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7화 (17/150)

17화.

벨리타는 식당으로 향하던 걸음을 틀어 침실로 향했다.

졸졸 따라오다가 급히 몸을 돌린 엘라가 벨리타의 뒤에 바짝 붙어 어딜 가시느냐, 묻는다.

“내 방에서 먹을게. 가족들한테는 밖에 나갔다 왔더니 기력이 다해 함께 식사 못 할 것 같다고 전해줘.”

“아, 네 알겠어요.”

엘라가 다른 시녀에게 지시하고, 마저 벨리타를 쫓아온다. 침실에 도착한 벨리타는 편한 옷으로 환복한 뒤, 깨끗이 손도 씻었다. 볕이 잘 드는 창문 옆, 작은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사가 도착했다. 시녀 몇이 벨리타 주변에서 시중을 들었다.

빵을 길게 찢으며 사용인들을 바라봤다. 다른 것들은 그나마 적응했다고 해도 식사 중에 여러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동물원의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다. 구경거리. 게다가 혼자만 먹기도 뭐하다.

같이 좀 먹자고 꼬드겨도 매번 매몰차게 거절당하니 이제는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어차피 ‘저희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만 하니까. 평소에는 살갑게 굴고 하하호호 잘 지내면서 이상한 곳에서 깐깐하다. 어떻게 해야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 나가.”

“네?”

“혼자 먹고 싶으니까 다 나가라고.”

입이 달렸으면 써먹어야지. 주둥이 뒀다 뭐해. 벨리타가 찢은 빵을 입에 밀어 넣었다. 다 나가라는 말에 시녀들은 벨리타의 눈치를 보고, 자기들끼리 시선도 교환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방을 떠났다.

아싸라뵹. 숨 막히던 시선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신나고 야무지게 그릇을 싹싹 비워낸 벨리타였다.

식사도 끝마치고 뽀송뽀송하게 씻었다. 잠들기 전까지 붕 뜬 시간에 일기장에 글이라도 쓸까 했는데 엘라가 치근덕댄다.

이잉 귀찮아. 아잉 싫어. 심드렁한 얼굴로 엘라의 말을 맛있게 씹었다.

내일 몇 시에 출발하실 거냐, 깨워 드리냐, 식사는 드시고 가시냐, 종알종알 묻는 엘라에게 벨리타가 웃으며 화답했다.

“안 가니?”

“앗. 저 가요?”

“어우, 귀찮어. 빨리 가. 내일 일어나는 대로 상황 보고 유도리 있게 하면 되잖아.”

휘휘, 손을 내저으며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말했다. 엘라는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아가씨 역시 멋있어……! 하며 쫄랑쫄랑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야 벨리타가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제 아무도 없다. 어둑한 밤이니 누가 벌컥 들어올 일도 없을 거다.

벨리타는 침대 옆에서 국민체조 한 번 땡겨 준 뒤, 서랍에 쑤셔 박아 놨던 오늘 산 공책을 꺼냈다.

빈티지한 게 다시 봐도 썩 마음에 든다. 공책과 같이 쑤셔 박아 뒀던 휴대용 펜을 들었다. 펜촉이 현대의 것과 달라 신기해서 구석구석 살펴봤다가 정신 차리고 공책을 펼쳤다. 다시 침대에 엎어져 누운 채였다.

누워서 글을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학생 때나, 연애할 때만 글을 써 봤지 그 이후로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본 적 없었다. 옛 생각이 나 두근거린다. 이곳에 온 뒤로 옛 기억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괜히 들떠서 침대에 늘어진 다리를 흔들었다. 벨리타가 글을 적어 내렸다.

[제국력 340년 11월 29일

여기에 온 지 6개월 정도 됨.

미쳤다는. 소문났음.

친구 생김.

이온(소이트 남작네 디저트 가게 사장임). 샤를로트 백작 부인. 베아 자작 부인. 크롤리 남작 부인. 소이트 남작.

소이트 남작은 친구라기엔 좀 그래. 좀…… 많이…….

동생한테 사과함. 잘해줘라.

가족이랑 하고 싶은 거 많다고 밑밥 깔았으니까 잘 해 볼 것.

가족은 널. 사랑한다.]

신기하게도 벨리타가 쓰는 언어로 글을 적어도 이곳의 언어가 되어 나타났다. 번역기 같은 건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일기는 돌아올 벨리타를 위한 글이었다. 자신은 이곳에 왔을 때 벨리타의 기억을 받았지만 벨리타가 돌아온 후 자신이 만들어 둔 일들의 기억이 없을까 봐. 그래서 곤혹스러울까 봐.

벨리타는 벨리타의 기억을 회상했다. 아프고, 아팠으며 그로 인해 외로웠다. 사람의 기억이 완전할 순 없는지라, 드문드문 스쳐 가는 기억들은 짧았다. 태어날 적부터 아팠던 모양이었다. 신관도 들락거리고 전담 의사도 고용했었다. 작고 여린 팔에 무수히 많은 주사 자국과 어린 나이에도 비쩍 말라 나뭇가지 같은 몸.

어, 근데 이 어린아이는 누구지. 방문 앞을 기웃거리는 작은 머리통이 스쳐 갔다. 데이비드인 것 같았다. 벨리타보다 어리고 포동포동하게 볼살이 오른 작은 데이비드. 왜 그간 기억이 안 났나 했더니 존재감이 없어서였다.

그 외에는 데이비드가 기억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벨리타가 잊었거나, 마주치지 않은 거겠지. 어차피 현실로 돌아가면 끝일 테니 더 알아내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벨리타가 보는 벨리타는, 착한 아이다. 떼도 쓰지 않고 약도 잘 받아먹었다. 몸이 아프지 않은 날에는 웃으며 사용인들에게 책을 읽어 달라 사랑스럽게 졸랐다. 그저 남을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아서, 예민하게 굴었던 거다. 다 큰 성인도 아프면 예민하고 까칠한데, 어린아이라고 다를까.

