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도와줄 거지? 벨리타의 산뜻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큼 표정도 온화했다.
누나의 자신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데이비드가 조용히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얼어있는 볼을 가볍게 토닥였다.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지금 떠나도 늦은 밤에 도착한다.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가지 않을 수 없어. 그렇다고 네가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염치 불고하고 네가 와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죠.”
“착하다, 착해.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 감기 걸려.”
얼어붙은 천 너머의 어깨를 토닥였다. 머뭇대는 데이비드를 다독이며 저택 안으로 들여보낸 벨리타가 헐레벌떡 마차로 달려갔다. 아이고 늦었다. 도착하면 대체 몇 시야.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마차 문을 붙잡고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추위에 얼어 있던 몸이 녹기 시작하자 얼얼하게 욱신거렸다. 몸이 굳었던 탓에 삭신이 다 쑤셨다. 왜 이렇게 늦어졌냐는 엘라의 말을 무시하며 벨리타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이 편하다. 좋다.
마차는 구르고 속도 데굴데굴 굴렀다. 마차 좀 오래 탔다고 저녁으로 먹은 음식들을 토했다. 엘라와 사용인들이 기겁해서 등을 토닥여주고 근처 숙소를 구하자 난리를 떨었다. 벨리타는 괜찮으니 계속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사용인들이 안 된다, 그러다가 병세가 악화되신다, 조금이라도 쉬었다가 가야 한다, 뜻을 굽히지 않았다. 좋게 좋게 마저 가자고 타이르던 벨리타가 결국 성질이 나 뒤집어 엎었다. 열불을 내던 벨리타에게 엘라가 냉큼 고개를 조아리며 그러다 가시는 길이 샤를로트 영지가 아닌 천국이 된다고 했다.
근처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로 엘라의 손바닥을 챱챱, 때려준 벨리타는 사용인들에게 빨리 가자고 채근했다. 작은 주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사용인들은 마차를 빠르게 재정비하고 갈 길을 서둘렀다. 속이 울렁거리는 벨리타는 잠이 보약이라며 곯아떨어졌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샤를로트 백작 저택 근처였다. 거하게 자고 나니 멀미가 꽤 괜찮아져서 턱까지 늘어진 침을 닦아냈다.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고 마차가 들어서자 저택의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른 새벽이었다. 해도 겨우 뜰까 싶을 정도의 시각. 벨리타는 입도 헤 벌리고 자느라 얼얼한 턱을 끼워 맞추며 마차에서 내렸다. 일렬로 늘어진 사용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부담스럽다. 벨리타는 손을 휘저어 됐다는 신호를 했지만 집사와 시종들은 기깔나게 벨리타를 모셨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샤를로트 백작과 백작 부인이 급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내려온 듯 보였다. 미안해서 어쩌지. 벨리타가 멋쩍게 웃었다.
계단을 내려와 벨리타 앞에 선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벨리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반가워서 죽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와줘서 고맙다고, 오느라 고생했다며 벨리타를 반겼다.
샤를로트 백작도 따라 내려와 샤를로트 백작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몰골을 부끄러워하는 모양새였다. 샤를로트 백작이 큼, 헛기침을 하곤 말을 꺼냈다.
“차림이 이래서 미안합니다. 이 시각에 올 줄 몰랐네요.”
“빨리 온다고 서둘렀는데 너무 서둘렀네요.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았는데.”
“영애께서 오신다고 부인이 얼마나 들떠 했는지 모릅니다. 시종장이 파텔 영애께서 도착했다 알리자마자 달려 나왔는걸요.”
호탕하게 웃는 백작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은 볼이 붉어진 채 부끄럽게 별말 다 한다며 백작을 나무랐다. 백작은 백작 부인의 어깨를 살갑게 끌어안으며 벨리타에게 말했다.
“소이트 남작의 파티에서, 아니지, 로틀 남작 파티에 다녀온 후 영애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입니다.”
“코이!”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녀장이 머무르실 방을 알려줄 겁니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황급히 백작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백작은 요령 좋게 백작 부인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입을 틀어막는 것에 실패하자 씨근덕대며 백작의 손을 차지게 때렸다.
가만히 보던 벨리타는 웃음을 터트렸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더 붉어져 토마토소스로 사용해도 될 정도가 되었다. 바로 파스타 면을 넣어 볶아도 맛있을 것 같았다.
“두 분 사이가 무척 좋으시네요. 보기 좋아요.”
“아, 아니에요, 벨리타 영애. 이이가 부끄럽게 정말!”
“샤를로트 백작 부인께서 저를 그렇게 좋아해 주실 줄도 몰랐고요. 기뻐요.”
맞잡은 손을 꼭 쥐며 벨리타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자식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가 살갑게 구는 걸 싫어하는 어른은 드물다. 백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붙임성 있는 다정한 벨리타의 태도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반응을 했다.
벨리타의 작고 앙상한 손을 겹쳐 잡았다. 고생 한번 해 보지 않았을 고운 손이 벨리타의 손을 거듭 그러쥔다. 백작 부인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죠. 많이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고 아침에 마저 이야기 나눠요.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도 백작 부인 좋아요. 단잠 깨워서 죄송해요, 아침에 봬요.”
