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1화 (31/150)

31화.

데이비드 못지않게 조슈아의 속도 뒤죽박죽,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질 정도였지만 그는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벨리타가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조슈아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벨리타는 나이트가운을 입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남에게 자신이 다쳤고, 얼마나 피골이 상접해서 돌아왔는지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내심 얼마나 벨리타가 걱정되었으면 곧장 달려왔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이 돌아온 건 어떻게 알았는지. 벨리타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은근히 소름 돋아서 기분 나빴다.

“영애,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사라졌다는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어요.”

“괜찮아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진 거였어요.”

“원체 몸이 좋지 않으시니 걱정이 많이 되네요. 신관에겐 갈 수 있을지…….”

“가야죠. 내 몸 상태도 보고 싶으니까요. 시간 언제 되죠? 가능하면 빨리 다녀오고 싶은데.”

빨리 조슈아를 치료해주고, 이 몸이 왜 자꾸 자기 스스로 치료해놓곤 픽픽 쓰러지는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신관인가 뭔가에게 보이면 해결책이 나올 것도 같았다. 조슈아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대꾸했다.

“오늘 당장도 가능해요. 영애. 신관에게 미리 연락해도 좋지만 그냥 찾아가도 괜찮을 거예요. 그들은 거의 항상 신전에 있거든요.”

“누님, 그래도 미리 언질은 주고 찾아가야 좋습니다. 제가 지금 편지를 보낼 테니, 며칠 쉬었다가 가십시오. 먼 길 아닙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저와 한 약속이니 경께서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네요.”

“제 누님 일인데 매정하게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와 또 기 싸움 한다. 너덜너덜하게 지친 벨리타는 둘의 싸움을 구경할 기력도 없었다.

이제 와 누나라고 친한 척하냐, 너네 사이 안 좋은 거 다 안다.

너는 뭔데 울 누나한테 친한 척하냐 변태 새끼냐.

서로 열심히 돌려 까든 말든 벨리타는 대충 휘적휘적 손을 내저었다. 귀찮다.

“그럼 하루 쉬었다가 갈 테니까 데이비드가 알아서 편지 보내줘. 브루노 영지 베르 신관이래. 소이트 남작께서 내일 오는 대로 출발할게요.”

“영애, 저 로틀 남작이에요.”

“언제 바뀌었대.”

“영지 하사받고, 며칠 뒤에요. 서류 확인이 조금 늦어져서요. 어제 조슈아라고 말했…….”

“와, 그렇군요. 나 피곤해 죽겠으니까 먼저 올라갈게요. 둘이 알아서 잘 놀고.”

엘라가 벨리타의 뒤에 후다닥 붙어 팔을 잡아주었다. 그 덕에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덜덜 떨지 않아도 됐다. 엘라에게 부축받으며 계단을 오르고 계단의 끝자락에 다다라서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를 말없이 지켜보던 데이비드와 조슈아는 벨리타가 사라지자마자 그대로 서로 갈 길 갔다. 욕지기 올라오는 서로의 얼굴도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남정네 둘이 기 싸움을 하든, 지지고 볶든 벨리타는 엘라의 부축을 받아 방 침대에 누웠다. 잭슨과 엎치락뒤치락 뒈지게 싸웠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이제야 욱신거리며 아려왔다. 긴장이 탁, 풀려버린 거다. 붙잡혔던 손목도, 짓눌렸던 어깨도, 언 흙에 갈린 팔과 다리도 아팠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되는데, 지금은 소가 되어도 환영이다. 나이트가운을 벗겨내고 이불을 덮어주던 엘라가 더 나올 눈물이 남아 있었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벨리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준다. 조심스럽고 섬세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씨 이렇게 만든 거예요?”

서럽게도 울었다. 벨리타가 돌아왔을 때 엘라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붉게 멍이 든 손목과 어깨에 길게 남은 멍울, 긁힌 흉터. 귀한 아가씨의 맨발. 가련하게도 떨리는 몸. 초췌해진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는 태도에 가슴이 무너졌다.

