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9화 (29/150)

29화.

“뭐요?”

만담은 아니지만 개소리 잔치였다. 벨리타는 속도 타고 머리도 어지러워 트레이에 놓인 물을 한번에 들이켰다. 시원하다. 크으, 낮게 탄성을 뱉어낸 벨리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 같은 포식자의 시선으로 벨리타를 곧게 보았다.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로 여유롭게 턱까지 괸 잭슨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내줄 때까지 넌 못 가.”

벨리타는 어이가 없었다. 지랄도 참 신명 나게 한다. 황태자의 마음에 들긴 들었는가 본데, 결과가 납치 감금이다. 벨리타는 딸의 연애관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런 걸 좋다고 남자 주인공한테 시킨다는 걸까. 현실로 돌아가면 진지하게 상담해야겠다.

물론 벨리타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가는 전개가 썩 반가웠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에게 흥미를 가졌고, 이대로 입술 비비고 침대에 드러누우면 끝이라는 생각에 해방감마저 들었다. 마음은 전혀 가지 않지만 순리대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의 결실을 맺으면.

그렇게만 한다면. 그러면 다 끝인데 왜 가슴속이 허할까. 벨리타는 무심코 자신의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가슴께에 머무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보아하니 황태자는 벨리타가 재미있어서 가둬둔 듯했다.

재미가 없으면 버린다는 뜻도 된다. 그럴 때는 튕겨줘야 제 맛이다. 통통 튀는 매력은 벨리타의 특기 아니겠는가. 벨리타가 고개를 팽, 돌렸다. 앙칼지고 새침한 척,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가져가요! 보내줄 때까지 안 먹을 거니까.”

“그럼 그렇게 해.”

뭐? 벨리타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잭슨을 바라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밥을 굶기는 건 아니지. 사람이 밥심으로 사는데 어떻게 밥을 안 줘? 이 새끼, 이거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 아니야?

비식거리는 웃음을 참을 노력도 하지 않고 처웃는다. 벨리타의 반응이 제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벨리타는 뒷목을 잡았다. 정말로 뒷목을 잡았다. 어이가 가출을 해서 바다를 건넜다. 찾을 수도 없다. 여기서 나가야겠어, 벨리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앞에 앉아있는 잭슨을 피해 옆에 섰다. 서자마자 어깨가 붙들려 침대에 곤두박질쳤다. 이불이 허공에 휘날렸다 가라앉는다. 푹신한 침대였지만 잭슨의 악력도 대단해서 어깨와 등허리가 얼얼하게 아팠다. 침대에 눕혀진 벨리타의 어깨에 잭슨의 팔이 무겁게 짓누른다.

옴짝달싹하지도 못할 힘으로 여린 벨리타를 눌러 제압한 잭슨이 침대에 다리를 올렸다. 얼굴이 더욱 가까워진다. 벨리타의 바로 위로 잭슨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어둠에 잠긴 얼굴 속에서 보랏빛의 눈동자만 선득하게 빛났다.

소름 끼친다. 이딴 새끼도 남자 주인공이라고. 벨리타가 잭슨을 힘주어 밀어냈다. 미동도 않는다.

“뭐해, 이 미친 새끼야! 안 꺼져?!”

“말씨가 더럽군.”

“그럼 시벌, 이 상황에 말이 곱게 처나가겠냐?”

악을 쓰며 밀어내도 잭슨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력하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싶기까지 했다. 순간 어렴풋이 앞으로의 상황이 그려졌다. 두려웠고 공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역겨웠다. 겁을 잔뜩 먹은 벨리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못 나간다고 했지 않나. 그냥 포기해.”

“…….”

“내 것이 되면 천하를 쥐여 주마. 돈이든, 권력이든 원하는 건 모두 줄 수 있다.”

