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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0화 (30/150)

30화.

조금 걱정도 들었더랬다. 잭슨은 맥없이 이불을 얼굴에 파묻고 벨리타를 찾아 돌려보내라고 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도 뭐할 정도로 암담한 분위기였기에 시키는 대로 벨리타를 찾았더니.

잭슨이 잘못했다. 개새끼다. 라고 노타는 생각했다. 갓 태어난 사슴새끼 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 연약하고 작은 여인이 안쓰러웠다. 노타는 벨리타에게 팔을 내밀었다. 잡고 부축할 수 있도록. 경계하지 말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었다.

기둥에 기대고 있던 벨리타는 노타를 보고,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노타를 보았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토끼 같은 모양새다. 안타깝기도 하지. 남자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벨리타가 자신을 의심하며 킬각을 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노타는 말을 이었다.

“염려 말고, 갈아입을 옷과 마차를 준비해드릴게요. 제 팔 잡으세요.”

“……아니, 마차만 줘요.”

“옷도 갈아입지 않으시고요? 신발이라도 신으셔야.”

“집에 갈 거야.”

모르겠다. 그 집이 수도에 있는 타운하우스인지, 현실의 집인지. 그냥 다 지쳤다. 다 놓고 싶다.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당장에라도 뜨고 싶다. 벨리타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노타를 피해 섰다. 뭐하는 녀석인지도 모르고 딱히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옷도 받고 신발도 받고 밥에 간식까지 제대로 챙겨서 돌아갔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피곤하고 지친다. 미간을 짚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노타가 성큼 다가와 앞장섰다. 에스코트를 거절했으니 벨리타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상냥하고 무해하게 굴기만 했다.

“따라오세요. 마차는 이미 준비해두었어요.”

앙상한 맨발을 바라보던 노타가 벨리타의 보폭에 맞추어 앞서 걸었다. 벨리타는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노타를 따라가 태자궁 입구 앞까지 나와 있는 작은 마차에 올라탔다. 노타가 마차의 문을 닫아주기 이전, 벨리타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전해 달라 하셨어요. 또 만나게 된다면, 말씀하신 대로 노력해 보겠다고요.”

“……그럼 이 말도 전해주겠어요?”

“말씀하세요.”

“지랄로 풍차 돌리는 소리 하지 말라고요.”

“……예?”

“잘 있어요.”

벨리타가 마차의 문을 먼저 선수 쳐 닫아버렸다. 쾅, 닫히는 문을 앞에 두고 노타는 멍하니 마차가 떠나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랄로, 뭘 돌려? 노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잭슨이 왜 그리 벨리타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알 것도 같았다. 웃긴 사람이었다.

작아도 황실의 마차라고 승차감은 끝내줬다. 벨리타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땋아 묶고 옷매무새도 정돈했다. 이런 옷은 젊을 때나 좀 입어 봤었다. 민소매의 하얀 원피스. 맨발이긴 했지만, 젊었을 때 하고 다니던 차림새라 조금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뚜껑 열리게 열 받았다. 남자 주인공이 미친놈인 건 짐작을 했지만 이 정도로 경우 없는 녀석인 줄은 몰랐다. 딸이 대체 어떤 연애관을 가지고 있기에 저딴 개짓거리 하는 새끼를 남자 주인공이라고 세워놨는지 모를 일이었다.

벨리타가, 지금의 자신이 아닌 본래의 벨리타였다면 대체 얼마나 휘둘렸을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봤던 벨리타였으니 이게 얼마나 잘못된 방식인지 알고 달아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 벨리타는? 소설 속 진행대로 납치 감금이라도 당해서 세뇌당했을 터였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딸이 진심으로 이 전개가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권력자가 휘두르는 대로 속절없이 휘둘려 노리개 취급이나 받는 그런 거지발싸개 같은 연애를 좋아하는 건가.

속이 울렁거린다. 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멀미 탓인지 배 속이 역겹게 일렁인다.

*

저택에 도착하니 점심 식사를 할 시간대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엘라가 곧장 뛰쳐나왔고 이어서 데이비드도 뛰어나왔다. 맨발이 돌바닥에 짓눌려 아프다. 홀린 듯 달려온 엘라가 벨리타를 와락 끌어안았다.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갔다가 오셨어요. 꼴이 이게 뭐예요.”

질척대는 엘라가 귀찮은데 쳐낼 힘도 없었다. 그냥 무기력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데이비드가 빠르게 다가와 손을 뻗는다. 그조차도 가만히 견뎌내었다. 벨리타의 몸이 들렸다. 가벼운 그 몸을 안아 올린 데이비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몸 상태가 육안으로 보아도 좋지 못했다. 손목과 어깨에는 손자국으로 멍도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냥 좀. 아. 배고프다.”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하죠.”

당장에라도 까무룩, 쓰러질 것 같은 벨리타였다.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배고프다고 하는 걸 안 된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말하라고 독촉할 정도로 몰상식하지도 않았다.

데이비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감각을 느꼈다. 엄습하는 불길한 기분이 거북했다.

식당까지 벨리타를 안은 채 들어와 의자에 앉혔고, 시종들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신발을 가져오고, 의원을 불러오라고 했으며 부담스럽지 않은 식사를 준비하라고. 펜과 종이 또한 준비하라고 일렀다.

