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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8화 (28/150)
  • 28화.

    가문의 힘도 크지 않은 황후조차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일 뿐이다. 최악과 차악의 미래다. 데이비드는 누가 황제가 되어도 싫었다. 폭군이냐, 마마보이냐의 문제다. 그래서 벨리타에게 그리도 당부했다. 얽히지 말라고.

    데이비드는 대기하고 있던 엘라를 찾았다. 엘라라면 벨리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엘라는 벨리타의 꼬리 같았다. 항상 뒤에 따라붙었으니까. 누님이 어디로 갔는지 물으니 산책하러 가셨다며 정원에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역시 엘라는 모르는 게 없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물론 좋은 뜻의 소름이 아니다. 데이비드는 서둘러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조슈아도 벨리타를 찾고 있는 눈치던데 알 바가 아니었다. 넓은 정원을 정신없이 휘저어 뛰어다니며 제 누님을 찾았다.

    없었다. 없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머리를 고치거나,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면, 하다못해 화장실에라도 갔다면 엘라가 따라붙었을 거다. 엘라도 달고 다니지 않고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데이비드는 울 것 같았다. 제 누님이 너무 얄미워서.

    어떻게 말도 안 하고 사라집니까. 몸도 안 좋은 사람이 간다면 대체 어딜 간다고. 차라리 집에라도 돌아갔다면 다행이다. 엘라가 그대로 있으니 말도 안 되지만. 조슈아랑 대화하러 사라진 지 2시간이나 지났다. 데이비드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시 나타나겠지.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돌아오겠지. 되뇌어도 진정이 되질 않아 배를 통통 두드렸다. 괜찮다. 괜찮아. 데이비드는 비척대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하루 뒤에야 벨리타를 만나게 된다.

    *

    작은 손님용 방의 침대에 미친 여자를 눕혔다. 잭슨은 이곳이 정리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이 방을 쓴 사람이 없어서. 하얗게 질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따박따박 헛소리할 때는 그렇게나 생기 있어 보이더니 지금은 시체가 따로 없었다.

    잭슨은 고개를 숙여 벨리타를 구석구석 헤집듯 바라보았다. 진짜 미친 사람 같았는데,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는데 자꾸 시선이 간다. 귀족이란 귀족은 다 훤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계집은 처음 보았다. 주황빛의 머리라면 어느 가문인지 짐작은 갔지만 확신할 순 없다.

    방계일지도 모르고, 타국에서 온 외지인일지도 몰랐다. 외지인으로 치기엔 말을 무척 잘했지만. 흐트러진 주황빛의 곱슬거리는 긴 머리카락, 허여멀건한 창백한 피부, 앙상한 체격과 꽤 곱상하게 생긴 얼굴까지. 나쁘지 않은 외형이다. 죽은 듯한 지금과 다르게 정신없이 떠들던 꼴이 아직도 선했다.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여태껏 잭슨에게 그리 굴었던 사람은 없었다. 벨리타가 한 미친 짓이 제대로 통했다. 잭슨은 하녀에게 의원을 데려오라 일렀고, 이내 삽시간에 방 안은 고요해졌다. 적막하기까지 한 방 안에서 잭슨은 침대 앞에 의자를 두어 앉았다.

    왜 쓰러졌을까. 잭슨은 양손을 뻗어 잡았던 어깨를 가늠해보았다. 작고, 여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 쥐었다가 부러졌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픽픽 쓰러질 정도로 허약한 계집이 감히, 황태자인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정신없이 휘말렸지만 재미있었다.

    돌이켜 곱씹어 볼수록 신선했다. 섣불리 다가오는 여자조차도 없었을뿐더러, 다가오더라도 잔뜩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며 말을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에 반해 이 계집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정신을 놓았다지만 사리 분별도 할 줄 아는 정도면 그저 유쾌한 수준 아닌가. 그 정도는 황태자인 신분으로서 감당할 수 있었다.

