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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6화 (26/150)
  • 26화.

    조슈아와 데이비드는 거짓으로 점철된 미소로 일관하며 악수까지 했다. 데이비드가 조슈아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제 누님을 찾아다니셨다고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다고 어린 영애를 찾아다닐 필요까지 있으십니까. 소문은 빠른 법입니다.”

    “저에겐 아주 중요한 약속이니까요.”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돌아봤다. 대체 무슨 약속이기에 조슈아가 벨리타를 찾느냐는 얼굴이었다. 끼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을 놓고 싸우는지라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섰다. 사이가 나빠지든 말든 상관없는 일인데 다 자신이 착한 탓이다. 착한 벨리타. 불쌍한 벨리타.

    벨리타가 조슈아와 데이비드의 팔을 움켜쥐었다. 시선이 벨리타에게 꽂힌다.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며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말을 얹지 못하도록 입이 쉼 없이 움직였다.

    “내가 도와주기로 한 게 있어서 조슈아랑 잠깐 이야기 좀 할게. 그냥 친구 사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여기 있어. 금방 올 테니까.”

    데이비드의 눈썹이 두드러지게 일그러졌다. 벨리타가 봐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고 찾아다니는 친구 사이는 드물긴 하다. 동생으로서 이상한 놈이랑 누나가 엮이면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벨리타의 동생들도 그랬어서 이해는 간다.

    하지만 주변 사람 관리는 벨리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동생이 간섭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벨리타는 데이비드에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조슈아를 끌고 테라스로 갔다. 사람들 신경이 황태자에게 쏠려 있어서 테라스로 들어가도 별말은 나오지 않을 거다.

    테라스 안쪽에 조슈아를 몰아넣은 벨리타가 자신의 팔짱을 꼈다. 박력이 넘쳤다. 날이 추워서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들어가고 싶었다. 벨리타 덕에 난간에 기댄 조슈아가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잔뜩 풀어진 웃음을 헤실헤실 짓는다.

    “보고 싶었어요. 영애. 영지로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해서, 영애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문전박대요?”

    “영애를 보여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후작께서 제 방문을 거절하셨어요.”

    벨리타는 의아했다. 조슈아가 뭐라고 문전박대까지 했을까. 하지만 벨리타가 알 바가 아니었다. 테일러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 싶었다. 나쁜 친구랍시고 못 만나게 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다 필요 없고 빨리 본론을 이야기하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서두도 없이 말을 이었다. 이제 한겨울인지라 으슬으슬 떨렸다. 황태자도 찾아야 하고.

    “조만간 신관한테 치료받으러 가요. 시간 비워 둬요.”

    “절 잊지 않아주셨군요……. 영애에게 전적으로 맞출게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고.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시간 비는 날 얘기해줘요. 신관한테도 연락 넣어야 해서.”

    덜덜 떠는 벨리타에게 다가간 조슈아가 코트를 벗어 둘러주었다. 춥기는 하지만 어차피 대화도 끝났으니 받지 않았다. 조슈아는 시무룩해졌지만 괜찮았다. 벨리타가 코트를 조슈아에게 둘러 입혀주었으니까.

    “찾아갈게요. 이번에도요.”

    “그래요. 수도에 오래 있을 예정이니까.”

    늘어진 긴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미소를 지은 벨리타가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돌렸다. 이번에도 미련 두지 않고 떠난다.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다정함에 녹는다는 걸 알까. 조슈아는 이미 사라져 버린 벨리타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붉어진 뺨을 감쌌다.

    먼저 자리를 떠난 벨리타는 쫄랑쫄랑 데이비드에게로 돌아가려 했으나 데이비드의 주변에 몰린 사람들로 인해 식겁하며 나중에 이야기해야겠다 싶어 방향을 돌렸다. 우선 제일 급한 건 황태자였다. 황태자랑 만나서 인연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아는 척이라도 한다.

    황궁 정원이나 돌아보자. 황태자가 연회장에 없으니 우선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대기하고 있던 엘라에게 다가가 외투를 받아 입었다. 따라오려는 엘라를 겨우 떼어놓은 뒤, 정원으로 나왔다. 어느새 완전한 겨울이었다.

    입김이 나온다. 황궁이어서 그런지 겨울에도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꽃은 없었지만 꽤 예쁘다. 날씨가 추워서 밖에 나온 사람은 없었다. 이 넓은 정원을 독차지한 기분이 들어 벨리타는 꽤 기분이 좋았다. 황태자를 찾아내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정원이 예쁘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었다. 눈이 내리면 절경일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산책하는 중, 구석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들이었다. 정원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건물이 이어진 복도에서 들리는 듯 했다.

    첫 번째가 불구경이고, 두 번째가 싸움구경이다. 놓치면 후회하는 재미있는 구경거리 말이다. 벨리타는 발소리를 죽이고 슬금슬금 벽 너머로 숨어들었다. 막상 가까이 와 보니 싸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명령하고, 누군가가 대답하는…….

    “……제일 먼저 황후를 처리해야 한다. 2황자는 황후 없으면 그저 애새끼일 뿐이야.”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다. 황태자였다. 벨리타는 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들키면 진짜 꼬인다. 정치에 엮이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첩자라고 오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황태자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드럽게 엮이고 싶지는 않다.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니, 암살도 염두에 두어야…….”

    저 새끼 또 자기 엄마 죽인다. 친엄마도 죽였다면서 또 죽이는 걸까. 컬렉션이라도 만드나? 벨리타는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듣고 싶지도 않은 황위 쟁탈전에 대해 들어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언제 떠나나, 언제 가는 걸까 기다리는 그 순간, 황태자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넌 뭐지?”

