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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2화 (22/150)
  • 22화.

    두근두근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니 벨리타도 친구 아들 대하듯 하게 된다.

    “그래서 타린이 보기에는 어때 보여요? 나 좋은 사람 같아요?”

    “네. 제가 보기에도 무척 좋은 분이세요. 친해지고 싶을 정도인걸요.”

    “그럼 친해지면 되죠. 편하게 불러요. 말도 놓자, 괜찮지?”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말도 놓고 이름으로 부르자고 한다. 타린은 빠른 진도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타린이 거듭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른스럽고 상냥하다. 벨리타는 딱 타린이 찾던 이상형이었다. 벨리타의 손이 닿는 팔에 화상이라도 입는 듯 열이 올랐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이 벨리타와 엮으려는 것도 내심 기대했었다. 파티에 함께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도 했다. 벨리타가 보이지 않는 철벽을 쳐버리는 바람에 서러워졌지만. 이렇게 함께 산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타린은 백작 부인에게 며칠 내내 시달리며 벨리타의 칭찬을 들어왔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하는 중에 만나버렸다. 얼굴을 보고, 미소를 보았을 때 타린은 부정했다.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신 건 거짓말이에요.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다정하잖아요. 천사잖아요. 제대로 대화도 못 했는데 다음 날 떠난다는 말이 무척 서글펐지만 책을 읽는 중, 창문 너머로 벨리타를 보고 그대로 뛰쳐나왔다.

    이때가 아니면 대화도 못 하고 보내야 한다는 초조함 덕이었다. 연인 사이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친구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타린은 지금 몹시도 행복해서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다. 말도 놓고 이름으로 부른다! 가슴께가 쿵쿵 뛰었다. 친구라도 좋다. 기뻤다.

    “많이 춥다, 그치?”

    “네? 아, 응……! 그렇지?”

    “들어가자. 너도 얼굴 엄청 빨개졌어.”

    추워서 그런 거 아닌데. 라고는 말 못 했다. 타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가 타린의 팔을 끌었다. 어른스럽고 상냥한데 리드하는 여자, 최고다. 타린은 입술을 꽉 물었다. 질질 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온 타린은 벨리타를 보내주기 싫어 비에 맞은 강아지처럼 내려다보았다.

    보내줘야겠지. 친구라도 했으니까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지. 타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벨리타의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벨리타도 군말 없이 배웅을 받았다. 문을 앞에 두고 둘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침에 같이 식사하자.”

    “그래, 들어가.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여기서 더 크면 천장 뚫을 것 같은데?”

    “그럼 더 크면 안 되지.”

    밤이라 크게 웃지도 못하고 키득거렸다. 더 있고 싶어 하는 타린의 등을 떠밀어 보내버리고 벨리타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 손과 다리가 얼얼해서 코트를 벗자마자 홀라당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따끈따끈 폭신폭신. 몸을 움직이니 잠도 잘 온다. 딸내미가 이럴 때 뭐라고 하던데. 아. 꿀잠.

    *

    단란하게 다 같이 모여 아침까지 해결했다. 백작 부인은 김치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벨리타는 드디어 같이 김치를 먹어줄 사람이 생겨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총각김치 담그면 갖다 줘야지. 나눠 먹으면 더 맛있다. 나누면 그만큼 돌아오는 법이기도 하니까.

    디저트까지 잘 챙겨 먹고 갈 준비를 마쳤다. 백작 부인과 타린이 마차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마차에 올라서기 전에 벨리타의 손을 꼬옥 잡고 다정하게 종알거렸다. 벨리타도 백작 부인과 헤어짐이 아쉬워 내치지 않고 같이 조잘거렸다.

    “또 놀러 와요. 그때는 일주일 있어도 되니까.”

    “백작 부인께서 영식과 엮지 않으시면요.”

    “그치만 나도 벨리타 영애 같은 딸 있으면 소원이 없겠는걸.”

