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누님과 함께 산책, 쇼핑을 나온 게 꽤 기쁜 분위기였지만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들떠있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데이비드는 인상을 옅게 찌푸린 채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살롱으로 벨리타를 이끌었다. 이왕 산다면 좋은 옷을 권하고 싶었다.
살롱의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제대로 기억도 하지 않은 벨리타가 여러 옷을 입어 보았다. 화려한 드레스부터 단정하고 깔끔한 드레스까지, 인형 놀이 같았다. 이 경험해 본 적 있다. 결혼하기 전에 웨딩드레스 맞출 때 딱 이 꼴이었다.
제 눈에는 다 다른데 다 똑같다며 심드렁하게 말하던 전 남편. 얼마 못 가서 졸기까지 했다.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머리털을 다 뽑아놨어야 했는데. 그래도 그때보다 나은 건 데이비드가 찻물을 들이켜며 열정적으로 드레스에 대해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은 옷은 고개를 흔들었고 곱게 어우러지는 옷을 보면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은 좋았다. 동생을 끌고 웨딩드레스 맞춰 입는 기분이었지만 꽤 나쁘지 않았다. 딸도 옷 참 잘 골라줬는데.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하나 몸에 맞춰 보며 이게 낫다고 하던 딸.
만날 수 있다. 다시 보게 된다면 같이 쇼핑을 하러 가자. 허리 라인을 가볍게 감싸는 마지막 드레스를 입고 나오니 데이비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인가 보다. 벨리타도 데이비드를 따라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같이 골라야 좋다.
옷도 다 골랐겠다, 계산을 하려니 데이비드가 이미 계산을 끝내놓았다. 놀란 기색으로 왜 네가 계산했냐고 물으니 데이비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냥 돈 낭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돈 낭비를 왜 나한테 하냐고.”
“잔말 말고 그냥 받으십시오.”
아, 이 자식 부끄럼쟁이구나. 괜히 툴툴대는 거다. 벨리타는 은은하게 웃었다. 뭐 이딴 녀석이 다 있담. 거 뒈지게 귀엽네. 옷을 챙기려고 하니 옷이 없었다. 미어캣처럼 주위를 둘러보는 멍청한 표정의 벨리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점원도, 데이비드도.
넓은 살롱 내부를 돌아다니며 옷을 찾던 벨리타에게 데이비드가 빠르게 다가가 창피하게 대체 뭐 하는 거냐, 속삭였다. 벨리타는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데이비드를 올려다봤다.
“옷이 없어. 어디 갔어?”
“무슨 소리십니까. 집으로 옵니다.”
몰랐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던 벨리타가 냉큼 다른 곳도 둘러보자며 데이비드를 끌고 갔다. 또 오시라는 종업원의 깍듯한 인사를 뒤로하고 골목을 누볐다. 노점상에 있는 간식도 사 먹고 싸구려 장신구도 착용해 보며 답지 않게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돈독한 남매 사이로 보였다. 벨리타는 무척 들떴다. 데이비드도 아닌 척하지만 굉장히 들떠 있었다. 지나치며 하나씩 사 먹은 노점상의 간식거리들은 꽤 벨리타의 입맛에 맞았다. 자극적이고 짠맛이 익숙했다. 데이비드가 참 잘도 먹는다고 어이없어했지만 막상 그도 벨리타가 입에 넣어주면 잘 받아먹었다.
이번에는 꼬치였다. 길거리에서 곧잘 팔았던 닭 꼬치 같은 모양새. 당연하게도 벨리타는 지나칠 수 없었다.
“배부르지도 않습니까?”
“딱 한 입만 먹을게. 나머지 다 너 먹어.”
“저도 배부릅니다만.”
가볍게 무시했다. 따끈한 꼬치를 베어 물었다. 딱 길거리에서 먹었던 맛이었다. 한 입만 먹겠다고 해놓고선 세 입을 먹은 벨리타가 그만 먹겠다고 칭얼대는 데이비드의 입에 꼬치를 쑤셔 넣었다. 데이비드의 입이 다물어졌다. 입 다무니까 얼마나 좋은가.
“맛있지?”
“……나름, 대로요.”
그렇지? 벨리타가 웃었다. 살갑게 웃는 얼굴이 화사하다. 데이비드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웃을 수 있던 사람이었던가.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시간이 길었고 가까웠던 사이도 아니었지만 기억 속 벨리타는 예민하고 가시 돋친 사람이었다.
다정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고 조잘조잘 쉼 없이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벨리타는 다 먹은 꼬치 막대를 반으로 분지르며 쓰레기통에 쏙 넣은 뒤 데이비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들떠 있는 누님. 본 적 없는 말간 얼굴과 종종거리는 가벼운 발걸음.
데이비드는 문득 생각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밝고 쾌활한 심성이 어린 시절에는 드러나지 못했을 뿐, 타고나길 살가운 사람이지 않을까. 작고 여린 손이 단단한 팔뚝을 다시금 잡아끌자 데이비드는 못 이기는 척 벨리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조금쯤은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다.
*
가득 찬 배를 문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간식으로 이미 위장을 빵빵하게 채운 둘이었다. 벨리타와 데이비드는 주방장이 열심히 준비한 식사의 향을 맡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주방장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배도 부르고 하도 거리를 싸돌아다녀 다리도 아픈 둘은 각자의 방에 늘어졌다. 침대와 한 몸이 된 벨리타를 한참 기다렸던 엘라가 꼬리라도 흔드는 듯 주위를 알짱거렸다.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다가 시선에 못 이겨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잘 놀다 오셨어요?”
“응, 재밌더라. 길거리 음식도 맛있고.”
