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5화 (15/150)
  • 15화.

    혹시 모른다. 이 녀석에게도 곧 매타작을 해야 할지. 하지만 남의 자식, 남의 동생 패는 거에는 취미 없으니 자제해야겠다.

    “아, 그러고 보니 데이비드. 편지 쓰는 걸 도와줄래? 내가 말주변이 없어 어렵네.”

    대신 쓰게 시켜야지. 데이비드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가 라빌과 테일러의 눈치를 보곤 냉큼 웃으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쟤는 왜 자꾸 부모 눈치를 봐. 부모 서운하게.

    기쁘다, 뭐다 하며 대화를 대충 주고받고 벨리타 때문에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예상외로 데이비드는 아카데미에서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어제저녁 대화할 때는 허세로 답한 줄 알았는데 정말 친구도 많았고 수석도 여러 번 했던 녀석이었다. 벨리타가 넌지시 방학 중에는 어디에서 지내느냐 물었더니 당연한 얼굴로 수도 저택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랬다. 벨리타는 소설을 너무 대충 읽어서 수도에 다른 집이 있던 것도 몰랐다. 19살에 수도로 간다는 게, 남의 집에서 신세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집에서 사는 거였다. 조선 시대에도 양반들이 집이 여러 개 있다는 얘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있었나? 이게 다 중학교만 나와서 그런다.

    아무튼 데이비드는 착실히 인맥도 능력도 키우며 차기 가주를 위한 발판을 잘 쌓고 있었다. 내 딸도 좀 이렇게 좀, 어? 아니다. 말을 말자. 남의 자식과 비교하면 안 된다.

    벨리타는 하하호호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넌지시 꺼낸 여름에 바다로 가자는 건의도, 저녁 식사를 함께 먹는 것도 수락됐다.

    *

    벨리타도 개인 집무실이라는 게 있기는 했다. 여태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있기는 있었다. 나름 구색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편지를 쓰려고 집무실까지 올 일인가 싶었지만 엘라가 집무실도 있는데 왜 침실에서 편지를 쓰고 그러세요! 해서 떠밀려 왔다.

    아가씨께서 집무실에 앉은 모습이 참 오랜만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시녀들에게 간식이나 가져오라고 쫓아냈다. 그 김에 데이비드도 불러오라고도 했다.

    어지간히 오기 싫었는지 느릿느릿한 발걸음 끝에 데이비드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책상 앞에 서서 오만상을 짓고 있는 꼴이 괘씸하기도 하고. 도와달라고 불렀으니 세워두기도 뭐해서 손님용 소파에 앉히고 벨리타도 그 앞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없었으면 주먹다짐할 정도로 분위기가 사나웠다.

    데이비드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까딱였다. 버릇없는 게 턱을 확 그냥.

    “정말 편지 쓰는 거나 도와달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럼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우습잖습니까. 그리 책만 읽으시던 분이 그깟 편지 하나 쓰자고 동생을 부르시니.”

    그 말도 맞다. 벨리타는 책벌레였다. 책벌레가 글을 못 쓴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글재주가 없을 수도 있지, 괘씸하다.

    벨리타는 머리를 굴려 변명을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 핑계가 떠올랐지만 제일 그럴듯한 걸 뱉어 낸다.

    “친구가 없어서 그래.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

    “넌 친구 많잖아. 그러니까 좀 도와줘 봐.”

    곧바로 치고 들어오던 말대답이 없었다. 이상함에 데이비드를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편지지와 잉크, 펜을 번갈아 보던 데이비드가 벨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와는 드리겠습니다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정말 미치신 거 맞습니까?”

    시비 걸 때도 느꼈지만 정말 훅 들어온다. 벨리타가 펜을 들자 시선이 얼굴에서 펜으로 돌아갔다. 뭐라고 쓸지 궁금한 듯. 일부러 대답을 듣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는 듯이.

    “보면 모르니.”

    “……알겠습니다.”

    겸연쩍어 보이는 반응이었다. 데이비드는 몇 번이고 벨리타의 얼굴에서 편지지로, 시야를 돌렸다. 애매하지만 넘어가긴 넘어가서 벨리타는 튀어나온 심장을 애써 갈무리했다. 서걱, 서걱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울렸다.

    “인사말이 없습니다. 표현이 너무 장황합니다. ……도대체 단어 끝에 점은 왜 찍는 겁니까?”

    글을 적어 내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댄다. 도와준다는 게 기특해서 참았지만 다섯 줄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성질이 나 참을 수 없었다. 벨리타는 편지지를 북북 찢어버리곤 데이비드에게 편지지를 쑥, 내밀었다. 펜과 함께.

    뭐 어쩌라는 표정의 데이비드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써봐, 그럼.”

    “누님 편지인데 왜 제가 씁니까? 도와드린다고 했지 제가 쓴다고는 안 했는데요.”

    “꼬박꼬박 말대꾸네. 맞을래?”

    “무식하게 구실 겁니까?”

    “난 아카데미도 못 다녀봤으니까 무식하지, 그럼. 그렇게 눈에 안 차면 네가 쓰라고.”

    편지지가 테이블 위에서 날아다녔다. 벨리타의 손에 들어왔다가, 데이비드 손에 넘어갔다. 현란하게도 왕복했다. 결국 벨라타가 데이비드의 손을 찰싹, 때려서야 편지지의 비행이 멈췄다. 요란하게 벨리타를 노려보던 데이비드가 한숨과 함께 펜을 잡았다.

    “그래서, 뭐라고 하고 싶으십니까?”

    “샤를로트 백작 부인에게 찾아간다고 해줘. 그때 못 했던 이야기마저 하고 싶다고. 가능하면 며칠 있어도 되겠냐고.”