    “굳이 결혼 아니어도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우리 친구 아니었어요?”

    넉살 좋은 벨리타의 말에 감동의 파도가 물결쳤다. 친구가 생기는 건 기쁜 일이다. 백작 부인은 벨리타를 힘주어 끌어안고 여린 등을 토닥였다.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뒤에서 타린이 상처받은 얼굴로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백작 부인만 보고 있어서 알지 못했다.

    “맞아요,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럼 벨리타 영애, 다음에 만날 땐 로엘린이라고 불러줘요.”

    “그럴게요. 로엘린.”

    로엘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딸 같은 살가운 아이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둘이 이야기의 꽃을 피우기 무섭게 엘라가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만하고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벨리타와 로엘린은 드러내고 아쉬운 티를 냈지만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작별의 인사를 했다.

    “잘 가, 벨리타. 또 만나자.”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자 타린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고백도 못 해 보고 엄마 앞에서 차여 버린 타린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살갑게 웃었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 아이가. 친구! 타린은 친구로도 만족했다.

    손을 흔드는 타린에게 벨리타도 손을 흔들어주고 마차에 탔다.

    로엘린과 타린은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드높은 철문을 벗어나 곱게 정돈된 흙길을 내달렸다. 작은 샤를로트 영지는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엘라가 벨리타의 코트를 곱게 개어 놓으며 물었다.

    “아가씨, 다른 영애 분들과는 친구 안 하시면서 왜 백작 부인님과 친구 하셔요? 샤를로트 영식분과는 또 언제 친해졌고요.”

    “음…… 말이 잘 통해서.”

    왜냐고 물어보려다가 다시 기억을 회상했다. 그냥 물어보면 낮잠 자고 싶은데 귀찮게 한다고 대충 대답해 줄 게 뻔했다. 엘라는 끙,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알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벨리타가 티파티에서 골골댈 때면 부인들이 챙겨줬었다. 정확히는 사용인들에게 지시하고 말만 걸었을 뿐이지만.

    그래서 그렇게 어른들과 친하게 지내는구나 싶었다. 타린과는 왜 친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엘라가 깨달은 얼굴을 하니 벨리타도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벨리타는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로엘린과 타린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사람이고 정이 가지만 참았다.

    친구 좋다. 대화도 잘 맞고 재미있지만 마음을 주면 벨리타만 힘들었다. 현실로 돌아가서도 정이 남아 그리워할 거고 잊지 못해 괴로워하겠지. 그러니 딱 소문을 듣는 용도로 두는 것이 좋았다. 정보가 있어야 행동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진다.

    벨리타는 누구에게든 마음은 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차는 쉼 없이 달렸고, 수도로 가는 길은 길지 않았다.

    정말 눈을 감았다 뜨니 타운하우스였다. 잠을 좀 자긴 했지만 숙면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금방 도착한 거다. 아무튼 그랬다. 벨리타는 영지의 저택만큼은 아니지만 꽤 잘 지어진 저택을 보며 감탄했다.

    정원도 있었고 방도 여럿이었다. 살던 아파트와 비교를 해 보았자 우습지만 저택은 벨리타의 기준에서 으리으리했다. 오래 머무를 생각으로 온 터라 짐 정리는 꽤 오래 걸렸다. 물론 벨리타는 침대에 드러누워 빈둥댔고 집 구경이나 했다.

    반년쯤 되니 시종들이 해주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벨리타가 나서서 짐을 옮기고 정리했었지만 이젠 그냥 놀았다. 노는 게 제일 좋다. 거의 안경 쓴 펭귄 녀석이었다. 테일러가 보내 줄 초대장을 받고 파티에 가 황태자를 자빠트릴 생각을 하며 그전까지 신명 나게 놀 궁리를 했다.