    탐이 난다. 갖고 싶다. 장난감을 탐내는 아이와도 같은 심리였다. 질릴 정도로 가지고 놀아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방치해 버리는, 아이의 흥미. 이제껏 사람에게 흥미를 가져 본 적 없었지만 다른 것과 다를 바 없다. 원한다면 쟁취하고 무슨 수를 써서든 가져야 한다.

    권력도 그러했다. 생존을 원하여 손에 쥐었고 살고 싶으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지켜냈다. 잭슨이 원한 건 그뿐이었다. 가진 것도 그것뿐이었다. 삶 외의 무언가를 탐해 본 적 없었다. 어미의 사랑 말고는. 그래서 모르겠다. 이‘것’은 어떻게 가져야 할까. 손에 가득 쥐었던 그녀의 목을 가늠해 봤다.

    부러트려서라도 가지고 싶은데.

    손에 힘을 주어 쥐었다. 이 정도만 쥐어도 꺾여나갈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잭슨이 들어오라 명령하자 황실의 의원과 하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가 잭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의원이 주춤대며 잭슨의 바로 뒤에 다가오자 잭슨이 손가락으로 벨리타를 가리켰다. 오만하고 거만했다.

    “이거, 치료해라.”

    의원이 성심성의껏 하겠다, 답하며 벨리타의 맥을 짚고, 눈꺼풀도 까뒤집어 봤다. 염병첨병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대충하면 바로 황태자의 손에 모가지가 날아갔다. 별짓을 다 했음에도 결론은 기절이었다. 벨리타는 기력도 약하고 몸도 성치 않은 상태였다.

    약하게 흐트러지는 숨소리가 잘못하면 그대로 끊길 것 같을 지경이었지만 그랬다. 그냥 기절이었다. 의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잭슨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목이 날아가지 않으려면 착하게라도 굴어야 했다.

    “기력도 좋지 않고. 상태를 보아하니 원체 몸이 성치 않은 분이십니다. 무리하여 기절하신 듯합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히시고, 몸에 남은 상처를 치료한 뒤에 차후를 보셔야 할 겁니다.”

    “심각한 건 아닌가?”

    “예. 생사를 오가시는 수준은 아니옵고, 기력을 회복하시면 자연스레 눈을 뜨실 겁니다.”

    “옷을 갈아입히고 치료해라. 끝나면 부르도록.”

    별것 아니었다. 그리 심각하게 쓰러졌으면서 그냥 기절이란다. 가지가지 했다. 잭슨은 허탈함에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어내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뒤에도 웃기게 하는 건 재능이다. 잭슨이 문에 가까워지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벨리타에게 몰려들었다.

    문이 닫히고, 잭슨은 시종장을 불렀다. 주변에서 얼쩡대다 부르니까 온다. 잭슨은 벨리타의 외모를 설명하고 뉘 집 애인지 물었다. 브루노 백작가의 영특한 자랑스러운 아들 노타는 잭슨의 개떡 같은 설명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바로 파텔 후작가의 벨리타라고 대답했다.

    파텔 후작가의 벨리타 L. 파텔. 들어 본 적 있었다. 죽을 듯 말 듯 하면서 죽지도 않고 질기게 산다는 그 여식. 그래서 그리 픽픽 쓰러졌구나, 잭슨은 납득했다. 미쳤다는 소문도 기억이 났다. 모든 게 납득되었다. 소문마저 웃긴 계집이었다.

    아, 손에 쥐고 싶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 여인을 제 울타리 안에 가두고 속박하고 싶다. 자신만 볼 수 있게, 그 웃긴 꼴을 나만 알고 즐길 수 있게. 그녀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 막무가내로 구는지 잭슨 자신만 간직하고 싶었다.

    후작의 미친 딸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어미 때처럼 실패하지 않고. 단번에 숨통을 쥐어서, 달아나지도 못하게.

    숨이 끊기더라도 온전히 그대로 가질 수 있도록.

    노타에게 그 계집이 깨어나면 부르라고 한 뒤 집무실로 사라졌다. 잭슨이 지나치는 곳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당연한 이치였다.