    정갈하고 예의 바른 인사말부터 시작해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한 용건을 적어낸다. 막힘없이 펜이 허공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벨리타는 그 꼴을 가만히 바라보며 역시 배운 놈들은 다르다, 라고 생각했다. 편지를 다 적어낸 데이비드가 펜을 내려놓고 다시 소파에 기댔다.

    “가신다는 게 티파티였습니까?”

    “아마 한참 있다가 올 거야. 할 게 있거든.”

    “미치신 분이 할 게 있기는 뭐가 있습니까. 집에서 요양이나 하세요.”

    “맞을래?”

    “무뢰한.”

    “너는 내가 시간 날 때 오라고 했더니 코빼기도 안 비치더라?”

    “시간을 꼭 내야 합니까?”

    “너 이 새끼 등짝 대.”

    “와, 말씨도 어쩜 폭력적이실까.”

    투닥투닥, 다투는 와중에도 데이비드는 착실하게 편지지에 향수를 뿌리고 곱게 접어 편지 봉투에 넣은 뒤 밀봉했다. 사용인에게 편지를 건네주는 순간 시켰던 디저트가 도착했다. 순식간에 말끔하게 치워진 테이블에 디저트가 놓였다.

    벨리타가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자 데이비드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백작 부인과 친분이 있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또래와는 어울리기 힘든 성격이긴 하시죠.”

    “자꾸 기어오를래? 소이트 남작 파티에서 친해졌어. 좋은 사람이더라.”

    “그 남작 파티엔 왜 가셨습니까? 뭐 볼 게 있다고요.”

    “그냥, 초대장이 왔길래.”

    “미치신 분이 잘도 돌아다니십니다. 그럴 시간에 동생이나 진작 신경 쓰시지 그러셨어요.”

    “그래, 이름도 잊은 내가 죄인이다. 그래.”

    벨리타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데이비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열렸다가, 닫혔다가 참으로 바쁜 입이 그제야 말을 뱉어 낸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오냐. 내가 잘못했다. 내가 나빴어.”

    “정말 저한테 미안하다고 느끼시는 겁니까?”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믿고 싶지 않다는 듯도 보였다. 서서히 구겨지던 표정이 벨리타가 그래, 묘비에 새겨주랴, 라고 하는 말에 완벽하게 일그러졌다. 벨리타가 구긴 종이가 더 빳빳할 것 같았다. 뼈대가 굵은 손이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다.

    “그렇게 쉽습니까. 미치셔서 그런 겁니까?”

    “또 뭐가 문제야.”

    “누님은 사람 비참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세계 제일일 겁니다.”

    차도 다 마시지 않고 데이비드가 일어섰다. 울컥하는 거 고치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무섭게 벨리타를 노려본다. 눈가가 붉은 것도 같다.

    그는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벨리타를 한 번 더 노려본 뒤 쾅, 소리를 내며 박차고 나갔다. 저저, 싸가지하곤.

    기억에 없지만 분명 벨리타가 큰 잘못을 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데이비드의 태도가 설명이 되질 않는다. 다른 이들에겐 살살 웃으면서 하하호호 굴다가 벨리타 앞에서만 저 꼴이니. 물론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가 진심이고 타인에게 하는 꼴이 가식인 건 눈치채고 있었다.

    진짜 가족이 아닐 거라 생각되지만, 라빌과 테일러에게마저 가면을 쓰고 대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제 자식이 자신에게 그딴 식으로 굴었다면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졌을 거였다. 라빌과 테일러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평생을, 가족에게 가식으로…….

    골치 아프다. 상처를 받은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남에게 물어보자니 제대로 알 수 없을 것 같다. 벨리타가 일기라도 썼다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소설이라도 제대로 읽을 걸 그랬다.

    벨리타는 스콘을 마저 씹으며 데이비드가 나간 문을 한참 지켜보았다.

    *

    편지가 백작가에 도착하기까지 하루, 일정을 만들고 답장을 쓰는 데 이틀, 벨리타에게 도착하기까지 하루.

    그동안 데이비드는 벨리타를 피해 다녔다. 할 일이 없는 벨리타가 마을로 내려가면 데이비드는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벨리타가 저택에 있으면 수련을 핑계로 수련장에 틀어박혔다.

    저녁만큼은 얼굴 보며 다 함께 먹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시선도 주지 않았었다. 밥 먹고 튀어버리는 싸가지 없는 놈.

    얼굴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넓은 저택에서는 의도적으로 만나야만 만날 수 있었으니까. 30평 남짓 되는 아파트에서는 보기 싫어도 보게 되는 게 얼굴인데.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 답장한 편지를 읽으며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든 와도 괜찮아요. 벨리타 영애가 와 준다니 기쁘네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줄줄이 길게 온 답장이었지만 요약하자면 그랬다. 지금은 낮이고, 당장 출발한다고 해도 다음 날 도착한다. 그냥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가기 전에 데이비드와 이야기는 나누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번에도 조금이라도 풀지 못한다면 틀어진 채로 살아가야 할 테니까.

    본래의 벨리타 성깔로 봐선 아마 지금 아니면 평생 화해 못 할 거다.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몰아 넘기며 벨리타가 찻잔을 들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엘라의 뒤에 서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샤를로트 백작가로 갈 거야. 며칠 뒤에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가서 몇 달 머물려고 하는데, 저택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 좀 해 봐. 그리고 데이비드 불러와.”

    “네, 아가씨.”

    엘라의 뒤에 있던 시녀가 다른 시녀에게 데이비드를 불러오라고 지시하고 둘이 나란히 떠났다. 벨리타는 과일이 얹어진 머핀을 입에 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