건강이 많이 회복된 지금, 벨리타가 그대로였다면 분명 상냥한 아이가 되었을 거다.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생기면 여태까지의 날카롭던 아이에서 달라졌을 거다. 사람의 다정함과 상냥함은 풍족함에서 기인하니까. 극한까지 몰리던 아이가 어떻게 다정을 베풀 수 있겠는가.

벨리타는 쓰게 웃었다.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다 커도 아이 같은 제 딸과 가족들, 친구들, 유일한 수입원인 가게가 있었다. 책임지고 건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

벨리타가 펜을 휘갈겼다. 힘이 들어가 종이에 자국이 짙게 남는다.

[돌아가고 싶음.

딸 보고 싶다.

진아야.

보고 싶어.

가게는. 괜찮을까. 단골 다 떨어져 나가면. 어쩌지.

사실. 황태잔지 뭔지.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돌아가고 싶어.]

마음속에만 욱여넣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온다. 어디에 말도 할 수 없어 참고 견뎌내던 응어리였다. 글로 적어내고 드러내니 댐이 터지듯 그간 억눌러 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여태까지 버텨냈다. 눈물을 흘리면 결국 무너져 버릴 걸 알아서. 자신에겐 울 시간 따위 없었다. 눈물로 감정을 쏟아내고 한없이 부스러졌다가 끝내 다독이면서 자신을 견고히 다질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쫓기며 살았다. 돈에, 시간에, 능력에 쫓겨 허겁지겁 살아왔다. 이제 숨을 돌릴까 했더니 소설 속에 처박혀서 남의 인생을 살게 되는 꼴이다. 인생은 언제나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지만 너무 높고 위험해서 오르고 싶지 않아진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벨리타는 문득 두려워졌다.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데, 그대로 엎어진 채 모두 놓아버리고 싶을까 봐.

바람 소리만 매섭게 창문을 두드리는 밤. 벨리타는 숨죽여 흐느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서러움이었다.

*

“아가씨, 눈이 왜 그러세요?”

웬일로 벨리타가 늦잠을 잤다. 그래 봤자 한 시간 정도 늦게 일어난 거지만 칼같이 일어나는 벨리타가 늦잠을 잤다는 건 꽤 신기한 일이다. 눈이 퉁퉁 부은 벨리타는 투박하게 눈두덩을 문질렀다. 태연한 태도였다.

“잠을 좀 설쳐서. 마차에서 내내 자면 딱이겠어.”

심드렁하고 평소와 별반 다를 거 없었다. 엘라는 마차에 담요와 쿠션을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홀로 외출 준비가 끝난 벨리타는 휘적휘적 복도를 거닐었다.

엘라를 껌딱지처럼 붙인 채 라빌과 테일러가 있는 집무실에 들어섰다. 웬일로 먼저 찾아준 딸을 반가워하는 부모의 얼굴이 무덤덤하다. 역시 티를 내는 법이 없다. 라빌이 벌떡 일어나 소파에 벨리타를 앉혔고 순식간에 라빌과 테일러도 소파에 마주 앉았다.

테일러가 큼큼, 헛기침과 함께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이냐.”

“샤를로트 백작 부인 댁에 가기 전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집사장에게 들었다. 며칠 있을 예정이라지?”

벨리타는 그렇다 수긍했다. 어른 뵙는다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벨리타가 틀어 올린 머리 탓에 서늘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근래 들어 자주 외출을 하는 벨리타가 걱정이 된다. 테일러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곧 열아홉 살이 된다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인데. 예절 교육도, 웬만한 교육도 다 시켜 놓았지만 사람 상대하는 일은 모르는 아이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라면 분명 믿을 만한 사람인데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다.

테일러가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라빌이 테일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수도의 저택에 갈 생각이라 들었다. 네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니야.”

“그래도 지금 아니면 수도를 언제 가 보겠어요. 또 언제 아플지도 모르는데.”

벨리타의 말에 테일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내가 상처 주는 말을 했구나. 벨리타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몸은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도 더 좋아지겠죠. 그냥 수도를 구경하고 싶어서 그래요. 샤를로트 영지가 수도와 가깝기도 하고, 겸사겸사. 그래도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덧붙인 말에도 영락없이 서운해하는 테일러와 그를 다독이며 여태껏 못 해 본 거 다 해 보라고 하는 라빌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모의 손 하나씩을 마주 잡으며 마음 약한 부모를 올려다보는 어린 딸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강아지같이 처진 눈을 깜빡거리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틀어 올린 머리 덕에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드러난 아이의 얼굴이 생동감 넘쳤다. 싱그러웠다. 라빌과 테일러는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꼈다.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딸이 눈을 빛내고 말갛게 웃음을 지으며 부모를 부르는 그 찰나가 무엇보다 값졌다.

다 해주고 싶다. 별을 원한다면 하늘을 날아서라도 한 아름 안겨 주고 싶다.

“돌아와서, 함께 저녁도 먹고 날이 좋으면 산책도 해요. 자기 전에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서 이야기도 나눠요.”

금은보화를 원하면 방에 가득 채워주고, 맛있는 음식을 원한다면 제국을 뒤져서라도 전부 맛보게 해줄 수 있었다. 후작과 후작 부인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벨리타가 원한 건 정말 사소하고 언제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너무 쉬워서 어처구니가 없어질 정도의.

그럼에도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일이어서, 라빌과 테일러는 목 안쪽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둘은 불과 일 년 전, 벨리타를 떠올렸다. 앙상한 팔, 메마른 얼굴, 찢어지는 비명. 지금의 벨리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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