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2화 (32/150)

32화.

신기할 노릇이다. 벨리타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봤다. 멋지고, 대단하다. 이 소설 속 종교인들은 말만 번드르르하지는 않는구나. 조슈아의 손등을 손으로 감싼 채 몇 번 더 중얼거린 베르는 손등에 놓인 쇠붙이를 치워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다.

그 흉이, 징그럽던 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적과 같은 상황에 조슈아는 멍하니 자신의 손등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벨리타는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잘된 일이다.

조슈아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웅얼거렸다.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상체를 웅크린 채 계속해서 감사를 토해냈다. 그의 등을 토닥이던 벨리타에게 베르가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파텔 님께서는 보일 곳이 없으신가요?”

“아, 음. 있기는 한데.”

치료하는 과정을 본 터라 이왕 온 김에 다친 곳을 치료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못 미더워서 부탁하지 않으려 했는데, 실력이 확실하니 부탁해도 좋을 터였다. 다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울고 있는 조슈아를 밖으로 내쫓았다.

울면서 쫓겨난 조슈아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등을 볼에 문질렀다.

단둘만 남았다. 왜인지 거북하다. 벨리타가 주저 없이 붕대를 풀어 팔과 다리를 드러냈다. 신관의 표정이 온화하다. 이 정도의 상처는 바로 치료할 수 있다고 한 베르는 벨리타에게 손을 뻗었다. 조슈아에게 읊었던 기괴한 언어들을 뱉어내며 베르가 입 속에서 다시금 빛을 뱉어냈다.

빛이 벨리타에게 닿고 상처를 훑어 내리기 시작할 때, 베르가 입을 다물었다. 파삭, 빛이 허공으로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벨리타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파텔 님. 신력이 있으시네요?”

“……네?”

“적지만 느껴져요. 신력이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게 왜 이 몸에 있다고 하는 걸까. 벨리타는 안 그래도 물어보려 했었다. 왜 죽기 직전마다 몸이 회복되는지. 어떻게 안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지 말이다. 해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종교인에게 물어본다면, 그간 했던 개고생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벨리타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두근두근! 황태자 꼬시기 대작전! 을 실패한 마당에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고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거, 내 몸이 마음대로 나아지는 것도 그 탓인가요?”

“무슨 뜻이실까요?”

“죽기 직전까지 다치면, 알아서 치료돼요. 그러고 나서 며칠을 앓아누워요. 그거, 신력인가 그거 탓이죠?”

해결하면 이 자잘한 상처 따윈 상관없다. 어차피 죽기로 한 거 몸 주인을 위해 주변을 더 챙길 필요도 없어졌고 일기를 쓸 이유도, 역겨운 황태자를 볼 일도 없다. 고스란히 몸을 돌려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고작해야 소설 속이고 캐릭터 하나 죽어도 큰일은 아니었다.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면 자기만 생각한다고 욕할 수도 있다. 벨리타는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을 기다릴 딸이 있고, 가족들이 있었으며 살아가야 할 현실이 있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소중한 것들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아갈 이유였다.

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벨리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초조해진 벨리타가 발을 바닥에 두어 번 구른 뒤, 간절하게 채근했다. 입을 굳게 다물었던 그가 다시금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간혹, 자가 치유 성향을 가진 신력이 있기는 해요. 제가, 한 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빨리 해주세요.”

냉큼 몸을 앞으로 당겼다. 거뭇한 색을 가진 손이 벨리타의 손을 맞잡았다. 알 수 없는 괴상한 언어가 다시금 쏟아져 빛이 되어 퍼진다. 허공을 맴돌았다가 베르의 몸 선을 타고 내려와 벨리타에게 쏟아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다.

동시에 불쾌하다. 신체 곳곳을 빛이 파고들어 검사를 하는 느낌. 판별당하는 기분. 벨리타는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발끝부터 타고 올라온 빛이 벨리타의 이마를 훑고 공중을 헤매다 베르에게 비처럼 내려왔다. 구역질이 날 만큼 세심한 조사였다.

들리지 않는 말을 뱉어내듯 입을 바삐 움직이던 베르가 눈을 떴다. 잡은 벨리타의 손을 부드러이 내려놓고 생각을 정리한다.

“충돌하고 있으세요. 신력과, 다른 힘이……. 아마…… 마력이지 않을까 싶네요. 파텔 님의 몸 상태로 보아선 오러는 아니실 것 같거든요. 악마를 추종하지도 않으실 테고요.”

“예?”

“신력과 마력의 수준이 비슷하세요. 그래서 충돌하고, 몸이 타격을 입으시는 거죠. ……음, 몸이 성장하셔서 감당이 되시지만…….”

으음, 낮게 소리를 삼켜 해야 할 말을 추렸다. 지켜보고 있는 벨리타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자가 치유의 신력을 사용하셨다면 마력이 반발해 크게 앓으셨을 거예요. 쉽게 말해 몸 안에서, 두 힘이 싸우시는 거죠. 마력이 없었더라면 자잘한 상처쯤도 쉽게 치료하셨을 텐데.”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죠?”

“무슨 의미신지 모르겠지만, 아프지 않으시려면 한쪽의 힘을 키우시는 게 좋으세요. 신력이 커지셔서 마력을 눌러버리시면, 어느 힘을 사용하셔도 균형이 잡히시거든요. 신력을 자주 사용하셨던 것 같으신데, 신관이 되시면 신력을 수월하게 성장시킬 수 있으실 거예요.”

예컨대 그런 말이었다. 마력과 신력이 충돌해서 어릴 때부터 죽어라 아파 왔고, 나이 먹고 몸이 크니 감당이 되어서 아프지 않아졌다.

