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4화 (24/150)

24화.

벨리타는 와인을 뿜을 뻔했다. 들켰다. 언젠가 들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가까운 사람이 알아버렸다. 당혹스러웠다.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난처함에 할 말을 고르며 입을 다물었던 벨리타가 데이비드를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저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내야 할까.

심각해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태도를 보자 제 누님이 미치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정말 미쳤다면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거다.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미친 척을 한 걸까. 왜 미쳤다는 소문을 부인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

벨리타는 섣불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조슈아도 속였고 부모도, 껌딱지 같은 하녀도 속였다. 누가 보아도 미친 사람이었기에 속았을 거다. 들켜도 상관은 없었지만 벨리타는 혹시 모를 걱정이 앞섰다.

무슨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속았으니까, 속였으니까 숨겨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자신을 감추는 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며 죄책감이 드는 일이다. 놓고 싶다는 생각도 곧잘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데이비드는 잔을 허공에 두어 번 흔들었다. 와인이 파도쳤다.

“지금 반응을 보고요.”

다 들통났다.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이미 다 알고 물어보는 거다. 알딸딸하게 오른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뒷목에 서늘하게 소름이 끼쳤다.

다 알고 있다는 태도가 숨 막히게 한다. 벨리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벨리타가 아닌 것까지 눈치챘을까. 그냥 미치지 않았다는 것만 알까. 어디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빈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데이비드는 제 누님이 미치지 않았다는 건 확신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 숨겼느냐, 왜 미친 척을 했느냐가 궁금했다. 벨리타는 분명 옛 기억과 비교했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지만 오랜 시간 보지 못했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님에게 진정 묻고 싶었던 것은.

“왜 미친 척하고 계셨습니까? 부정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다 깨버린 술기운 덕에 생각 정리는 빨랐다. 데이비드의 표정과 말을 보니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 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대충 얼버무리면 된다. 타당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불쌍해 보이고 안타까워 보이면 어련히 넘어가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 동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자신보다 나아 보이면 동정도 사라지고 아니꼬움만 남게 되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있지 않을 테니 괜찮다. 연민이 사라지고 기이함을 느낄 즈음이면 벨리타는 이곳에 없을 거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불쌍하게, 동정에 속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럼에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의 논리와 알아서 상상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정보를.

“미친 척한 적 없어. 다들 그렇게 생각한 거지.”

“부정했으면 됐잖습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었는데도?”

“무슨 소리십니까.”

벨리타는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미소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기묘함.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허술해 보이는데 허술하지 않은 사람. 데이비드는 벨리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판단하고자 했다.

“내가 나라서 할 수 없었던 걸 미치고 나서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그걸 마다할까?”

소문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누님이 산을 타고 영지를 돌아다니고 허물없이 지내며 건강을 회복했다는 말들이. 데이비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통해 생각했다. 아팠고 신분이 높아 할 수 없던 일들을 미쳤다는 소문이 돌아서야 할 수 있다.

하고 싶었던 걸 했는데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그걸 이용했다.

데이비드는 완벽하게 자신의 판단대로 벨리타를 결론지었다. 영악한 사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하면서 행복하고 싶었던 불쌍한 누나. 낮에 함께 시간을 보냈던 벨리타를 떠올렸다. 미쳤다는 소문을 등에 업고 즐거워했던 벨리타가 안타까웠다.

이제는 알겠다. 미쳤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남아 있어서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들을 꺼내도 허망하지 않을 거다. 미친 누님을 붙잡고 옛날 일을 끄집어낸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데이비드는 이때가 아니면 다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진심을 드러내도 헛소리가 아니게 되었음을.

벨리타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데이비드가 말을 꺼냈다.

“저는 누님이 밉습니다.”

“알아.”

“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말하려고요.”

데이비드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 긴장이 된다. 인정하는 건 어려웠다. 누님이 미치게 미웠으면서도 좋아서 견딜 수 없었다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함께 있고 싶다는 복잡한 마음은 속을 끓였다.

그랬지만. 자신은 아직도 그때의 어린 데이비드였다. 누나가 좋은 어린아이.

“저는 누님의 친동생이 아닙니다. 방계입니다. 누님이 아파서, 언제 죽을지 몰라 데려온 입양아요. 모든 게 무섭고 어려웠습니다. 가짜 부모도, 갑자기 생긴 가주라는 미래도요. 어린 마음에, 뭐, 애가 다 그렇잖습니까. 비슷한 나이의 누님이 좋았습니다.”

벨리타는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데이비드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빈 잔은 못 두고 본다.