    3일간 벨리타는 놀았다. 이렇게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야무지게 놀았다. 정원의 화단에 물을 주고 수도 끝을 짧게 둘러싼 산을 올랐다. 몸이 어리니 등산을 해서 지치더라도 회복이 빨랐다. 작은 산의 정상에서 팔을 흔들며 손뼉을 앞뒤로 치고 내려오는 길에 쑥도 뜯었다.

    찹쌀을 구해 쑥떡도 해 먹었다. 찹쌀이 잘 나지도 않고 평민들도 드문드문 먹는 편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구했다. 후작의 작은 주인으로서 못할 건 없었다. 대충 알고 있는 요리법을 주방장들에게 알려주면 찰떡같이 만들어 왔다. 혹시 천재가 아닐까.

    쑥떡을 응접실에 늘어져 앉아 씹어 먹고 있는데 파텔 영지로 보냈던 시종과, 파티 초대장과, 데이비드가 함께 돌아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빨리 오면 안 됩니까?”

    “어. 안 돼.”

    “진짜 사람 화나게 하지 마십쇼.”

    동생은 더 뺀질거리는 태도로 변해 있었다. 싹바가지 없는 넘. 벨리타의 왼손에 잠들어 있는 사랑의 매가 울부짖었다.

    수도 저택이 익숙해지기까지 이틀 넘게 걸렸던 벨리타에 비해 데이비드는 익숙하게 저택을 활보했다. 남은 쑥떡을 보고 이게 뭐냐고 하는 데이비드에게 이건 먹어도 된다고 먹였다. 역시 맛있게 주워 먹었다.

    응접실에 앉아 쑥떡을 볼 가득 채워 먹는 데이비드를 옆에 두고 벨리타는 파티 초대장을 확인했다. 파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3일. 이 안에 세계 제일 미녀가 되어야 한다. 원래 남자 주인공이 반하는 장면은 여자 주인공이 가장 예쁠 때였다. 황태자를 침대에 골인시켜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면 끝이다. 정말 끝.

    황태자비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으면 황제의 목을 베게 해서라도 황위에 올려서 황후 되면 끝날 것 같다. 원래 만화나 소설 속에 권력자는 툭하면 죽는다. 다음 페이지 넘기면 죽어 있고 그랬다.

    햄스터처럼 입 안 가득 떡을 밀어 넣은 데이비드를 붙잡고 벨리타가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우리 쇼핑갈까?”

    “왜 그러십니까. 미쳤습니까? 아, 미치셨지.”

    “야, 너 등짝 대. 너 이 새끼.”

    넓은 등짝이 불에 탄 듯 뜨거웠다. 야만적인 사람. 데이비드는 주저앉은 채 닿지 않는 등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려 애썼다. 그러건 말건 벨리타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날씨도 죽여주고. 해도 쨍쨍하니 지금 나가서 꼬까옷 사고 오면 딱이었다.

    벨리타는 두꺼운 털 코트를 챙겨 입고는 좀 쉬고 싶다고 칭얼대는 데이비드를 끌고 번화가로 나갔다.

    제발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엘라를 버려두고 도착한 수도의 번화가는 딱 서울의 한복판 같았다. 높은 빌딩과 인도를 누비는 오토바이 같은 게 없을 뿐, 사람은 복작거렸고 가게가 즐비해 있었다. 벨리타는 광장을 돌아보았다. 화려하다. 감흥도 없어 보이는 데이비드를 이끌고 쫄랑쫄랑 돌아다녔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래, 옷을 사거나 꾸미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는 것보다 구경하고 싶었던 거였다. 여태껏 벨리타가 다녔던 가게들은 영지 내의 시장통과 비슷한 가게들뿐이었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이곳을 보라. 3층짜리 건물들이다. 좋은 건물은 4층도 있었다. 화려하고 반짝거린다. 이 곳에서 장사를 한다면 분명 잘될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데이비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긴 치마가 너풀거렸다.

    “우선 옷부터 골라볼까?”

    “그러시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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