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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5화 (25/150)

25화.

벨리타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데이비드를 끌어안았다. 어린 나이에 마음 고생했을 아이가 안쓰러웠다. 조슈아도 무척 불행하고 불쌍했지만 불행이란 불행은 다 처박아 놓아서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공감도 되지 않았다. 그냥 불쌍하다, 정도였다.

이 아이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이야기여서. 아니, 딸이 느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라고 생각되어 더욱 안타까웠다. 아픈 첫째를 신경 쓰느라 외로움을 느꼈을 내 딸. 경우는 다르지만 상황은 비슷했던 탓이다.

바쁜 엄마를 찾으며 방문 너머를 바라보던 어리고 약한 아이. 첫째에게 온 신경을 쏟아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다. 유치원에서 가족을 그린 그림을 가져왔을 때 딸만 동떨어져 있던 게 어찌나 가슴이 무너지던지.

아픈 첫째 보살핀다고 안아주지 못했던, 내 딸. 얼마나 상처였을까. 아직도 그 기억에 힘들어할까. 이 아이처럼 계속 그때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을까.

내가, 미울까.

눈물이 나왔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때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하지 못했다.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 내 탓이다. 다 내 탓이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를 안고 흐느껴 울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벨리타의 반응은 데이비드를 당황하게 했고 울게 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몇 번이고 닿지 않을 울음소리가 울렸다. 데이비드는 큰 손으로 벨리타의 등을 힘주어 감싸 안으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이제는 이해한다고, 용서한다고. 벨리타는 새어 나오는 설움을 억지로 삼켜내며 몸을 떨었다. 삼킨 와인보다 흘린 눈물로 적신 밤이었다.

*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도착했다. 황궁은 으리으리했고 하루 종일을 돌아도 다 못 볼 만큼 커다랬다. 데이비드가 사준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데이비드의 손을 잡아 파티로 들어섰다. 함께 술을 마신 밤 이후로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졌다. 여전히 틱틱대는 데이비드는 생각보다 에스코트를 능숙하게 해냈다.

사이가 좋지 않다 유명한 동생과 함께 참석한 벨리타에게 사람들의 시선은 쏠렸다. 귀찮고 거치적거렸다. 짜증이 가득한 벨리타를 눈치 빠르게 알아채고 데이비드가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리타는 황태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없다. 황태자가 없다. 다른 황자, 황녀들까지 왔는데 없었다. 파티가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이끈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열리는 파티였음에도 주인공은 머리카락 한 올 내밀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 파티에서 꼭 만나야만 했다.

데이비드의 뒤에 서서 연회장 내를 열심히 훑어보던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람 하나가 피떡이 되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쓰러진 저 사람은 귀족이었다. 귀족을 질질 끌고 들어온 장본인이. 씨부럴.

황태자였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제일 잘생겼으니까. 대체 어느 집 남자 주인공이 파티에 사람 줘 패놓고 질질 끌고 들어오느냔 말이다. 그게 우리 동네 남자 주인공이었다. 데이비드의 뒤에 서 있던 벨리타가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황태자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였다.

황태자의 주변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비집고 구경하기 좋은 위치에 도착했다. 고놈 참 실하게 생겼네. 역시 남자 주인공이 제일 잘생겼다. 조슈아도, 데이비드도 잘생겼지만 정석적인 미남은 황태자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의 눈이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차림도 썩 괜찮아 보였다. 벨리타의 취향은 아니지만, 잘생겼으니 우선 합격이다.

황태자는 매타작으로 범벅이 된 귀족을 질질 끌고 연회장 한가운데까지 걸어왔다. 바닥에 길게 핏자국이 남았고 궁의 사용인들은 허겁지겁 황태자를 쫓아 피를 닦아냈다. 기이한 광경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곤죽이 된 귀족은 짐승처럼 뒷덜미를 잡혀 황족들이 앉은 곳까지 끌려갔다. 황태자가 가려는 길목을 사람들은 알아서 터줬다. 그가 걷는 길에 방해물 하나 없었다. 기겁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황태자가 황제의 앞에 섰다.

덜덜 떠는 귀족을 바닥에 내팽개친 황태자가 사나운 눈을 부릅떴다. 일순간 공기조차 차게 식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도 크게 울릴 정도였다. 구석에 있던 악단들도 손을 놓고 황태자의 작태를 구경했다. 모든 시선이 황태자를 향했다. 황태자의 독무대였다.

“이게 무슨 짓거리지?”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는 잘 벼린 검 같은 눈으로 신음을 뱉어내며 경련하는 귀족을 바라보았다가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제 또한 심기가 좋지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거만하게 의자에 앉은 채로 황태자를 내려다봤다. 옆에서 황후가 황제의 팔을 움켜쥐었다.

황자들, 황녀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황태자를 욕하는 분위기였다. 두려움, 비웃음, 경멸 등이 한데 섞인 시선들에도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에게서 눈을 돌려 황후를 보곤 비죽이며 웃었다.

“제 목을 노리던 자인데, 처우를 묻고 싶어 왔습니다.”

