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지 말아주세요. 벨리타는 목 끝까지 차오른 시비를 꾹 참아냈다. 물론 벨리타도 애정 넘치는 백작 부인이 시어머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중매 결혼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기도 했으니까.
벨리타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허허 웃기만 했다. 여기서 말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코 꿰여서 선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해도 우리 아들 한번 만나 봐라, 로 끝나서 얼떨결에 같이 식사하고 차 마시다가 반지 나눠 끼고 그대로 결혼식장으로 레드카펫 밟고 들어가게 될 거다.
절대 싫다. 섣부른 결혼도 싫다. 벨리타는 백작 부인이 정신 차리기 전에 서둘러 대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신관을 만나 보고 싶어요. 치료해 주었다는 그 신관이요.”
“벨리타 영애의 몸이 아직도 좋지 못한가요?”
틈도 주지 않고 본론으로 다시 넘어갔다. 신관이 다시 거론되자 백작 부인은 자신의 입을 가렸다.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걱정이 담긴 말과 눈빛에 벨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몸이 안 좋기는 하지만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요. 가는 김에 제 몸 상태에 대해서도 묻고 싶기도 하고요.”
“어머……. 치료가 필요하다면…… 누구일까요?”
벨리타 주변에서 신관의 신력이 필요할 정도로 아픈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백작 부인은 흥미로운 듯 벨리타 쪽으로 당겨 앉았다. 가십에 죽고 가십에 사는 백작 부인이었다. 하기야 그 나이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라곤 수다 떠는 게 전부이니까.
정치를 할 수 있나, 장사를 하나. 사교계밖에 없었다. 후작 영애가 직접 나서서 신관을 찾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 궁금하다. 알게 된다면 사교계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정보다. 백작 부인은 눈을 빛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벨리타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소문에 대해 떠드는 건 좋아하지만 그 주제가 자신이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비밀이라고 손가락을 꼭꼭 걸어 약속을 한다고 해도 얼마 못 가 다 퍼져버릴 비밀인 걸 안다.
“새로 사귄 친구인데, 그 친구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아요.”
“세상에.”
“그 친구한테는 중요한 일이라. 신관, 알려주실 수 있죠?”
목소리를 낮추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에 이야기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태도였다.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중요한 일이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 거다. 백작 부인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벨리타를 따라 마른침을 삼키고 진지한 반응을 취했다.
“영애가 부탁하는 건데, 말해줘야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
백작 부인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아 오리처럼 내밀었다. 귀엽기는. 백작 부인은 몇 있지도 않은 사용인들을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몸을 일으켜 벨리타의 귀에 속삭였다. 신관에 대한 정보가 뭐가 그리 비밀스럽다고. 귓가에 닿는 간지러운 숨과 목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브루노 지역에 있는 베르, 라는 신관. 대사제보다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근데 그걸 이렇게 가까이서, 남사스럽게 귓속말까지 해가면서 알려줄 일인가. 신관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직업도 아닌데. 의아하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설마 비밀이랬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냐고.
귓속말을 끝낸 백작 부인이 자연스럽게 벨리타의 옆에 앉았다. 헤실거리며 웃는 백작 부인이 조금 부담스러워 눈만 멀뚱히 뜨고 있자 백작 부인이 벨리타의 손을 슬쩍 잡아 손등을 토닥인다. 애정이 넘치는 손길이었다. 그래서 뿌리칠 수도 없었다.
“볼수록 아깝단 말이에요. 벨리타 영애, 결혼할 사람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랑 해요.”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어요.”
“지금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아중에, 정 결혼할 사람이 없으면요.”
부인의 눈빛이 청혼이라도 하는 양 열렬해서 시선을 피했다. 정치적 수단도 있겠지만 정말 벨리타가 마음에 쏙 들어서 하는 말인지라 벨리타는 더욱 부담스러웠다. 한 게 뭐 있다고 자신을 이렇게 좋아하는가. 벨리타는 이번에도 정신없이 대화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에 대한 소문이 썩 별로더라고요.”
“벨리타 영애는 모르시나요?”
사교계에서 한 입담 하는 백작 부인이 눈을 번뜩였다. 흥미 가득한 이야기인지라 며느리 해라, 라는 생각이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자신이 아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떠드는 건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참기 힘든 일이다. 벨리타는 이 김에 황태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이 아는 만큼 황태자에 대한 소문들, 사실들을 탈탈 털어다가 홀려 먹을 때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쁜 생각인 걸 알지만 조슈아만큼이나 황태자도 불우했으니 오지랖 좀 부려주면 넘어오지 않을까 싶었다.
