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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7화 (27/150)
  • 27화.

    그리 쉽게 죽이기엔 이 여인이 꽤 흥미로웠다. 죽여 달라 드러누운 사람을 옳다구나 죽이기엔 청개구리 심보가 가만두질 않았다. 이 여자를 베었다가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서 설치면 그것도 곤란하다. 잭슨은 어느새 뒤로 돌아온 호위로 추정되는 자에게 손짓했다.

    지시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벨리타 탓에 미뤄졌다. 다가온 이에게 마저 지시를 끝낸 잭슨이 호위 같은 자를 물렸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남정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관심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이는 벨리타가 흙바닥에 드러누운 채 잭슨을 돌아보았다. 잭슨은 벨리타가 누군가가 고용한 첩자라는 의심은 아예 접어버렸다.

    “……그만 일어나지 그래.”

    “일으켜줘야지.”

    “내가 왜?”

    “아이고~ 이 집 첫째는 인정도 없다~”

    벨리타가 곡소리를 냈다. 가슴께를 주먹으로 퍽퍽 치며 서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울음소리와도 같은 말소리에 잭슨은 정말 당황했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잭슨이 어떤 반응을 하던 아랑곳하지 않고 일으켜줄 때까지 할 말을 이었다. 진상 흉내는 겪은 게 많아서 너무나도 쉬웠다.

    얼어버린 흙 탓에 긁힌 손과 다리를 보란 듯 드러내며 대놓고 황태자를 비꼰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나 몰라라 하고~ 서러워서 어떡…….”

    “치마 내려.”

    긁힌 다리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란 뜻이었다. 종아리까지만 치마를 걷어 올렸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선 말을 끊어먹는다. 누가 보면 치마 홀라당 벗어버린 줄 알겠다. 잭슨은 벨리타의 어깨를 콱 쥐어 들어 올렸다. 대롱, 대롱,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지 않는다.

    이 나이 먹고 공중부양도 해 본다. 벨리타는 잭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잭슨도 벨리타를 빤히 바라본다. 서로가 서로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깨가 우악스러운 힘으로 붙들려 있었다.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얼어붙은 정원 구석에서, 찬바람 탓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주황빛의 긴 머리카락이 뒤섞였다. 잭슨의 얼굴을 훑고 간질이는 석양을 담은 머리칼. 하얀 털로 둘러싸인 말간 얼굴이 추위에 붉었다. 바다의 반짝임과 녹음의 푸르름이 섞인 눈이 오롯이 잭슨을 향했다.

    여리고 마른 어깨가 손으로 가득 쥐어도 한참을 남을 정도였다. 작고 가볍다. 바람에 너풀대는 치마가 흙에 긁혀 더럽혀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잭슨은 벨리타를 눈앞에 둔 먹잇감처럼 찬찬히 뜯어 훑어봤다. 어디서 굴러떨어진 미친 여자인가. 누구네 미친개인가.

    “이제 좀 놔주죠?”

    벨리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붙들려 있으려니 어깨가 욱신거렸다. 털 코트 덕에 조금 덜 했지만 맨살로 잡힌 채였다면 분명 멍까지 들 수준의 악력이었다. 이미 들었을지도 모르고.

    잭슨은 벨리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행색이라면 파티장에 돌아가지도 못할 테지.

    하지만 잭슨은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지 않는 황태자였다. 이 여자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든, 파티에 돌아가서 놀림거리가 되든 상관없었다. 돌려보내기 전에 경고 정도는 해야겠지만. 치마와 코트에 묻은 흙을 털던 벨리타의 턱을 잡아채 올렸다.

    낮게 으르렁, 울리는 짐승의 목소리였다. 경고였으나 협박이었다. 살의가 날카롭게 피어오른 낯짝으로 벨리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미친 사람인 것 같아 이리 보내주지만, 후에 이 일에 관한 구설이 돈다면 너의 신변은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않을 거다.”