그딴 건 필요 없었다. 벨리타가 원하는 건 이내 부스러질 돈, 권력 따위가 아니다. 천하도 필요 없었다. 집, 가족, 친구들, 일터……. 온전한 자신. 벨리타는 이를 악물었다. 잭슨의 어깨와 가슴께를 마구잡이로 밀어내던 손을 뻗어 잭슨의 뺨을 내려쳤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새끼에게 마음이 갈 리가 없다. 허상과도 같은 쓸모없는 것들을 쥐여 주는 것도 싫었다. 잭슨의 뺨이 속절없이 돌아갔다. 벨리타의 손이 닿은 부근이 붉게 멍울이 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악을 쓰고 미친 사람처럼.

“꺼져! 이거 놔, 이 새끼야! 필요 없어!”

“그냥 여기 있어. 질릴 때까지, 내가 놓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

“안 놔?! 진짜 안 놔?!”

검은 머리카락을 손에 한 움큼 쥐었다. 쥐고, 시원하게 뜯는다. 머리가 얼마나 뽑히든, 손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남든 손이 가는 대로 뽑아댔다. 악, 소리를 내며 벨리타의 우악스러운 손에 딸려가는 잭슨의 머리가 이내 뒤로 물러났다. 벨리타의 손이 닿지 않는다.

사납게 허공을 휘젓는 벨리타의 손을 잭슨이 잡아 침대에 내리눌렀다. 손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벨리타는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잭슨이 당혹스러운 낯짝으로 벨리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다 이를 빠득, 갈았다.

“가만히, 가만히 좀 있어!”

포효 같았다. 무겁고 오싹한 범의 울음소리와도 비슷했다. 기세에 눌린 벨리타가 몸을 굳히고 잭슨을 올려다봤다. 공포에 새파랗게 질린 낯이었다. 그를 눈에 담던 잭슨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흐느끼듯 뱉어냈다. 고개가 바닥으로 하염없이 무너진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

“모든 걸 다 손에 쥐게 해준대도, 내가 싫은가?”

“당연한 소리를 왜 지껄여?”

“어째서?”

겁에 질렸지만 악다구니가 남아있다. 벨리타는 죽을 생각으로 지껄였다. 잭슨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얼굴로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툭, 건들면 눈물이라도 쏟아낼 분위기였다. 지금 좀 말로 잘 꼬드기면 놓아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겹다. 힘으로 어찌할 수 없어 말로 곱게 설득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엿 같았다.

“내가 원했냐? 난 이런 거 바란 적 없어. 네 멋대로 내 거 해라, 염병하는데 내가 좋다고 네~ 하겠냐?”

아이고, 말이 세게 나갔다. 너무 열 받아서 그만. 벨리타가 입을 잠시 다물고 잭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울 것 같은데 조금 더 해도 괜찮을 듯했다. 틀어쥔 손목에서 힘이 빠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훽, 손을 빼냈다. 벌겋게 멍이 들어 있다. 이 시발.

“호감이 있으면 천천히,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하는 거야. 이 쓰발럼아. 뭔 미친놈이 앞뒤가 없어. 그냥 들이받네.”

손에 남은 검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냈다. 이번에도 말이 심하게 나갔다. 열 받는데 어떡해, 그럼. 벨리타가 또 잭슨의 눈치를 봤다. 눈가가 촉촉하다. 말로 뒤지게 패버렸다. 그럼에도 화가 안 풀려서 힘을 주어 어깨를 밀쳤다. 힘없이 넘어가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는다.

드디어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벨리타가 잭슨의 손이 닿지 않는 곳, 방문 앞까지 걸어가 섰다. 잭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벨리타를 바라봤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멍한 얼굴이었다. 벨리타는 잭슨을 진짜 미친 쌍또라이라고 생각했다.

“뭐요. 뭘 쳐다봐.”

“난 네가 마음에 든다.”

“……?”

“네가 탐이 나. 손에 넣고 싶다.”