    황태자가 벨리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니, 이미 벨리타의 앞까지 다가와 벨리타의 여린 목을 틀어쥐었다. 크고 굵은 손이 마른 목을 힘주어 쥐며 황태자, 잭슨이 형형하게 살기를 드러냈다. 벨리타는 그만 다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목이 조여 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벨리타가 잭슨의 손등을 긁었다. 살갗에 박히는 손톱이 생채기를 남겼지만 잭슨은 이따위는 통증도 아니라는 듯 손에 힘을 더욱 실었다. 고통스럽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 수준의 아귀힘이 더욱 괴로웠다.

    벨리타는 문득 생각했다. 자살로 죽지도 못하고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타살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남이 죽여주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이딴 또라이를 꼬시는 것보다 죽어서 돌아가는 게 더 빠르고 쉽다. 벨리타의 몸이야 알 바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 하던 발악을 멈췄다. 목표가 정해졌으면 과정은 어떻든 상관없다. 이루기만 한다면. 벨리타는 잭슨의 손을 겹쳐 잡고 힘을 주었다. 없는 힘을 긁어모아 제 목을 더욱 압박해왔다. 흠칫, 잭슨이 눈에 띄게 몸을 떨고는 벨리타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추위에 얼어 있는 바닥은 아팠다. 콜록, 콜록, 갑자기 폐부에 쏟아지는 호흡에 벅차 기침을 토해내자, 잭슨이 벨리타의 앞에 섰다. 당장이라도 발을 들어 벨리타를 짓밟겠다는 듯, 살기가 두드러졌다. 왜 죽이지 않았지. 그냥 죽으면 편했을 텐데. 원망스러웠다.

    “누가 사주했지? 네 주인은 누구냐.”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기야, 나쁠 수밖에 없었다. 잭슨은 벨리타를 오해하고 있었다. 벨리타는 마른기침이 잦아들자 고개를 쳐들었다. 잭슨과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의 보석 같은 눈. 보석 같아서 온기조차 품지 않는 눈.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그런 낮은 온도의.

    목의 고통이 수그러들었다. 미미해진 통증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마 자국조차 남지 않겠지. 전에 그랬듯이. 벨리타는 두렵지 않았지만 몸은 고통에 두려워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아, 아니다. 벨리타는 공포에 질렸다. 폭력에 질려 있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잭슨은 헛웃음을 뱉었지만, 벨리타는 웃지 않았다. 마주치는 시선에도 벨리타는 잭슨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너머의 다른 이를……. 기억 속의 누군가를…….

    미친 사람과도 같은 행태에 잭슨은 혀를 찼다. 시간만 낭비한 꼴이었다. 누군가 들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죽이면 증인은 없어진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2황자의 첩자인지,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알아낸 후 처리하려고 했다.

    이 여자의 눈을, 마른 몸을 보고 알았다. 그런 유의 작자가 아니다. 짜증, 체념. 이어지는 공포와 사무치는 슬픔. 자신을 죽이려, 정보를 캐러 오는 작자들은 이런 눈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까지 무력하지 않다. 이 여자는, 이 사람은 정말 우연하게.

    일어나지 못하는 벨리타를 가만 지켜보던 잭슨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귀찮아도 보이고, 신경질적으로도 보였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잭슨이 말했다.

    “어디까지 들었지?”

    “…….”

    “말을 할 줄 모르나?”

    손을 뻗었다. 벨리타의 눈앞까지 드리워진 손. 발작하듯 손을 쳐냈다. 호흡이 가빴다. 아직도 어깨가 잘게 떨리고 목 안쪽에서 울컥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버거웠다. 벨리타는 잭슨을 노려보았다. 분노, 혐오, 책망. 역겨운 감정들이 뒤섞였다.

    “손대지 마, 이 시발 새끼야.”

    반사적으로 나온 쌍욕이었다. 자신이 뱉어낸 쌍욕이지만 벨리타도 놀랐다. 전 남편의 기억에 붙들려 정신도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털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음 조각 같은 흙더미에 쓸린 손과 다리를 느끼며 상체를 들었다.

    벨리타의 욕설이 놀란 듯도 보였고 흥미로워 보이기도 했다. 괘씸해하는 걸지도 모른다. 동그래진 눈이 가늘게 접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사람 하나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벨리타는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이런 미친놈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차라리 죽여라, 죽여. 몰아치는 스트레스 때문에 의지가 팍 꺾여 다 귀찮아진 벨리타였다. 지네 엄마도 죽이는데 여자 주인공 하나 못 죽이겠는가. 벨리타는 막 나가기로 했다. 죽으면 죽는 대로, 잘되면 잘되는 대로 현실로 돌아갈 테니까.

    “뭘 봐요. 뭐. 난 들은 것도 없고요, 꼬우면 죽이시든가.”

    “할 줄 아는군.”

    “오오냐, 말할 줄 안다. 그래서 뭐요.”

    잭슨은 어이가 없었다. 놀랐다가 짜증스러웠다가 겁을 집어먹은 뒤, 배 째라는 식의 태도를 가진 이 여자가 정말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오락가락하나? 지금의 반응을 보면 진심으로 죽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히 황태자에게, 누구인지도 모를 일개 여인이 무엄하게. 죽여 달라고 악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여자의 목을 잘 다듬어진 검으로 슥삭, 베어버릴 수 있었다. 칼도 조금 빼들었다. 이대로 칼집에서 날붙이를 빼내고 휘두른다면 1분, 아니. 5초 정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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