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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1화 (21/150)

21화.

백작 부인과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응접실에서 떠들 이야기라기엔 남에 관한 구설수인지라 자리를 옮겼다. 백작 부인의 개인 방으로 도착하니 티 세트가 테이블에 놓이고 사용인들은 전부 물러났다. 오롯이 백작 부인과 벨리타만 남은 공간이었다.

벨리타와 백작 부인은 입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수도에서 행정 귀족이 첩을 새로 들였다더라, 어느 집 디저트가 맛이 좋다더라, 등등. 사교계에 오래 자리했던 백작 부인은 입을 열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냈다.

너무 재밌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귀족이 길 한복판에서 머리채가 잡혔다더라, 황실 복도에서 뺨을 왕복으로 처맞았다더라, 하는 소문은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떠들고 보니 해가 뉘엿 저물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사용인이 똑똑, 노크하자 백작 부인이 화답했다. 문을 반쯤 연 멀끔한 행색의 집사가 식사 시간이 되었으니 식사하러 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백작 부인은 벨리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백작 부인은 벨리타가 가져온 김치도 함께 내오라고 했고 사용인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식사는 맛있었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먹는 식사는 어색했지만 좋았다. 샤를로트 백작가의 장남인 타린 Q. 샤를로트도 벨리타의 눈치를 봤지만 식사는 잘 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벨리타가 가져온 김치를 먹고 콧물을 흘렸다. 안 맵게 했는데도 흘렸다.

화목한 가족인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좋겠네. 벨리타는 김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식사를 잘 끝낸 후 디저트까지 챙겨 먹었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웃으며 정겹게 떠들었다. 벨리타는 그 사이에 섞일 수 없어 조용히 차를 마셨다. 한평생 차라곤 녹차 티백뿐이었는데, 이 세계에 와서 온갖 차란 차는 다 마시는 것 같았다.

타린이 벨리타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을 건넸다. 혼자 가만히 있는 벨리타가 눈에 밟힌 모양이었다. 벨리타는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파텔 영애, 오늘 하루 즐거우셨나요?”

“그럼요. 백작 부인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셨는데요. 즐거웠어요. 그렇죠?”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백작 부인에게 말을 걸자, 백작 부인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웠다는 대답은 백작 부인도, 타린도, 백작도 기쁘게 했다. 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늘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 또한 밝아지는 기분이다.

벨리타의 말문이 트이자 백작도 말을 꺼냈다.

“얼마나 계실 예정입니까? 오래 있으셔도 저희는 환영입니다.”

빨리 돌아가라는 뉘앙스의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붙잡아두고 싶은 반응이었다. 벨리타는 허허 웃으며 내일 즈음에는 수도 저택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백작 부인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대놓고 아쉬워했다.

“조금 더 있어요. 나도 딸 생긴 기분이라 엄청 좋단 말이에요.”

“아들 여기 있습니다만.”

“벨리타 영애. 그럼 혹시 곧 황실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시나요?”

타린의 말을 곱게 씹어 드신 백작 부인이 벨리타에게 매달렸다. 벨리타는 듣도 보도 못한 황실 파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몰래 언제 그런 걸 연대. 조슈아의 손을 고칠 방법을 찾아 왔는데 황태자랑 만날 기회까지 잡아버렸다.

나 아니면 대체 누가 가. 내가 가야지. 벨리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백작 부인은 자신의 아들과 벨리타를 엮으려고 했다. 귀찮지만 저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같이 갈 파트너가 없다면, 타린과 함께하는 건 어때요?”

“전 제 동생과 가려고요.”

“예? 데이비드 파텔 영식이요?”

타린이 벨리타와 엮이는 게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내 벨리타의 말에 온 가족이 놀라서 차를 마시다가 멈추어 벨리타를 바라봤다. 시선이 쏠리는 게 웃겼다.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벨리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태연한 태도로 마저 차를 들이켰다.

백작 부인은 정말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어렵게 구한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박살 나지 않도록 테이블에 예쁘게 올려둔 백작 부인이 흥미 가득한 얼굴을 했다. 어쩌다가 동생이랑 같이 가게 되었냐고. 둘이 사이 나쁘지 않았냐고. 묻지 않아도 얼굴에 쓰여 있었다.

“동생이랑 친해졌거든요.”

“잘되었네요. 정말요. 그럼 우리 황궁에서 만나면 되겠어요!”

파티에 오나 보다. 벨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면 좋지. 아는 사람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는데. 조슈아의 파티에서는 아는 사람이라곤 없어서 꽤 진땀도 뺐었다. 백작 부인이랑 수다도 떨고 황태자도 코 꿰고. 얼마나 좋은가.

파티의 날짜가 언제인지 전해 들은 뒤, 대강 자리를 파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급히 편지를 써 엘라에게 건넸다. 얼떨떨하게 편지를 받아 들은 엘라가 뭐길래 그리 급하느냐 묻자 벨리타가 시간이 없다는 듯 소리쳤다.

“빨리 아버지에게 보내! 시간 없으니까!”

혼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엘라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달려 나가 사용인에게 편지를 전했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 후작님에게 전하라고 하니 사용인도 발등에 불 떨어진 양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마 새벽이나 낮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편지이기에 저리 급하신가 다시 돌아와 물어보니 벨리타는 침대에 늘어져 대답했다. 너무도 편하게 널브러져 있어서 이불인 줄 알았다.

“파티 가려면 초대장 있어야 된대. 가족들 있는 영지로 초대장이 갈 거 아냐. 그거 내놓으라고 편지 쓴 거야.”