그런데 왜 벨리타는 몰랐지? 테일러와 라빌은? 벨리타가 몸에 빙의되어 나은 것이 아니라 자연히 낫게 되는 현상이었던 거다. 타이밍 참 죽였다.

마력이든 신력이든 한쪽을 월등히 키우면 다른 힘이 기가 눌려 충돌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덧붙여 신관이 되라는 말에 벨리타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싫어요.”

종교는 싫다. 현실과 비교하자면 수녀 되라는 소리 아닌가. 절대 싫다.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죠?”

“그런 질문은 처음 듣네요. 타고난 힘이시기에 소멸시킬 수 없으세요. 품으셔야 하세요.”

진짜……. 염병 첨병……. 지랄쌈바를 해도 죽지 못한다는 확답을 받은 벨리타는 좌절했고, 주옥같은 잭슨을 또 만나야만 한다는 현실에 진저리쳤다. 어차피 죽지도 못한다면 아프기는 싫으니 차라리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를 찾아야겠다.

벨리타는 다시 꼬여버린 계획에 속으로 쌍욕이란 쌍욕은 다 내뱉었다. 뭔 소설이 이따위야. 딸 너 이 계집애 두고 보자.

먼 길 또 언제 오나 싶었던 벨리타는 여기까지 온 김에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은 죄 물어보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뽕을 뽑기 위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신력과 마력이 충돌한다고 했는데 그 힘이 커서 그렇냐.

아니다. 힘은 크지 않지만 두 힘은 상성이 좋지 않아 충돌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몰랐던 것 같은데 어떻게 몰랐던 것 같냐.

마법사나 신관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다만 신력이나 마력에 능통한 자들이나 알아챌 수 있다.

몰아치는 질문들에도 난감해하지 않고 곧잘 대답해주었다. 신관도 의원도 들락거렸던 과거였음에도, 왜 가족들이 벨리타의 상태를 몰랐는지 얼추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신관이 허접이었던 거다. 의원은 마력도, 신력도 없었을 테니 몰랐던 건 당연한 거고.

돈도 많으면서 왜 허접한 신관만 데려다 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벨리타였다. 베르가 신력만 25년을 다루며 살아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란 것을 몰랐다. 대신관이 되라며 수도로 오라는 요청도 사람을 돕고 권력을 갖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거절한 능력자였다.

흐름을 감지할 수준의 능숙함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사항이라는 것을 벨리타가 알 리 없었다. 그저 말투가 굉장히 간호사 같다는 생각을 할 뿐. 잡다한 정보들은 다 알아내었으니 제일 중요한 질문이다. 죽지 못한다고 확신에 가까운 대답을 들었지만 혹시 모른다. 목이 단번에 잘리면 붙일 수 없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다른 때에는 몸이 낫질 않는데, 죽기 직전에만 몸이 회복돼요.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는 일에도 치유가 될까요?”

“힘이 크지 않으셔서 모으고 모아두었다가 죽으시기 직전에만 치료되는 거세요. 힘이 스스로를 비축해두는 거죠. 죽음에 대비해서요. 안타까운 일이 많으셨나 보네요……. 시릴리우스 신의 평화가 함께하길 바라요.”

“시부럴이고 샤랄랄라고 난 모르겠고. 그럼 힘이 모이지 않을 정도로 써대면 결국 남지 않게 되는 거네요?”

“방황하는 어린 양을 용서하세요, 신이시여.”

신의 이름을 막 불러댄 무례를 용서해달라며 베르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꼴값이다, 라고 생각하며 벨리타가 대답을 독촉했다. 몇 번이나 네? 네? 물어본 탓에 베르는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였다. 죽을 수 없는 게 아니다. 죽다 보면 죽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었다. 정보를 정리해 본 벨리타는 우선 힘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어 보았자 치료되고 신력이 마력과 싸우는 탓에 기절한다. 기절하는 동안 신력은 또 힘을 비축해서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앓아눕는 부분이 제일 큰 문제다.

마법사를 찾자. 마력을 늘리자. 신관이고 나발이고 종교는 싫었다. 뽑아먹을 만큼 다 뽑아먹은 벨리타가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베르도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다고 같이 고개를 숙였다. 도와줘서 고마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벨리타가 문을 열었다.

벌컥 열리는 문 탓에 바닥에 뒹군 조슈아가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요염한 자세로 처량하게 올려다보는 꼴이 미묘했다.

“……영애.”

조슈아는 다 들었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나무 문 때문에 다 듣고야 말았다. 벨리타가 이제껏 아팠던 이유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죽을 위험을 여럿 겪었다는 것까지. 대체 어느 곳에서 죽을 위기를 겪었기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뱉어내는 것이 그리 초연할까.

화가 났다. 자신의 신, 벨리타를 어느 누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궁금했다. 범인을 찾아내어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산 채로 찢어버리고 불에 태워버리고 싶다. 자신이 눈을 뗀 사이에 일이 일어난 건지 만나기 전에 사건을 겪은 건지 모르지만.

찾으면 죽일 것이다.

나의 신, 나의 빛이자 구원자. 힘든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너진다면 그 끝을 자신이 가져야 하고 죽는다면 제 품에서여야 했다.

벨리타가 다 낫지 않아 앓아눕는다면 그 육신은 제가 갖고 싶었다. 매일을 침대 곁에서 그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아파하는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사랑하기에 독점하고 싶고 간절한 만큼이나 애절하다. 조슈아는 벨리타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만의 벨리타가 아님을 알았고 기분이 좋을 때 붉어지는 꽃망울 같은 뺨과 너그러운 웃음, 함께 추었던 춤을 몹시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