“아가씨 몸도 안 좋으신데 그런 거 드시면 어떡해요.”
“맛있으면 장땡이지 뭐. 건강한 건 매일 먹잖아.”
그래도 몸 생각해서 적당히 먹으라고 엘라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잔소리를 하던 입장에서 듣는 입장이 되니 역시 듣기 싫다. 벨리타가 엘라의 말을 끊고 다른 대화 소재를 꺼냈다. 드레스가 예뻤다 어쨌다, 엘라는 언제나 벨리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엘라는 벨리타가 하는 말이면 다 좋았으니까. 조잘거리는 벨리타의 수도 관광 후기는 밤이 되어서야 멈췄다. 피곤하니 일찍 자야겠다며 벨리타는 잘 준비까지 순식간에 마쳤다. 엘라를 내보내고 방에 혼자 남은 벨리타는 일기까지 잘 적었다. 하루도 밀리지 않았다.
그 김에 테일러에게서 온 편지도 확인했다. 초대장이랑 같이 왔었다. 파티 초대장에 정신 팔려서 못 읽었을 뿐이다.
[파티 나가서 또 아프면 어떡할 거냐. 무리하지 마라.]
장황하게 온 편지였지만 요약하면 그랬다. 아파도 나가야지. 벨리타가 다시 편지지를 정갈하게 접어 협탁에 올려두었다. 걱정이 무색하게 우울의 정점을 찍어서 난장판을 피웠던 그 날을 제외하면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일기장을 협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놓고 침대에 드러누우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곤 없는데 누구인가 싶어 비척이며 걸어 나가 직접 문까지 가서 열어줬다.
“한잔합시다.”
데이비드였다. 와인과 잔까지 두 개 챙겨서 왔다. 벨리타는 냉큼 옳다구나 데이비드를 들였으나 이내 정신이 들었다. 미성년자 아니야? 벨리타도 데이비드도 미성년자였다. 물론 벨리타는 내년에 열아홉이 되어 나름 성년이 되지만 데이비드는 한참 멀었다.
데이비드는 성큼성큼 걸어 작은 테이블에 와인 코르크를 능숙하게 땄다. 저 새끼 분명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다. 괘씸해서 벨리타가 등짝을 한 번 후려쳤다. 그렇게 안 봤는데 발랑 까졌다. 의문의 등짝을 맞은 데이비드가 테이블에 와인을 내려놓았다.
또 손이 안 닿는 곳에 때렸다. 등을 문지르는 데이비드가 원망과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벨리타를 쏘아보았다. 벨리타가 눈 똑바로 안 뜨냐며 한 대 더 때렸다. 따끔한 고통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작게 소리친다.
“왜 때리십니까!”
“이거 발랑 까져가지고. 어?”
“좋다고 문 열어주셨잖습니까!”
그건 그렇다. 친구들과 틈나면 술을 들이켰는데 반년이나 금주를 했으니 반길 수밖에 없었다. 알코올이 그리웠다. 하지만 몸은 미성년인데 마셔도 되려나. 잠시 고민했다가 기가 막히게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벨리타의 속은 성인이었다. 자신은 어른이고 데이비드는 미성년이지만 어른과 함께 마시면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다.
어른이 한 잔 주는 건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완벽한 정신승리였다. 벨리타가 언제 등짝을 후려쳤냐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와인을 들고 잔에 따랐다. 데이비드의 잔에도 따르려다가 데이비드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어서.
“뭐해. 잔 안 받아?”
보아하니 어른이랑 마셔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러면 나중에 욕먹는다. 같이 마시는 김에 술자리 예의를 좀 알려줘야겠다 싶었다.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손에 잔을 쥐여 주고 조잘거렸다. 두 손으로 받아야 한다, 어려운 어른이 주는 잔이면 고개도 숙여야 한다.
데이비드는 몰아치는 말에 얼떨결에 맞추어 시키는 대로 굴었다. 제법 깍듯해진 데이비드를 뿌듯하게 지켜본 벨리타가 그제야 잔을 들었다. 이제 어디 가서 욕먹지는 않겠구나. 붉은 와인이 투명한 잔 안에서 찰랑거린다. 아쉽다. 소주가 먹고 싶었다.
쏘맥 기막히게 말 수 있는데. 와인은 자주 접하지 못했던 터라 익숙한 맥주와 소주가 그리웠다. 허공에 잔을 내밀자 데이비드가 뭐 하느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짠해야지, 짠. 몰라? 벨리타의 구박에 못 이겨 쭈뼛대며 잔을 내밀었다.
잔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거지. 이 소리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 벨리타가 먼저 한 입 와인을 머금자 데이비드는 눈치를 살피며 따라 마셨다. 그리운 알코올이었다. 신나서 술을 들이켜던 벨리타가 잔이 비어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웬 술이야? 할 얘기 있어?”
며칠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자고 찾아오는 법이다. 진지한 이야기겠지.
늦은 밤에 술 마시자고 찾아오는 사람 중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는 사람은 잘 없다. 술꾼이나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닌 이상. 벨리타는 의자를 고쳐 앉고 팔짱을 꼈다. 데이비드가 말을 하면 들어줄 요량이었다. 오늘 낮에 고생시켰으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핵심을 찌른 말은 데이비드를 당황시켰다. 할 얘기가 있어 찾아온 게 맞았다. 진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술과 함께 이야기를 한다면 더 수월하게 속내를 토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온 거다.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가 와인을 홧김에 들이켜 잔을 비웠다.
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고 쓴맛과 알코올에 짧게 몸부림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난리 치던 때에 비해 빠른 타이밍이었다.
“누님 미치신 거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