“아가씨, 파티 싫어하지 않으셨어요?”

“뭔 소리야. 아파서 싫은 거지, 노는 거 좋아해.”

엘라는 벨리타를 모셨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을 때 티파티에 갔다가 얼마 못 가서 골골대며 돌아왔었다. 싫어했다면 아예 가지를 않았을 텐데.

엘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는 이제 귀찮으니 나가라고 손짓했고 엘라는 야박하게 이러지 마시라며 치근덕대다 등짝 맞고 쫓겨났다.

벨리타가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가, 도통 잠이 들지 않아 털 코트를 껴입고 정원으로 나왔다. 밤은 무척 춥다. 콧김으로도 하얗게 언다. 용가리 같은데. 콧김으로 흥, 흥, 연기를 뿜어내자 먼발치에서 풉, 웃음소리가 났다. 벨리타가 민망함에 손바닥으로 하관을 가렸다.

“샤를로트 백작 영식.”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타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콧김으로 용가리 흉내를 냈다가 비웃은 사람은 다름 아닌 타린이었다. 야밤에 무슨 일인가, 벨리타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타린도 벨리타를 향해 다가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마주친다. 타린이 손을 뻗어 벨리타의 코트를 거듭 여며 준다.

“몸도 약하시잖아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셔야죠.”

옅은 갈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하얗고 곱상한 생김새를 가만히 바라보던 벨리타가 시선을 내렸다. 코트의 단추를 다 끼워주는 손가락이 섬섬옥수였다. 얼굴 보니 백작 부인을 빼다 박았다. 벨리타가 미소를 지으며 엉성하게 둘러져 있는 목도리를 제대로 둘러주었다.

“목도리나 잘 매시지.”

“저, 저는 별로 안 추워서요.”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숨소리가 들릴까 호흡마저 죽인 타린이 벨리타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 달빛 아래에서 저물어버린 꽃들에 둘러싸인 채 마주 보는 꼴이 꽤 살갑다.

고리를 만들어 그 안에 끄트머리를 꿰어 넣은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불쑥, 타린의 팔이 내밀어졌다.

“산책하려고 나오셨다면 에스코트……해드려도 될까요?”

호오. 맹랑한지고. 벨리타가 타린의 팔뚝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가 웃으며 팔뚝에 손을 얹었다. 식사 때부터 눈치를 그리 보더니, 벨리타에게 호감이 있어서였나 보다. 역시 여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다. 숨만 쉬어도 홀려댄다. 구미호도 한 수 접고 가르침을 달라고 매달릴 정도다.

굽어진 팔에 손을 얹은 채 마른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남자와 단둘이 야밤에 산책을 한다는 건 중년의 벨리타여도 꽤 설레는 일이다. 고요하고 달은 아름다웠으며 발을 딛는 순간마다 사부작, 마른 풀잎들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간질간질, 기분이 묘해져서 괜히 팔에 얹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서 더 간지러웠다. 오롯이 상대에게만 집중되는 감각이 살랑거린다. 꼼지락대는 손을 움켜쥔 타린이 자신의 팔짱을 낄 수 있게 자세를 고쳤다. 더 낯간지러웠다. 타린의 팔 사이에 낀 손이 두꺼운 코트 소매를 쥐었다. 추워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새빨갛다.

“어머니께 많이 이야기 들었어요.”

“아, 정말요?”

아, 정말요, 는 얼어 죽을. 이렇게 달짝지근한 분위기는 너무 오랜만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벨리타는 타린을 올려다보았다. 오밀조밀, 귀엽게도 생겼다. 푸른 눈도 반짝거려 예쁘게 세공된 구슬 같았다. 긴 속눈썹, 처진 눈. 백작 부인이 왜 자신과 결혼시키려는지 모를 정도의 외모였다.

이렇게 곱게 생겼으면 좋아할 여자도 많을 텐데. 아……. 혹시 불능……인가? 아랫도리가 기능을……? 그 정도의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면 더 좋고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 터였다. 괜히 백작 부인이 자신에게 곱게 키운 아들을 들이밀 리 없다. 간질거리던 가슴께가 차게 식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고자는 못 참았다. 작은 것도 못 참는다. 벨리타가 나름 타당하게 제멋대로 생각하고 낸 결론으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벨리타의 속을 모르는 타린은 졸지에 아랫도리에 문제 있는 남자로 낙인찍혔다. 타린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티 없이 말간 얼굴이었다.

“착하고 재미있고, 사랑스럽다고요. 더 많이 하셨지만 어머니께서 아시면 부끄러워하실 테니 이 정도만 말해드릴게요.”

“저도 샤를로트 부인 정말 좋아해요.”

“좋아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머니께서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티가 나는 법이다. 얼굴에 어둠이 없고 말투에서도, 행동에서도 자신이 받아왔던 애정을 베풀려는 온기가 난다. 잘 컸다. 백작과 백작 부인이 참 잘 키웠다. 다 잘 자랐는데 아랫도리만…….

벨리타가 연민을 담은 시선을 보내자 타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어머니께서 몇 번이고 이야기해 주셔서 저도 알고 싶었거든요. 파텔 영애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요.”

말도 예쁘게 하고, 배려와 매너도 넘친다. 신랑감으로는 백 점 만점인데, 왜 부인은 자신에게 보내려고 할까. 역시, 정말로……. 안 보이는 곳이……. 그곳이……. 살가운 타린의 말에 벨리타는 허허 웃었다. 안쓰러워서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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