    잭슨은 한참을 집무실에서 일정을 소화하다가 벨리타의 치료와 환복이 끝났다는 보고를 듣고 서류를 챙겨 벨리타에게 향했다. 하얀 민소매를 입으니 더 병약해 보인다. 혀를 짧게 찬 잭슨이 협탁에 서류 다발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끌고 침대 앞에 앉은 잭슨은 벨리타를 시선으로 훑었다.

    마른 팔에 약이 덕지덕지 발라져 붕대로 감겨 있었고 제가 움켜쥔 어깨에 멍이 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정돈되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잭슨이 벨리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결이 간지럽다. 여인의 머리카락을 쥐어 본 것이 어릴 때 죽은 어미의 머리카락을 쥘 때 말고는 없었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육체. 죽지 않았더라면 그 품에 한 번 안기지도 못했을 거다. 질척한 피가 볼에 범벅이 되도록 껴안고 경직되는 몸을 감싸며 자신의 온기로 어떻게든 굳지 않게 애썼다. 비참한 줄도 몰랐다. 안겨 와도 쳐내지 않는 어미가 좋았다.

    죽여서야 오롯이.

    얼마 가지 못할 품이어도 어미 그 자체로 좋았던.

    벨리타를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굳어가는 시체를 끌어안고 호감을 속삭여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벨리타를 갖고 싶은 이유가 재미있어서이니 죽으면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나. 더군다나 시체는 오래가지도 않는다. 썩어버리고 악취를 풍긴다. 되도록 죽이지 않고 제 것으로, 제 품에 가둬두고 싶다.

    제 것이 되지 못한다면 어미 때와는 다르게 온전히, 말끔한 행색으로 단번에. 시체라도 가질 수 있도록.

    잭슨은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렵다. 어떻게 해야 벨리타가 자신의 울타리로 들어와 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애정을 거절당하는 건 어릴 적만으로도 족했다. 두 번 다시는 거부되는 감정을, 그 무너지는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다. 여차하면 무력이라도 행세할 수 있었다.

    향유가 풍기는 머리카락을 입술에 문질렀다. 달고 진득한 꽃의 향. 베어 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입에 처넣어 품고 싶다. 사람은 어려우니까.

    잭슨은 한참을 벨리타를 내려다보다 서류를 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서류를 다 처리하고 나서야 벨리타의 곁에서 벗어났다.

    *

    벨리타가 깨어났다. 다음 날 오전이었다. 눈을 뜨고 비척대며 상체를 일으키니 벨리타의 상태를 보던 시녀가 놀라 헐레벌떡 방에서 뛰쳐나갔다. 벨리타는 자기가 무슨 똥 덩어리라도 되는 듯했다. 얼떨떨함에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모르는 곳이다.

    잭슨에게 개소리하다가 쓰러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잭슨이 벨리타를 버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곳은 태자궁이거나 모르는 사람 집이다. 벨리타는 잠에서 덜 깨어 지끈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차라리 숙취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끙, 앓는 도중 문이 벌컥 열렸다.

    하녀들을 이끌고 잭슨이 나타났다. 곧장 걸어온 잭슨은 의자를 빼어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하녀들이 바쁘게 식사를 내오고 벨리타의 얼굴을 닦는 등 격한 아침 인사를 해주었다. 머리까지 예쁘게 한 땀 한 땀 땋기까지 한 후에야 사람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뭔 개짓거리야, 이게. 벨리타는 어안이 벙벙했다. 멍청하게 눈만 멀뚱히 뜨고 있는 벨리타에게 잭슨이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밀었다. 잭슨 한 번, 음식 한 번 번갈아 열심히 바라본 후, 벨리타가 입을 열었다. 물을 마시지 않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탓에 기침 좀 해줬다.

    “이게 뭐예요? 뭔 짓거리예요, 이게.”

    “네가 말했지 않나. 미안하다 사과도 하고, 치료도 해주고, 과일 바구니도 가져와서 거들떠보라고. 아. 물론 과일 바구니는 잊었다. 내일 가져다주마.”

    “미쳤나……. 나 집에 가야겠어요. 고라니 같은 동생이 기다려요.”

    “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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