티 한 번 내는 법이 없다. 전에도 저택에서 밤새 울었을 것이 뻔한 부은 눈으로도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생사가 오갈 정도로 아파 보았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저냥 넘어갈 강한 마음을 갖게 되나요.

아가씨, 저는요. 아가씨께서 그럴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요. 이따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머리가 멍해지는데, 보기에도 훤히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평소처럼 넘어가려 하면 심장이 두 쪽 날 것 같아요.

차갑고 주변 돌아보지도 않던 고압적인 아가씨도 좋았지만 살갑고 말갛게 웃으면서도 강인한 아가씨가 더 좋아졌어요. 고아함과 멋짐은 다정함에서도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아가씨 덕에 알았는데. 받은 다정함을 갚을 수도 없게 홀로 벽을 치시면 저는 어떡해요.

엘라는 황태자가 미웠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혹사당한 가녀린 몸에 가슴이 미어져서 목이 메어 왔다. 손도 댈 수 없어 이불보만 구겨져라 힘껏 쥐고 훌쩍거렸다. 벨리타가 손을 뻗어 엘라의 뺨을 툭툭, 가볍게 쓰다듬었다.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울어. 울기는. 그냥 넘어진 거야. 그래서 황태자가 치료해준 거고.”

“못 믿겠, 어요.”

“믿기 싫으면 말아라?”

분위기를 풀고자 친 장난에 엘라는 빼액, 울음을 크게 터뜨렸다. 벨리타는 난처함에 두 손을 뻗어 엘라의 뺨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냈다. 원 기지배가 눈물이 이렇게 많아서야.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아 다정한 손길로 엘라를 달랬다. 닦아도 닦아도 쏟아지는 눈물이 폭포 같다.

자신이 누구인 줄은 알고 이렇게 마음을 쓸까 싶기도 하다. 몸 뺏은 도둑년인데. 그 도둑년 뭐가 좋다고 눈물까지 흘려주는지 모르겠다. 벨리타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엘라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가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엘라는 더 펑펑 울었다.

못해 먹겠네, 시부럴. 가뜩이나 힘든데 달래주기도 지친 벨리타는 가서 물 좀 가져오라고 시켰다. 엘라가 눈물 콧물 줄줄 흐르는 얼굴을 소매로 대충 투박하게 문지르곤 후다닥 방 밖으로 나갔다가 바로 의원과 함께 뻘쭘하게 돌아왔다.

우는 얼굴을 남에게 보여 창피한지 얼굴이 새빨갛다. 민망해 죽겠지. 벨리타가 웃음을 참으며 엘라를 내보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의원이 의료가방을 열고 다가왔다.

의원은 벨리타의 멍과 쓸린 상처들을 받은 돈만큼 열심히 치료했다. 끼니 거르지 말고, 잠 푹 자고, 운동도 좀 하라는 말과 함께 의원은 돌아갔다. 그런 말은 지나가던 지렁이도 하겠다. 벨리타는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내내 누워서 기력을 회복했다.

그동안 데이비드는 황태자가 제 누님에게 무슨 헛짓거리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시켰고 조슈아는 벨리타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며칠간의 일처리를 당겨 처리했다. 엘라는 우는 얼굴을 들켜 창피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날이 밝자마자 조슈아가 쳐들어오고, 짐도 다 못 챙긴 바람에 기다릴 겸 같이 아침 식사도 했다. 출발하려니 데이비드가 어떻게든 쫓아오려 해서 결국 마차에 짐짝처럼 실었다. 이틀은 걸리는 거리인지라 지지고 볶고, 벨리타는 마차를 타는 내내 자고 나서야.