조슈아에게 했듯이 입안의 혀처럼 달고 따뜻한 말을 속삭이고 온기를 나누어 준다면 동생처럼, 조슈아처럼 자신에게로 울면서 뛰어올 것 같았다. 그래, 쉽게 본 게 맞다. 여태까지의 캐릭터들이 손쉽게 벨리타에게 넘어오니 쉬워 보였다. 그리고 생각만큼 간단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단 것을 찾기 마련이고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달콤함을 경험하면 계속해서 찾게 되리란 걸 벨리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독될 만큼 퍼부어 주면 당연히, 으레 그렇듯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 생각했다. 원래 소녀만화 주인공들은 다 그러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소녀만화 여자 주인공은 입으로 똥을 싸도 남자 주인공이 반하는 법이다. 그런 탓에 벨리타는 무척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럴 테고. 그래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뭐라도 알아가야 더 손쉽게 손안에서 휘두를 수 있음을 알았다. 사실 딸이 만든 남자 주인공이 궁금한 것도 있었다. 벨리타는 흥미 없는 척, 그저 가십거리를 다루는 태도로 백작 부인에게서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를 채근했다.
“황태자가 전쟁에서 돌아오고 나서, 황궁에 계속 피바람이 분대요.”
“아이고, 그거 큰일 아니에요?”
“당연히 큰일이죠. 그거뿐만이 아니에요.”
백작 부인은 주위를 살핀 뒤,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신관을 비밀스럽게 이야기할 때는 왜 그러나 싶었지만 이 이야기는 황실 모독죄로 목이 잘릴지도 몰라서 그러려니 했다. 귓가가 간지럽다.
“황태자가 전쟁 나간 사이에 2황자가 엎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네요. 황후가 2황자만 싸고도니까 귀족들도 슬슬 눈치 보고 있는 중이고요. 지금이 딱 줄 잘 설 타이밍이잖아요.”
“황태자가 폐태자 될지도 모른다는 그 소문인가요?”
“맞아요. 그래서 슬슬 간 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황태자가 옛날에 자기 손으로 전 황후도 죽여 버렸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다들 아니꼽게 보고 있는데 전쟁에서 승전하고 오니 더욱 기세등등해져선…….”
“그럼 2황자가 조금만 나서도 다들 도와주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벨리타 영애도 줄 잘 서야 할 거예요. 서로 사이가 안 좋으니 누구 하나가 황제가 되면 우리야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황태자가 황제가 될 것이다. 소녀만화는 그랬다. 2황자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고 여자 주인공이랑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았답니다, 할 거다. 줄을 설 게 뭐가 있나. 그냥 황태자만 죽어라 꼬시고 자빠뜨리면 된다.
목이 날아간다면 2황자일 거고 벨리타는 그냥 연애질만 잘하면 되는 일이다. 벨리타는 대화 중에 무언가 놓쳤다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뭘까.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허벅지에 톡, 톡 두드리다 퍼뜩,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황후를 죽였다고요?”
남자 주인공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다. 불행한 과거라든지, 불행한 과거라든지, 불행한 과거 말이다. 여자 주인공이 포용해 주어야만 하는 그 불행한 과거. 알아두면 편하게 지지고 볶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아챘다.
요즘 소녀만화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벨리타 나이대의 만화들은 그랬다. 목숨 귀한 줄 몰랐다. 다음 장에 사랑을 고백했다가 다음 장을 넘기면 죽어 있었다. 그것들에 비교하자면 엄마 하나 죽인 건 사실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폐륜아라 열 받아서 그렇지. 소설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남자 주인공으로서 당연한 덕목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열 받는다. 딸이 내 목을 치고 싶었던 걸까? 그건 모를 일이다.
“그저 소문이기는 한데. 황태자가 황후를 죽였다고 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황비였던 2황자의 어머니가 황후가 되었고요…….”
이유도 알려지지 않은 정도라면 분명 진짜 심각하게 불행한 과거다. 안타깝고 불쌍한 삶을 보듬어주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남자 주인공인데. 벨리타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에이 씨부럴. 귀찮아라.
벨리타는 백작 부인에게서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캐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황태자는 대외활동도 많이 하지 않았고 사교계에도 얼굴을 내미는 편도 아니었다. 소문도 그리 많지 않았고 있더라도 험담뿐이다. 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엘라가 큰 그릇을 끙끙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아이고 이제 왔구만.
백작 부인이 이게 대체 뭐냐는 얼굴로 벨리타와 엘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벨리타가 엘라를 향해 손짓했다.
“별건 아니고, 김치를 담갔는데 제가 손이 커서~”
백작 부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김치가 뭔가. 응접실 내에 매콤한 향이 퍼졌다. 엘라가 바닥에 큰 그릇을 텅! 내려놓았다. 닫힌 뚜껑 사이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벨리타가 직접 몸을 일으켜 뚜껑을 열었다. 빨간 양념으로 범벅이 된 채소.
당혹스러움에 백작 부인이 벨리타와 김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손가락으로 김치를 가리키자 벨리타가 큰 그릇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음, 입맛이 변해서……. 반찬으로 이거 먹거든요. 느끼한 거 먹을 때 딱 좋은데. 같이 나눠 먹으면 좋으니까요.”
후작 영애가 자신을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야 한다. 후추도 맵다고 여기는 세상이라 먹기 위해서는 다음 날 화장실에 틀어박혀 폭풍이 휘몰아치는 각오를 해야 하지만 후작 영애가 챙겨준 걸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훗날 김치를 먹으며 스트레스 해소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