말도 예쁘게 한다고 백작 부인이 해사하게 웃었다. 샤를로트 백작도 벨리타가 썩 기꺼운 듯 보였다. 하녀장이 나타나 벨리타에게 방을 안내하려 했고, 샤를로트 백작과 부인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벨리타는 그 자리에 서서 둘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러웠다. 백작 부인은 서른여덟에 결혼했고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부부 사이였다. 저렇게 애정이 가득할 수 있을까. 부럽지만 시샘하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도 신기했다.
하녀장이 벨리타를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벨리타가 하녀장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 먼발치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라도 벨리타를 따라 걸었다. 피곤하다. 빨리 침대에 누워서 푹 자고 싶었다.
*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었다. 마차에서 그렇게 자놓고도 퍼질러 잤다. 어쩐지 눈을 뜨니 이상하리만치 개운하고 머리가 맑았다. 마차 속에서 한참을 구겨져 잤던 터라 몸이 뻐근해 팔을 붕붕 돌렸다. 신명 나게 아침 체조를 마치자 엘라와 시녀들이 문을 노크했다.
아침 식사, 이른 점심 식사를 들고 왔다. 침대 맞은편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녀들이 얌전하게 벨리타를 바라보고 서 있기에 내쫓았다. 여유롭고 맛나는 식사를 즐기고 난 후, 뽀송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어제 그렇게 차분히 꾸몄는데 마차에서 주무신다고 다 망가졌잖아요.”
엘라가 자줏빛의 단정한 드레스를 들이대며 말했던 탓에 시간을 들여 머리도 틀어 올렸다. 땋아 올려 진주로 장식한 머리는 얌전하면서도 고아했다. 어른들이 딱 좋아할 매무새였다.
과한 치장을 좋아하지 않는 벨리타였으니 이런 유의 단정한 차림새도 반가웠다. 낮은 구두를 신고 백작 부인과 백작이 있는 곳을 찾았다. 저택의 사용인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고 껌딱지 같은 엘라를 뒤에 낀 채 복도를 거닐었다.
백작 부인과 백작은 응접실에서 벨리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리타가 들어서자마자 백작 부인이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쫄랑쫄랑 가서 샤를로트 백작 부인의 앞에 앉은 벨리타는 빠르게 테이블 위에 세팅된 찻잔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었다. 금실 좋은 부부는 손을 꼭 잡고 벨리타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넉살 좋게 미소를 짓자 백작이 테이블에 층층이 얹어진 디저트를 권했다. 벨리타는 냉큼 다쿠아즈를 입에 욱여넣었다. 달다, 달아.
“잠자리는 괜찮았습니까?”
반쯤 베어 먹은 다쿠아즈를 씹어 삼키곤 벨리타가 생글생글 웃었다.
“마차에서 푹 자고 왔는데도 또 엄청 자버렸지 뭐예요.”
“괜찮았다니 다행입니다. 제대로 반겨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영애.”
“아니에요, 제가 너무 일찍 온 거죠. 두 분 식사는 하셨어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먼저 먹었네요.”
벨리타와 백작의 대화 중,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정말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다는 티를 팍팍 냈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가 봐. 좋은 사람 있으면 맛있는 거 먹이고 싶은 마음 다 똑같은 것 같다. 벨리타가 내일 꼭 같이 식사하자며 대꾸했다.
잔잔하고 훈훈한 대화가 이어졌다. 오는 길 어땠냐, 식사는 괜찮았냐 등등. 백작이 신나서 부인이 영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들었고, 백작 부인은 부끄러워서 백작의 입을 틀어막았다. 벨리타의 찻잔에 차가 식어갈 즈음 백작이 일어섰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즐거웠어요.”
벨리타가 손을 흔들자 백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선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줄 게 있었지. 벨리타가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엘라에게 손짓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엘라가 백스텝을 밟으며 응접실을 벗어났다.
식은 차를 들이켜고 벨리타가 말을 꺼냈다. 정말 궁금한 걸 물어보기 위한 서두였다.
“백작님이 성격이 참 좋으시네요.”
“말도 말아요. 얼마나 짓궂은지. 날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이에요.”
“그러고 보니 자제분은 어떠신가요?”
팔을 잃을 뻔하고 죽어갔다던 그 아이. 신관의 치료를 받고 깨끗이 나았다고 했던. 벨리타의 눈이 푸른빛을 띠었다. 약속했었다. 조슈아의 손을 치료해 주기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신경 써 줄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 손이 그 모양인데 그냥 모른 척하기도 뭐했다.
벨리타의 물음에 백작 부인은 질문의 의도를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5초간 멀뚱히 생각에 잠겼다가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이었다.
“제 아들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 관심이 그 관심이 아닌데. 아들인 것도 처음 알았다. 후작 영애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아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백작 부인은 귀가 새빨개졌다. 당돌한 영애! 바로 어머니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려는 셈인 걸까?! 하는 생각이 얼굴에 빤히 드러났다.
그 반응이 감히 내 아들을?! 이 아니라 엄머머, 어쩜 좋아! 였기 때문에 벨리타는 더욱 당황했다.
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벨리타가 황급히 본론을 꺼내 놓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정네와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뇨, 전에 신관에 대해서 말해주셨잖아요.”
“아.”
입을 가렸던 손이 얼굴 전체를 덮었다. 백작 부인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 수 없었다. 양손에 고개를 묻은 채 목 언저리까지 새빨개진 백작 부인은 개미 목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 거였냐고. 벨리타는 냉큼 그렇다고 했다.
“그치만 나는 벨리타 영애가 내 며느리여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