    “관심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데 뭘 말해요. 그보다 그쪽 때문에 내 꼴 이렇게 됐는데 어쩔 거야?”

    “진짜 죽고 싶은가?”

    “죽여 보라니까?”

    골 때린다. 미래가 없나 정말? 잭슨은 아찔해졌다. 잭슨도 자신의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모두가 두려워했다. 모든 황자, 황녀들의 기를 눌러 태연히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피에 미친 미래의 폭군. 귀족이라면 흔히 알고 있는 꼬리표였다.

    이 여자도 모르진 않을 터였다. 모를 리가 없다. 산속에 틀어박혀서 속세의 교류가 없던 것이 아니라면. 속 터놓고 말하자면 잭슨은 이 여자가 어디 가서 소문을 내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미친 여자에게 잘못 걸렸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여분 드레스가 있는데, 이렇게 다쳐서야 파티고 나발이고 치료부터 받아야겠어요.”

    뻔뻔하고 태연자약했다. 벨리타는 황태자에게 깽값을 요구했다. 그랬다. 어떻게든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구실을 필사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유행했던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에게 막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아양 떨고 살랑살랑 눈웃음치며 미친놈 눈치 보고 맞춰주고 싶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벨리타의 요구는 잭슨의 뒷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잡지는 않았지만 잭슨은 뒷골이 당겼다.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은 잭슨이 대충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알아서 치료비 청구해. 내 아랫사람이 처리해줄 테니.”

    “이봐요. 나 다치게 한 사람이 누구지요?”

    “……뭔, 짓거리지?”

    등을 돌리고 가려던 잭슨의 팔을 덥석 잡아 멈춘 벨리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잔소리를 목구멍에 장전한 벨리타는 심기가 심히 안 좋아 보이는 잭슨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그냥 미친 여자로 기억되면 언제 관계가 진전될지 몰랐다.

    입을 털자. 뭐라도 해야 했다.

    “다치게 했으면 사과도 하고 어? 치료비도 부담하고, 과일 바구니라도 가져와서 얼마나 아프신가 거들떠도 봐야 할 거 아냐.”

    “진짜 미친 거…….”

    “내가 듣고 싶어서 들었어? 동네방네 다 들어라 떠들었으면서 누구 탓을.”

    죄책감을 자극하든, 없는 양심을 말로 두들겨 패서 생기게 하든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벨리타가 한 말은 틀린 말이 없지 않은가. 자기들이 떠들었으면서 벨리타를 죽이려 들었고, 다치게 했으면서 벨리타가 골 때리니 그냥 보내버리려는데. 얌전히 당해줄 벨리타가 아니었다.

    울컥해서 죽이든, 입으로 뱉은 똥에 반하든 하나는 해라. 딱 하나만 해줘라. 벨리타가 말을 쏟아내다 가빠진 숨에 헐떡였다. 눈앞이 핑, 돌고 하얗게 점멸한다. 심장이 쿵쿵, 온몸을 두들기듯 뛰었다. 아, 전에 느껴본 적 있었다. 혼자 죽으려고 했을 때. 목을 매고 팔을 베고 난 후 스스로 회복한 뒤에 느껴지던.

    쓰러지기 직전의. 그 엿같은 감각.

    “……이 씨이바, 네가 나 책임져…….”

    “……이봐, 이봐!”

    맥없이 풀썩 쓰러지는 벨리타의 허리를 반사적으로 잡아챈 잭슨이 놀란 얼굴을 했다. 책임지라니, 뭘. 버리고 가지 말라는 소린가? 잭슨은 시체처럼 품에서 늘어진 벨리타를 바라봤다. 털 코트에 파묻혔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있어야 할 잭슨의 손자국이 없었다.

    잭슨은 그 기이한 현상보다 벨리타의 미친 짓거리가 더 놀라웠다. 정신이 없었다. 헛소리를 혼자 쏘아대다 픽 쓰러졌다. 뭐 이딴 또라이가 다 있는가. 잭슨은 벨리타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꼴이 정말 자신이 죽여서 데려온 시체 같았다.

