마법사 오웬 씨 만나러 왔어요.”

    “아, 그 며칠 전부터 매일 찾아오던 노란 머리 남자 대신입니까?”

    조슈아인 듯했다.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문을 열어주었다. 조슈아의 말대로라면 맨 위층, 오른쪽 두 번째 방이었다. 사람들이 꽤 많이 있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의 이들이 전부 마법사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들떴다.

    4층의 오른쪽 두 번째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어서 또 두드렸다. 답답해서 문을 벌컥 열었다. 눈앞에 연기가 자욱하다. 이게 뭘까. 허공에 손을 내저어 부채질하니 연기가 좀 수그러들었다.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보라색의 머리를 한 남자가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조슈아가 알려주었던 오웬이라는 마법사인 듯했다. 다른 건 기억 못 해도 잘생긴 남자는 야무지게 기억한다. 조슈아의 파티에서, 음식점에서 마주쳤던 사람이다. 세 번째 만남은 필연이라던데.

    손끝에서 불꽃이 타닥, 터져나간다. 벨리타가 멀거니 서 있자 오웬이 성큼성큼 걸어와 앞에 섰다. 잘생겼다. 역시 황태자보다 취향이었다. 목소리도 기깔났다.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지만 힘 좀 쓰신 모양이다. 분명 이 녀석 어머니도 낳고 보니 잘생겨서 탤런트 시켜야겠다고 했을 테다.

    “맞지? 파티에서 만났던.”

    긴 문장으로 들으니 더 목소리가 좋았다. 술이 없어도 이 목소리라면 거나하게 취할 것 같았다. 잠깐 스쳤는데도 기억해 줬다는 게 참……. 김칫국으로 샤워를 하게 만드는구나.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확 자빠트려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벨리타가 멀뚱히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마법사가 짝, 손뼉을 쳤다. 소리에 파드득 놀라 허둥지둥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원래라면 엘라도 따라와야 했지만 마차에 버려두고 왔다. 두고 오기를 정말, 정말로 잘했다. 어리둥절하게 과일 바구니를 받은 오웬이 바구니와 벨리타를 번갈아 보았다가 아아, 낮게 탄식했다.

    “로틀 남작이 찾아와서 협박해대던 장본인이구나? 어쩐지 테라스로 들어가더니. 그런 사이였나 봐?”

    “협박? 아니, 뭐? 그런 거 아닌데요?!”

    “말은 예쁘게 잘하는데 뜯어보면 협박이란 말이지……. 괜찮아, 부정 안 해도 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비밀로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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