어찌저찌 브루노 영지에 도착했다. 멀기도 하다. 듣자 하니 말에게 무슨 마법이 걸려 있어 빨리 간다고 했는데 이틀이나 걸릴 정도면 어마무시하게 먼 거리인 듯했다. 무슨 마법인지 듣기는 들었던 것 같지만 벨리타는 기억하지 않았다.

그냥 마법 신기하다, 해 보고 싶다, 라는 생각만 했을 뿐. 알아봤자 쓸데도 없는데 외울 필요가 없었다. 신전에 도착해 잔뜩 구겨져 있던 장정의 남자 둘이 내리고 마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벨리타는 그냥 내리려다 문 앞에 불쑥 내밀어진 두 손을 보았다.

잡으라는 뜻인가 본데. 끝 쪽에 두 남자를 따라 손을 내밀고 있는 엘라의 손을 잡고 내렸다. 뒤에서 둘이 뭘 해도 신경 쓰지 않은 벨리타가 하얗고 높은 신전을 보았다. 예배당 같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보던 그리스인가 뭔가의 돌무더기 쌓아놓은 신전 같기도 했다.

밝은 햇빛 아래로 하얀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벨리타가 고개를 숙였다. 신관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고개를 마주 숙였다. 벨리타를 바라보며 입구를 손으로 뻗어 안내한다.

“벨리타 파텔 님이시죠?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들어오세요.”

“……베르 신관님인가요?”

“네. 자세한 용무는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어요.”

종교는 별로다. 벨리타는 철저한 무교였고 종교 자체를 싫어했다. 잔뜩 경계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조슈아가 바짝 붙어 졸졸 따라왔다. 엘라가 해도 징그러운데 조슈아가 하니까 더 징그럽다. 벨리타가 조슈아의 팔을 잡아끌어 제 옆에 옮겨 놨다.

조슈아의 장갑을 낀 손이 꾹 허공을 쥐었다가 펴진다. 옆에 조슈아를 끼고 뒤에 엘라와 데이비드를 거느린 벨리타가 긴 복도를 지났다. 예배를 드리는 곳을 지나치고, 고해성사라도 하는 곳으로 보이는 자잘한 문들도 지나쳤다. 어디까지 가나 싶었지만 베르는 얼마 안 가 문을 열어 일행을 들였다.

“데이비드, 엘라는 나가 있어. 밖에서 기다려.”

문을 붙잡고 벨리타가 말했다. 얄밉게 승자의 미소를 지은 조슈아를 향해 데이비드가 삿대질을 했지만 벨리타는 무시했다. 둘을 내쫓고 작은 방에 놓인 의자에 마주 앉았다. 셋은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흉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상태를 보아야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 대단한 신력이 아닌지라.”

“남작, 뭐해요. 빨리 보여드리지 않고.”

머뭇거리는 조슈아의 등짝을 가볍게 내리쳤다. 시간도 없는데 굼떴기 때문이다. 파드득, 놀란 조슈아가 급히 장갑을 벗어 흉측한 손등을 내보였다. 베르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조슈아의 손목을 잡아 손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게 신을 찾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내보인 손을 꾹 쥔 조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인에게 치부를 드러내 수치스러워하는 모양새였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요.”

자신의 일도 아닌데 자기가 다친 것처럼 아파했다. 착한 건지 가식을 떠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벨리타는 가만히 앉아 베르가 하는 꼴을 지켜봤다.

두꺼운 성전과 성수, 화려한 무늬의 쇠붙이를 들고 온 베르는 조슈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벨리타는 그 옆에서 신기한 광경을 구경했다. 조슈아의 손에 성수를 약간 붓고 쇠붙이를 얹은 뒤, 성전을 뒤적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말을 따라 이내 빛이 퍼지기 시작한다. 베르의 입 속에서 퍼져 나오던 하얗고 노란 햇살과도 같은 빛이 조슈아의 손등으로 뻗어 나가 감쌌다. 일렁거리며 손등을 지나고 허공에서 맴돌았다가 다시 손등을 스치고 베르의 입술에 닿아 터지듯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