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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8화 (18/150)

18화.

“무사히 잘 다녀와라.”

“어디 안 좋다 싶으면 의원을 불러. 수도 저택에 고용해 두마.”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벨리타는 만족스러운 대답에 두 사람과 잡은 손을 힘주어 쥐었다.

*

허락도 받았겠다, 지원도 받았겠다, 떠날 채비가 끝난 마차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혼잣말인지 노랫소리인지 모를 흥얼거림과 함께 팔을 허공에 돌렸다. 배웅 나온 사용인들을 지나쳐 정문 앞에 서 있는 마차로 향하던 벨리타는 뒤에서 들리는 황급한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셔츠를 대충 꿰입은 데이비드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손에 들린 검, 헐떡이는 모습을 보니 수련장에 박혀 있다가 뛰쳐나온 행색이었다. 벨리타는 엘라의 특기인 백스텝을 밟으며 마차로 뒷걸음질 쳤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엘라만큼 빠른 백스텝은 할 줄 몰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마차로 향하던 벨리타의 앞에 데이비드가 붙어 섰다. 열이 잔뜩 받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불규칙하게 거친 호흡이 벨리타에게 쏟아졌다. 불쾌했다. 뭔 강아지도 아니고 저리 헥헥거리는가.

소설 속 캐릭터는 땀을 흘려도 땀 냄새가 안 나나 보다. 데이비드가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제 누나를 내려다보았다.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들어 보였다.

벨리타는 당황과 황당함을 참기름 넣고 비볐다. 그래, 그 결과는 당혹스러움이었다. 우물쭈물, 비쩍 마른 잔디를 보았다가 하늘을 보고, 마차를 보던 데이비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면서요.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으라면서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툴툴대는 말투에 퉁명스러웠지만 얼굴은 벌겋게 익어 시선도 맞추지 못했다. 검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튀어나왔다. 검 끝이 덜덜 진동한다. 데이비드는 마차에 원한이 있기라도 한 양 뚫어져라 노려봤다.

벨리타는 그런 데이비드를 어이가 없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꼴값이었다. 가지 말라고 하면 될 걸, 그 말 하는 게 부끄럽다고 얼굴이 새빨개져선 틱틱대고나 있다. 벨리타는 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했다. 그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자신이 한 잘못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몸 주인을 위해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은 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애의 응석을 받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랬지. 근데 그게 뭐?”

“……그렇게 말씀하셨으면서 누님은 왜 나가십니까.”

“나가면 안 되니?”

불퉁한 말에 똑같이 맞받아친 벨리타는 털이 복슬복슬한 코트를 거듭 여몄다. 겨울인지라 손이 시리고 발끝이 차가웠다. 한참 마차를 노려보던 데이비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벨리타를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태도.

기다려 줄까, 그냥 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을 보는 누나는 동요 한번 없었다. 그래도 가족이니 끝까지 들어는 볼까 싶어졌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코트 자락 안으로 손을 욱여넣었다.

오랜 침묵. 코끝이 차게 식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검을 쥐었다가 다른 손으로 옮겼다가, 고개를 돌리다가도 벨리타를 향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 생각한 벨리타가 손짓으로 사용인들을 물렸다. 배웅을 나왔던 사용인들이 우르르 저택 안으로 돌아가고, 작은 주인을 모실 호위들과 하녀, 시종들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고요해진 문 앞에서 결국 벨리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답답한 건 질색이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랑 있을 시간을 못 누렸잖아.”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든 데이비드가 입을 우물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발음이 뭉개진다.

“……누님 탓만은 아닙니다.”

“내 탓만은 아니더라도, 내 탓이 있는 건 맞지.”

“그래서 가시겠다는 겁니까?”

“응.”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솔직하게 이야기만 한다면 해결되는 일인데 쉽지 않다. 벨리타도 모르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누나랑 있고 싶다고 바로 말할 수 있는 아이였다면 진작 했을 터다.

질질 끄는 시간과 추위 탓에 점점 짜증까지 난다. 정말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을 꼼지락대는 동생에게 말했다. 귀찮은 건 질색이고, 답답한 게 제일 싫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쏘아붙인 벨리타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틀어 올린 머리 덕에 목덜미가 벌겋게 얼어 있었다. 털 코트 속에 파묻은 덕에 따뜻한 손을 목덜미에 얹어 추위를 녹였다. 말단 부위는 차가웠지만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의 차림새가 무척 추워 보였다. 얇은 셔츠에 땀까지 흘렸었다. 아직 11월이라지만 저 차림이면 분명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적당히 하고 들여보내야 했다. 외투를 벗어 주고 싶을 정도로 챙겨줄 마음은 없었으니까.

“감기 걸리니까, 빨리 말하고 들어가.”

“…….”

“할 말 없으면 간다.”

벨벳 구두가 마차를 향해 방향을 틀자,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안 볼 겁니다!”

잔뜩 미간을 찌푸려 오만상을 쓴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에 맺힌 땀방울이 얼어 있었다. 귀와 코끝까지 추위에 질려 붉게 물들어 있었고 입술 끝이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추워하면서도 버티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안 본다, 라니. 벨리타는 헛웃음을 뱉어냈다. 이 집 사람들은 도통 티를 내는 법이 없다. 자신도 마찬가지고. 순하게 쳐진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안 봐도 돼. 네가 그러고 싶다면.”

“이대로! 이대로 가시면! 저 정말 누님 안 볼 겁니다!”