벨리타가 무슨 짓이라도 당했으면 당장에 편지를 적어 테일러에게 고할 생각이었다. 데이비드는 속이 어지러웠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누가 제 누님에게 허튼짓을 했단 말인가. 파텔 후작가를 위협하는 세력의 귀족일지, 상인들의 견제일지.

짐작이 되는 곳이 너무 많아 도리어 복잡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벨리타에게 호위를 더 붙여야 하나, 세계 제일의 검사들로 다섯 정도는 붙여야 할까. 감히, 어떤 개자식이 파텔의 사람을. 제 누님을.

식당의 벽면을 두고 데이비드가 초조하게 빙빙 돌았다. 빠르게 지시한 것들이 준비됐다. 벨리타는 폭신하고 말랑한 실내화를 신었고 식탁에 펜과 편지지가 놓였다. 벨리타는 죽은 듯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힐끔, 벨리타를 돌아보았다. 데이비드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황태자와 얽힌 건 아닌가 걱정했다가 알아서 돌아오겠지 했다. 밤이 다 되어서 파티가 파할 때까지도 벨리타는 돌아오지 않았다. 벨리타를 본 사람도 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다. 황궁 내의 기사들을 붙들고, 사용인들을 붙들고 몇 번이고 묻고 찾았다. 조슈아도, 로엘린과 타린도 거들어 주었지만 찾지 못했다. 엘라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라고 현실도피까지 했던 터라 타운하우스에도 돌아가 보았다.

없어서. 어디로 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정보원들을 시켜 조용히 알아보고 소수의 기사를 움직여 일대를 뒤졌다. 해가 뜰 때까지 지새웠다. 테일러에게 보낼 편지까지 적었었다. 후작가의 기사단을 이용해야 할 생각까지 들었던 그 찰나에 벨리타가 돌아왔다.

이 몰골로. 데이비드의 배, 가슴 안쪽이 뜨겁게 끓었다. 그만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벨리타는 지친 기색으로 가만히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그 탓에 데이비드의 가슴께 안쪽이 캠프파이어라도 하는 것처럼 격하게 달았다.

벨리타의 앞에 식사가 놓이고, 앙상한 팔로 식사를 해냈다. 덜덜 떠는 몸 탓에 수프도 제대로 먹지 못해 엘라가 울면서 나이트가운을 둘러주었다. 배 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안색이 나아졌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누님. 몸은 어떠십니까.”

“……나름 괜찮아.”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당하진 않았습니까?”

“……음. 그냥 뭐. 황태자랑 있다가 왔어.”

데이비드의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폭발했다. 너무 화가 나고 열이 받아 침착해진다. 마른세수를 했다. 황태자와 엮인 거라면 일이 복잡해지고 커진다. 혹시나가 정말 역시나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법도 없다.

“황태자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내가 기절했는데, 치료해줬어. 끝이야.”

“거짓말.”

“아닌데.”

환장할 노릇이었다. 기절한 것만으로도 아찔한데 황태자가 치료까지 해줬다. 벨리타의 행색이 치료만 하고 돌아온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말을 안 해준다. 평소에는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해대더니 이런 중요한 일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미치겠다.

답답하다고 아픈 사람을 붙들고 씨름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비드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곤 말했다.

“누님. 파텔 후작 영애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겁니다. 사태가 심각하단 말입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면, 납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벨리타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안한 태도로 대꾸했다.

“뭔 일 있기를 바라는 것 같네. 뭐 없었다니까.”

“……누님이 그렇게 말하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누님 진짜 사람 환장하게 하는 데 도가 텄습니다.”

넘어갈 정도로 데이비드는 바보가 아니다. 황태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치를 믿었다. 따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그때, 타운하우스의 하녀장이 조심스레 들어와 말했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로틀 남작님이십니다.”

데이비드가 조용히 쌍욕을 읊조렸다. 어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조슈아는 미친놈이었다. 그것도 벨리타에게 정신 놓은 놈. 벨리타가 사라졌을 때 자신의 아랫사람을 시켜 수도 전체를 뒤진 열성적인 미친놈이었다. 수도뿐 아니라 다른 영지까지 뒤졌을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 알았냐면, 저놈의 사람과 제 사람이 찾는 구역이 계속 겹쳤다. 조슈아의 사람과 자꾸 마주친다고 보고가 빗발쳤다. 느그 누나냐고. 내 누나라고. 벨리타가 돌아왔다는 것은 또 언제 알았는지 바로 찾아온 거다.

데이비드는 연신 쌍욕을 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을 비운 벨리타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손사래를 쳤다.

“방에 계십시오. 의원이 곧 도착할 겁니다.”

“남작 왔다며. 내 손님 아니야?”

“지금 상태로 누굴 맞겠단 말씀입니까. 우선 쉬십시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도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밥도 다 먹었으니 가는 길 같이 가자고 한 벨리타 덕에 함께 나왔다.

그대로 벨리타를 방으로 올려 보내려고 하다가 조슈아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곳은 타운하우스였고, 계단과 거실이 함께 있는 탓에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들여다보이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짜증이 가득 섞인 손길로 자신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하녀장에게 저 새끼 응접실에 안 놔두고 뭐 했냐, 라는 눈길을 쏘아준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었다.

“언질도 없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로틀 남작님.”

“큰일이 있으셨는데 찾아뵈어야죠.”

마주치자마자 기 싸움 한번 거하게 해주고 조슈아는 곧게 걸어 나가 벨리타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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