    우선 이 여자가 말했던 대로 치료는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이 미친 여인이 누구인지는 명령만 하면 바로 알아낼 수 있으니. 우습고 정신없는 사람이다. 잭슨은 벨리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재미는 있었으니까 살려둬야겠다. 벨리타를 자신의 망토로 덮어 가리고 태자궁으로 걸었다.

    벨리타는 드라마에서 유행하던 짓거리가 통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태자궁으로 안겨 갔고, 데이비드와 조슈아는 목이 빠져라 벨리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식은땀마저 났다. 조슈아와 이야기를 나눴던 누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조슈아가 데려갔나 했더니 조슈아도 벨리타의 행적을 몰랐다. 낭패였다. 어련히 잘 있다가 올까 싶다가도 사람 사이에 섞이길 못해 봤던 누님인지라 걱정이 앞섰다.

    황태자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는데. 얽히지 말라고 했는데도. 데이비드는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생각에 진땀을 뺐다. 설마. 아니겠지. 데이비드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걸 몰랐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황태자와는 정말 엮이기 싫었으니까.

    황제와 외국의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완벽한 황족의 핏줄인 잭슨은 방치되며 자랐다. 왕녀는 원하지 않은 결혼이었고 그로 인해 자연히 아이에게도 무심했다. 차라리 방치를 했으면 다행일까, 폭력을 행사했다. 어린아이를 때리고, 굶기며 숨도 못 쉴 정도로 몰아세웠다.

    아카데미 학우인 공작가의 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니 틀림없다. 데이비드는 거기까지 들었을 때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지금의 폭력적인 성향은 그때 몸에 뱄구나. 동정심까지 가졌지만 이어지는 황태자의 작태에 진절머리를 쳤다.

    잭슨이 제 어머니를 고기나 써는 나이프로 사정없이 찔러 죽인 탓이었다. 폭력에 노출된 어린아이가 복수에 미쳐서 하는 짓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때가 11살이었다. 1황자의 나이 11살에 그 짓거리를 한 거다. 황실에서 이런 사건이 생기자 사람들은 쉬쉬하며 덮었다.

    고매한 핏줄이 한 짓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황후를 시기하던 첩이 저지른 일로 바뀌어 넘어갔다. 그 덕에 가문도 좋지 않은 첩의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누명이었다. 황태자가 될 대단한 분을 위한 작은 희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피의 숙청.

    그럼에도 귀족들은 잭슨이 황후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워낙에 황실이 소란스러웠으니까. 하늘 같은 황태자가 되실 분, 소문은 나도 앞길은 막히지 않았다. 제 어미를 수십 번 찔러 죽인 패륜아는 공포를 거느리고 피를 흩뿌리며 살았다.

    황실의 그 아무도 잭슨을 건드리지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아 홀로 자랐다. 잭슨에게 오는 사람이라곤 가정교사 정도였고 조금 컸을 무렵에는 장사꾼, 뒷세계의 길드들, 온갖 귀족이 발걸음을 했다. 언제든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지르밟을 수 있도록 준비해온 것이다.

    권력을 탐해 새 황후가, 다른 첩들이 잭슨을 사지로 몰아넣어도 꿋꿋이 살아남았고 전쟁통에 밀어 넣어도 끝내 승리를 거머쥐고 멀쩡히 돌아왔다. 전쟁 영웅, 뒷세계와 내통하는 황태자. 감히 그의 자리를 탐할 자는 없었다. 살고 싶다면 건드릴 수 없었다.

    거슬리면 베고, 고까우면 죽였다. 황실에서의 소문은 그리도 파다했다. 황후가 2황자를 내세워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지금이 가장 피가 낭자할 시기였다. 데이비드는 눈치가 빨랐고 정치판을 잘 읽어냈다. 황태자 잭슨이 여태 그러했듯 승리를 거머쥘 거다. 귀족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2황자는 꽃밭에서 자란 머저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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