낮고 짐승과도 같은 거친 목소리였다. 황태자에게서 살기가 돌았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도, 괴로워보이지도 않았다. 언제나 겪었던 일처럼 담담했고 그저 피곤해 보이기만 했다. 황후가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벨리타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팝콘 씹으면 딱인데.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 좀 주시겠습니까?”

저 말은. 저 뜻은. 벨리타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다들 벨리타와 같은 생각인지 짧게 웅성거림이 퍼졌다가 흩어졌다. 황후가 황태자의 목을 노렸다. 황태자의 반응으로 보건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대놓고 엿 먹이는 거였다.

삽시간에 소곤거리던 황자, 황녀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건 선전포고였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주는 망신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으며 앞으로 일어날 권력 싸움에 대한 방아쇠이기도 했다. 벨리타는 잘 모르는 이 나라 정치판이지만, 눈치로 알아챌 수 있었다.

조용한 황후를 비웃듯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황자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움찔하는 한 황자에게 황태자가 짓씹듯 천천히 경고를 토해냈다.

“아니면, 2황자, 네가 의견을 주겠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을 황태자가 직접 화두에 올렸다. 황태자와 2황자의 권력 싸움. 물밑에서 진행되던 진흙탕싸움을 황태자가 기어코 물 위로 끌어올린 셈이었다. 동시에 귀족들에게 주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두 명을 엿 먹인 황태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물건을 다루듯 바닥에 엎어진 귀족을 발끝으로 툭, 친 황태자가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의 얼굴이 완벽하게 일그러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습니까. 이놈의 배후를 찾아 목을 베어도 좋겠습니까?”

완벽하게 폭군과도 같은 자태였다. 황제에게 대놓고 황후와 2황자를 죽여도 되겠냐고 묻는 거였다. 벨리타는 통탄했다. 아, 남자 주인공 미친놈이었어. 저런 놈 꼬시고 싶지도 않다. 엮여 봤자 벨리타만 피곤한 손해였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문 황제를 가만히 보던 황태자는 훽, 귀족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무겁지도 않은지 한 손에 성인 남성을 움켜쥔 황태자가 예를 갖추어 여유롭게 고개를 숙였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의견이 없으시니…….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마저 즐기시길.”

평화롭던 파티에 폭탄을 던져놓은 황태자가 귀족을 질질 끌고 다시 연회장을 나갔다. 시종들이 급하게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황태자가 완전히 연회장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삼삼오오 모여 황태자에 대해 떠들었다.

황태자가 미쳤다, 저렇게까지 하는 황태자를 황제로 올려야 하냐, 등등. 기세가 2황자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같은 귀족을 저리 묵사발 만들어놓고 짐승처럼 질질 끌고 다니는데 기함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도 저 꼴이 날지 모르니까.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작게 욕으로 추정되는 말을 뱉어내고 자리를 떴고 황후도 뒤따라 나섰다. 2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숨길 새 없이 황급히 연회장을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계승권에서 자유로운 황녀, 황자들은 얼떨떨해했다.

남자 주인공이 미친 새끼다. 또라이다. 벨리타는 현기증까지 났다. 차라리 조슈아네 식당과 파티에서 만났던 그 보라색 머리의 잘생긴 남자를 침대에 자빠트리는 게 훨씬 낫다. 무엇보다 벨리타 취향이었다. 황태자보다 성격도 훨씬 좋아 보였고.

저딴 미친놈을 어떻게 꼬시느냔 말이다. 솔직히 어떻게 해 보고 싶지도 않다. 나쁜 남자가 좋은 건 20대 때로 충분했다. 착하고 돈 잘 벌어오고 속 안 썩이는 남자가 제일인데. 저 새끼는 아니잖아. 돈만 많고 잘생기기만 했잖아.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누가 죽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은 없었지만 어떻게 만나서 홀라당 넘겨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파티는 뭔 얼어 죽을 파티인가. 지가 다 망쳐놓고선 뭘 마저 즐기래. 벨리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느새 벨리타의 옆에 다가온 데이비드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잭슨 위비에 A. 세르트제 황태자입니다. 살인귀에 황궁에서 소문도 좋지 못합니다. 괜히 얽히지 마십시오.”

“맞아요. 황태자는 사람을 쉽게 죽이니까요.”

갑자기 끼어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근원지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살갑고 순하게 미소 짓는 조슈아.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어차피 조만간 만나려고 했었는데, 너무 갑자기 나타났다.

벨리타가 놀라서 조슈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는 사근사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찾아다녔어요. 다시 만나서 기뻐요, 영애.”

조슈아가 손을 뻗어 벨리타의 손을 잡으려 하자 데이비드가 막아섰다. 매섭게 올라간 데이비드의 눈매가 사르르 접히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가식덩어리. 벨리타가 조용히 혀를 찼다.

“조슈아 J. 소이트 로틀 남작님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네, 데이비드 파텔 후작 소가주님. 만나 뵈어서 기쁘네요.”

갑자기 끼어든 데이비드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던 조슈아가 순식간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가식적인 웃음들뿐이었다. 기 싸움한다, 얘네. 남이 싸우는 건 구경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벨리타는 둘 사이에 끼지 않고 한 발 물러났다. 불똥 튀면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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