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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6화 (16/150)
  • 16화.

    ‘데이비드가 방학 동안 여기 있겠다고 했으니 두 달 동안은 수도 집은 빌 거고. 바로 학교로 가면 기숙사니까 집에 올 일은 없겠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대화로 안 풀리면 볼 일 없다. 벨리타야, 난 할 만큼 하는 거야. 그리고 황태자를 만날 구실이 필요한데…….’

    나무로 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벨리타는 어~, 라고 대답했고 시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데이비드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둘러보던 데이비드가 벨리타와 눈을 마주치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앉으라는 손짓을 하니 휘적거리며 걸어와 벨리타의 앞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티가 났다. 온몸으로 표현 중이었다. 벨리타는 차를 홀짝이며 입을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찻잔이 부딪친다.

    “다들 나가봐.”

    벨리타의 짧은 말에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방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넓은 방 안이 적막하다. 둘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조용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를 비집고 벨리타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없습니다.”

    “말해. 지금 아니면 못 들어.”

    “…….”

    “강요할 생각은 없다. 네가 말하기 싫다면 싫은 거겠지. 하지만 말이야. 담아만 두면 속병 나.”

    얇은 손이 제 가슴께를 짚었다. 데이비드를 곧게 바라보는 눈이 진중한 빛을 띤다. 하늘과 싱그러운 풀숲이 어우러지는 눈동자가 무거웠다.

    “처음에는 괜찮다가 여기가, 시간이 갈수록 곪아 버려. 담아둔 게 무거울수록 숨쉬기가 힘들어져. 여기서 천불이 끓는다고. 끌어안고만 있으면 나까지 타 버려. 내가 분명 너에게 잘못했겠지. 네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야. 가족인데 얼굴도 보기 싫을 정도면 내가 큰 잘못을 했겠지.”

    “…….”

    “데이비드, 있지.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미울 수 있어. 이제 와서 같잖게 친한 척한다고 아니꼬울 수도 있어. 가증스러울지도 몰라. 미친년이 정신도 못 차리고 설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응, 나도 알아.”

    하얗게 질린 동생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다. 긴장을 했거나, 오한이 들 정도로 역겹거나. 움찔, 데이비드의 손이 떨렸다. 그뿐이다. 빼지 않는다.

    벨리타는 거듭 양손으로 큰 손을 감쌌다. 차게 식어 있던 살덩이에 온기가 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큰 상처를 준 주제에 잊어버려서 미안해. 내가 널 무시하고 잊어서. 네가 말해야만 잘못을 아는 나쁜 년이어서 네가 마음 고생했어. 사과할 기회를 줘.”

    “……누님은 정말 제멋대로십니다.”

    노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숙인 고개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벨리타와 잡은 손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잘게 떨리는 살덩이가 안쓰러워 잡은 손에 힘을 주니 데이비드가 슬그머니 손을 펴 벨리타의 손을 맞잡았다.

    주저하고, 주저하다 결국 잡은 손. 한마디 이상이나 작은 손에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 힘조차 주지 못한다.

    데이비드는 우스웠다. 이 상황도, 벨리타가 미치고 나서야 들을 수 있는 사과도, 다 우스웠다. 그중에서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이 제일 우스웠다.

    데이비드의 입에서 숨소리가 가늘게 샜다. 이어서 하찮게 부스러지는 웃음이 터진다. 데이비드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저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안 듭니다. 아직도 누님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누님 앞에만 서면 어린애가 되는 기분입니다. 숨이 막혀요.”

    “……내가 널 때렸니?”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다면 덜 미워했을까요.”

    이를 악물어 갈리는 소리. 온몸이 긴장한 나머지 바짝 힘이 들어가 떨렸다. 그럼에도 벨리타와 맞잡은 손은 느슨했다. 데이비드는 숨마저 삼켜냈다.

    느슨한 손아귀 사이로 작은 손이 새어나간다. 그제야 데이비드는 주먹을 쥐었다. 의자가 뒤로 밀리더니 시야 끄트머리에 치마가 너풀댄다. 석양을 담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흐트러졌다.

    꽉 쥔 주먹이 벨리타에 의해 끌어 내려졌다. 데이비드의 앞에 쭈그려 앉은 벨리타가 그의 양 주먹을 양손으로 꼭 감쌌다. 일그러진 얼굴이 평소에 보던 것과는 달랐다.

    “용서하지 않아도 돼. 네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지 마. 가족이라도, 밉다면 미워해도 돼. 얼굴 보지 않고 살아도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네가 뭘 해도 난 다 받아들일게. 응당 그래야지. 부담 갖지 마.”

    누님이 하는 말들은 죄 비꼬는 말처럼 들렸는데, 이번만큼은 진심 같았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이해한다고 하더니. 누님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말이었는데,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누님에게 듣고 싶었던 대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동생에게 뭐가 그리 미안하다고 덮어 쥔 손을 몇 번이고 토닥인다.

    벨리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끝내 벨리타를 용서할 거다. 이미 벨리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미워만 하고 있었다면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느냐 묻지 않았을 거다.

    따지려고 식사 자리까지 따라와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다. 권유받은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고 편지 쓰는 걸 도와달라고 했을 때 끝내 자리를 지켜 대필까지 했다. 분명 벨리타가 미웠겠지. 미워서 견딜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벨리타를 사랑했다. 투닥대는 말싸움에서도 들떠 있는 게 느껴졌다.

    정말 싫어하면, 진심으로 싫어하게 되면 얼굴도 보기 싫어지니까. 벨리타가 그랬다. 근황이 궁금할지언정, 함께 있고 싶지는 않다.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얼굴 보며 밥을 먹고 싶지도, 사적인 편지를 대신 써주고 싶지도 않다. 말다툼을 할 때도 자신에게 용서를 빌라고, 자기는 상처를 받았다고 드러낸 표현도 수시로 하지 않았는가.

    데이비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이 지나서야 입도 열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괜찮을 거다. 이미 아이는 반쯤 마음이 풀려 있었다. 벨리타의 잘못이 아님에도 벨리타는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이제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언젠가는 여느 다른 가족들처럼 웃으며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진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된다면 먼 훗날에는 그땐 그랬지, 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 가족은 아니지만, 그러길 바랐다. 안타깝기 그지없어서.

    “지금 넌 어떻게 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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