두 손으로 다소곳하게 잔을 받은 데이비드가 속이 타는 듯 곧장 와인을 들이켰다. 말하기 어려웠지만 한 번 입을 여니 줄줄 쏟아내기는 쉬웠다. 아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첫 만남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누님은 누워서, 아파서 울고 계셨습니다. 손을 내미니 꽉 잡고 놓지 않으시더군요.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는 이유가 기억이 안 나지만, 정말 좋았습니다. 그래서 근처를 맴돌았습니다.”

“…….”

“대화 한번 해 보고 싶고, 놀고도 싶고. 날 봐 달라고, 아는 체해 달라고 기웃거렸습니다. 모르는 척인지 무시인지. 한 번을 안 봐주시더라고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서두가 길다. 그래서 벨리타가 한 잘못이 뭘까. 뭔 잘못을 했기에 좋다고 쫓아다니는 동생이 이를 갈면서 바득바득 시비를 걸었나. 기억도 없는 걸 보면 벨리타는 생각 없이 한 행동인 것 같았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고 하지만.

“누님의 몸이 좀 나아지는 날, 제대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누님께서…….”

말 끊는 게 아침 드라마 급이다. 그래서 벨리타가 무엇을 했는데. 데이비드의 강약조절이 기가 막혔다.

“절 밀치고, 죽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너 따위 게 내 대신이냐고, 같잖지도 않은 게 굴러들어왔다고요.”

이야. 벨리타가 잘못했다. 이건 벨리타가 정말 잘못했다. 이런 말 해놓고는 기억도 안 했다니 진짜 너무했다.

“이해는 합니다. 열두 살이면 감정적일 나이고, 부모가 갑자기 자기 대신할 아이를 데려왔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겠죠. 비참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때는 상처받았지만 이젠 압니다.”

혹시 데이비드는 천사인가? 부처인가? 벨리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의 동생에 비교했다는 자체가 미안해졌다. 자신 같았으면 같이 머리채 잡고 바닥을 뒹굴었을 거다. 같이 말싸움했던 것도 미안해진다.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그래도 사실 전 누님이 좋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기댈 사람은 누님이었고요. 동질감에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둘 다 불행했으니까요. 그 뒤로도 기웃거렸습니다. 언젠가는 날 봐주겠지, 아는 척은 해주겠지 하면서요.”

불쌍해 죽겠다. 이건 백번 벨리타가 잘못했다고 생각은 드는데, 벨리타 또한 남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나이였기에 벨리타의 입장도 이해는 됐다. 열두 살이면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나이이다.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겠지.

어린 나이도, 부모의 나이도 거쳤던 벨리타는 누구도 탓할 수 없음을 알았다. 모두의 입장을 알겠어서, 안타깝기만 했다. 다만 부모가 좀 더 잘 대처했다면 이렇게까지 둘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테일러와 라빌은 완벽할 수 없다. 누구든 부모는 처음이다. 서투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초능력도 없으니 알 수 없고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했어야지. 잘 해 보려고 노력 정도는 했어야지.

아이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은 해 봤어야지. 죄 없는 아이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안타까워서 마음이 미어졌다. 충분히 마음 아픈데, 데이비드가 토해 낼 과거는 끝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일 년 정도 알짱댔을 겁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어요. 나랑 산책 가자고. 같이 놀고 싶다고요. 시녀한테 편지를 전해주고, 문 너머에서 몰래 지켜보는데……. 누님이 편지를 찢어버리셨습니다. 몇 번이고 찢고, 찢어서 버리시더군요.”

벨리타가 잘못했다. 잘못은 했지만 어린 벨리타가 무슨 심정으로 편지를 찢었는지 알 것 같았다. 기만 같았겠지. 자기는 아파서 침대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산책을 가자는 말이 얼마나 얄밉겠는가. 놀고 싶지 않아서 놀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자기 집, 자기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 탓에 눈칫밥만 먹었을 데이비드다. 열한 살이면 다 안다. 입양된 자신의 처지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거다. 테일러와 라빌이 오죽 감정 표현을 못 해야지. 부모가 잘못했다. 이건 무조건 부모 탓이다.

가뜩이나 기도 죽어 있는데 먼저 골골대는 누나에게 다가갈 용기는 없었을 거다. 좋은 남매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눈가가 시큰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벨리타가 데이비드의 손을 잡았다. 데이비드가 파드득, 놀라 몸을 떨었지만 벨리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벨리타의 손을 맞잡는다. 힘을 주어 쥔 손은 크고 따뜻했다.

“간절한 마음을 욱여 담은 편지여서 그런지, 상처가 컸습니다.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누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원망스럽고, 그랬습니다. 더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아카데미를 가서……. 아, 왜 눈물이 나지.”

그래서 두 번째 만남이라고 했던 거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데이비드는 평온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낫지 않는다. 그저 흉터가 되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치료를 해도, 시간이 오래 지나도 흉이 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