어린애의 협박이었다. 누님을 잡아둘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통하지도 않을 협박뿐이다. 가진 것이 자기 자신밖에 없어서 본인을 가지고 저울질을 한다. 여섯 살 때의 딸이 마트 바닥을 뒹굴며 ‘안 사주면 나 안 갈 거야!’ 하는 수준의.

어리숙한 협박은 딸을 키우면서 많이도 겪었다. 가게를 꾸리면서 겪었던 진상들의 위협조차 익숙해졌던 벨리타였다. 데이비드의 하찮은 으름장은 통하지도 않는다. 귀여울 정도였다. 벨리타가 손을 다시 코트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안 볼 생각이었잖아.”

“그냥 가시면, 저, 용서 안 합니다. 안 할 거예요.”

“네가 원한다면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데이비드가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을 물었다. 눈에 힘을 바짝 준 채 벨리타를 노려본다. 눈가가 붉었다. 울기 직전의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 뱉듯, 가슴 안쪽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짓누르는 목소리로 데이비드가 처절하게 말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져줄 수 있잖아요.”

“…….”

“여태껏 이겨 왔으니 이번만큼은 져주셔도 되잖아요.”

“……너.”

“용서해 달라고, 잘못했다고 하셨으면서.”

고운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구긴 데이비드가 끝내 눈물을 떨궜다. 한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펑펑 쏟아진다. 콧물까지 훌쩍이는 데이비드가 높낮이가 제멋대로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가 버리면 용서 안 해 줄 거라고요. 제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추위에 턱이 덜덜 떨렸다. 벨리타 탓인지, 겨울이어서 그런 건지 몸이 잘게 진동한다. 데이비드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물로 벨리타를 노려봤다. 악문 잇새로 말이 이어졌다.

“용서해 달라고 안 가겠다고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우십니까?”

“…….”

“얼마나 저를 비참하게 만드셔야 만족할 겁니까? 잘못한 건 누님인데, 왜 제가 죄인처럼 매달려야 하냐고요.”

데이비드의 울음에 벨리타는 할 말을 잊었다. 데이비드가 벨리타를 애증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벨리타를 향한 애정이 월등히 높았을 줄은 알지 못했다. 용서하지 못했어도 함께 있고 싶어서. 여전히 밉고 싫지만 살을 에는 추위를 버티면서까지 매달릴 정도의 마음이었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애잔했다. 빨갛게 질린 손과 떨리는 몸. 서럽게 울어대면서도 애증이란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처절하게 매달리는 아이. 오지랖이 넓어서 탈이다. 벨리타는 따끈한 손을 뻗어 데이비드의 얼굴을 감쌌다. 얼음장 같았다.

“벨리타를 참 좋아하는구나.”

“……무슨……?”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렇다면 가지 마십시오.”

온기 가득한 손을 쳐내지도, 붙잡지도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벨리타를 보는 시선이 날카로웠음과 동시에 처참했다. 부어오른 눈을 엄지로 문질러 눈물을 닦아냈다. 사나운 눈이 감기니 순해 보였다.

“가야 돼. 할 일이 있어.”

“제 용서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벨리타의 말에 데이비드가 고개를 털었다. 작은 손이 허공으로 나동그라졌다. 데이비드의 턱이 하늘을 향했다가 내려오자,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원망, 분노, 슬픔. 복잡한 감정이 녹아들어 있었다. 벨리타의 눈썹이 늘어진다.

“누님은 끝까지 끔찍하십니다.”

“내 말 안 끝났어.”

작은 손이 다시 그의 얼굴을 쥐었다. 양 볼이 눌려 바보같이 입술이 튀어나왔다. 꼭 붙든 얼굴을 아래로 끌어내려 시야를 맞췄다. 데이비드의 상체가 숙여지고 벨리타의 발꿈치가 들렸다. 가까워진 틈 사이로 벨리타가 빠르게 말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네가 오면 돼. 나랑 떨어지기 싫으면 네가 오면 되잖아.”

“……예?”

“수도 저택으로 와. 부모님이랑 시간 보내고, 사랑 다 받고, 나한테 와.”

멍청한 표정. 양 볼이 꾹 눌려 튀어나온 입술 탓에 더 바보 같아 보였다. 늘어진 눈썹과 사나운 눈매가 거듭 깜빡거리니 그렇게 순해 보일 수 없었다. 예? 얼빠진 대답이나 한 뒤 입을 다물었다. 3초가 지나서야 가뜩이나 붉었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른다.

벨리타가 숨죽여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방학 동안 네가 수도 구경도 시켜주고 친구 만드는 거 도와줘. 같이 간식도 먹으면서 수다도 떨어야 해.”

“제, 제가 왜요.”

“넌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같이 쇼핑도 할까?”

어차피 마음에도 없는 투덜거림일 테니 가볍게 무시했다. 같이 있고 싶어서 가지 말라고 떼를 썼으니 해결해주면 그만 아닌가. 가지 않을 수 없다면, 부르면 될 일이다. 쉬운 길을 돌아서 헤매는 건 귀찮고 번거롭다. 작은 엄지손가락이 부어오른 눈을 지그시 눌러 문지른다.

데이비드의 손이 어정쩡하게 벨리타의 손목 주위를 배회하다 조심스레 쥐었다.

손끝이 잘게 떨린다.

“네가 나 도와줘야 해. 난 수도 처음이니까.”

“……진짜 이기적이십니다.”

“너 아니면 나 도와줄 사람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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