와, 진짜 미친놈이다. 벨리타가 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으로 뱉기에는 잭슨이 너무도 처연했다. 붉게 번진 눈가가 보랏빛의 눈과 잘 어울렸다. 맞아서 붉게 멍이 든 뺨과, 헝클어진 머리, 흐트러진 옷이 퇴폐미가 넘쳤다. 그냥 이러고 꼬시면 냉큼 넘어갔을 텐데.

벨리타가 슬금, 문고리를 잡았다. 언제든 달아날 수 있는 방도였다.

“네가 재미있어서, 같이 있으면 즐거울 것 같았다. 가지고 싶었어.”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잭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청승맞게 벨리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부담스러운가? 그리 발버둥 칠 정도로 내가 싫어?”

“응.”

응이라고 했는데 무시한다. 벨리타는 짜증이 났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잭슨이 언제 달려들어 제압할지 몰랐다. 예상과는 다르게 잭슨은 이불보를 손에 가득 그러쥐었다. 멀리서 봐도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할까. 벨리타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별안간 눈치챘다. 자신이 또 등장인물의 트라우마를 아주 기막히게 찾아내 짓밟았다는 것을. 조슈아에게, 데이비드에게 그러했듯 또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이 정도면 트라우마 탐지기가 아닐까.

물론 평소 같았다면 어르고 달래서 풀어줬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코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숨을 죽였다. 죽은 듯이 가만히 서서 잭슨을 노려봤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괜히 책잡혀서 발목 잡히지 않게. 긴장한 벨리타가 무색하게 잭슨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무기력해 보였다.

“……가라. 잡지 않으마.”

응! 잘 있어라, 미친놈아! 벨리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잡은 문고리를 당겼다. 남자 주인공과 러브러브 해피엔딩은 완벽하게 조졌으니 그냥 칼질 잘하는 사람에게 돈 주고 죽여 달라고 해야겠다. 잭슨이 침대 위에서 이불보를 쥐어뜯든 물어뜯든 알 바가 아니다.

호기롭게 뛰쳐나온 벨리타는 길을 잃었다. 태자궁은 욕 나오게 넓었다. 여기를 가면 다른 곳이고 왔던 곳을 또 돌고, 저기로 가면 이미 갔던 곳이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벨리타는 헐렁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미친 사람처럼 태자궁을 싸돌아다녔다.

사용인들이 흘깃흘깃 바라봤지만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각박한 세상…… 씨부럴……. 벨리타는 열심히도 태자궁을 누볐다. 밥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앓아누웠던 탓에 금세 지쳤다. 헐떡이며 식은땀을 닦은 벨리타가 앉을 곳을 둘러보았지만 없다. 그냥 다 복도였다.

얼마나 사람을 부려먹었는지 맨발로 돌아다녔음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게 신기했고 어제 다 까진 몸도 약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황태자가 신경은 써줬나 본데, 밥은 먹고 뛰쳐나올 걸 그랬다. 복도의 기둥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는 벨리타에게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파텔 후작 영애. 출구를 가르쳐 드릴게요.”

이건 또 뭐하는 새끼일까. 벨리타가 모르는 남자를 돌아봤다. 무뚝뚝하게 생긴 얄상한 감자 같은 관상이다. 남자는 벨리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기껏 곱게 땋은 머리는 엉망으로 헤집어져 있었고 얇고 하늘거리는 하얀 민소매의 파자마가 구겨져 있었다.

맨발에 다리와 팔뚝에는 붕대가 돌돌 감아져 있고 어깨와 손목은 진한 멍이 들어있다. 식은땀도 흘렸다. 얼핏 스쳐보아도 잭슨이 벨리타에게 무슨 짓거리를 하려다 뛰쳐나온 행색이었다. 노타는 잭슨에게 약간 환멸까지 느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성군이 될 자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노타는 잭슨을 찾아 벨리타가 있던 방에 갔었고, 잭슨은 생전 처음 보는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