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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4화 (14/150)

14화.

잘못한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에게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 물으면,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다. 먼저 말을 해줄 때까지 기다려 보자.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감정이 격해져 있으니 물러나기로 했다.

벨리타는 말없이 데이비드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저 먼발치에서 엘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시 동생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직도 아플 등짝을 부드러운 손으로 문지르며 벨리타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시간이 될 때 찾아와.”

대화를 하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벨리타는 곧장 등을 돌렸다.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쾅,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엘라는 벨리타의 등 쪽을 바라보며 눈으로 쌍욕을 했다. 얘도 정상은 아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벨리타가 식당을 떠나자 엘라가 뒤쫓아 따라왔다.

“도련님 화 엄청 나셨네요. 저런 모습 처음 봐요.”

“원래 저런 애 아니었어?”

“무슨 소리세요. 조곤조곤하시고, 상냥하시잖아요. 화내시는 거 본 적이 없는걸요. 아가씨께서 워낙 도련님한테 관심 없으셨다고 해도……. 너무 하신다~”

“아파서 신경 못 써준 거지, 뭘. 넌 쟤가 왜 저러는지 알겠니?”

“글쎄요. 제가 일을 할 때쯤에 도련님께서 아카데미로 가셨으니까요. 얼마 못 뵀죠.”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더니, 아는 척이었구나?”

“말씀 무척 서운하게 하십니다~”

“너도 등짝 맞을래?”

“앗, 그럼, 한 대만…….”

기대감 서린 눈이 왜인지 역겨워서 벨리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데이비드의 말을 따라 한 게 열 받아 맞을 테냐 물어보니 냉큼 맞겠다고 하니까……. 좀, 그렇다. 왜 귀를 붉혀. 맞는 걸 왜 기대해. 미쳤어? 벨리타는 진저리를 치며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엘라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벨리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얘 진짜 정상 아니야. 여기 멀쩡한 애가 하나도 없다.

사흘간 내리 자고 먹은 게 고기니 속이 무거웠다. 복도를 걷는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엘라가 말없이 뒤를 따르고 벨리타는 배를 문지르며 침실로 향해 걸었다. 그러고 보니 백작 부인에게 뭐라고 편지를 써야 할까. 핸드폰이 있었으면 바로 전화해서 약속 잡으면 되는데.

편지를 쓴 지 몇 년은 된 것 같다. 몇 년이 뭔가, 몇십 년은 됐다. 구구절절 적기는 귀찮고 너무 짧게 쓰기는 예의 없어 보이니 고민이다. 최소한 유선 전화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벨리타는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으니 내일 해야겠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눈이 감겼다. 엘라가 침대를 팡팡 쳐가며 씻고 주무시라고 애걸복걸을 하기에 하품을 쩌억 하며 야무지게 씻었다. 옆에 있으려는 엘라를 쫓아내고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들었다. 그렇게 내리 잤으면서 잠은 또 잘 온다.

*

아직도 몸이 무거워 아침 식사는 침대에서 해결했다. 씻고 평소보다 가벼운 옷을 입으니 상태가 꽤 괜찮아져서 정원 산책을 한 번 땡겨줬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는 기분이 썩 좋았다. 뽀드득, 밟는 대로 나는 소리에 괜히 신이 나서 몇 번 발을 굴렀다가 신발에 눈이 들어갔다. 축축해져서 발을 털고 있노라니 응접실이 있는 창문 너머로 부모와 데이비드가 보였다.

엘라의 뒤를 따라다니던 시녀에게 신발을 하나 더 가져오라고 한 뒤, 벨리타는 정원 반 바퀴만 더 돌고 돌아갔다. 반년이 지났다고 사람 시키는 게 익숙해진다. 편하기는 참 편한데 말이야. 벨리타는 뽀송한 신발을 신고 응접실로 쳐들어갔다.

벌컥, 열리는 문에 라빌, 테일러, 데이비드의 시선이 일제히 벨리타에게 꽂혔다. 아침에 인사드린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어제저녁에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던 코찔찔이는 어디 가고 예의 바른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누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잘 잤다. 어머니, 아버지, 잘 주무셨나요.”

인사를 받아주자 셋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대체 왜 뭐만 하면 이상하게 보는가. 벨리타가 인성이 나쁘다고 해도 철들었다고 치면 되지, 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한발 늦게 라빌과 테일러가 벨리타의 아침 인사를 받아줬다. 어색한 인사에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벨리타가 셋이 앉은 소파에 다가가 데이비드의 어깨를 토닥였다. 몸이 긴장해 굳은 것이 느껴졌다.

“앉아, 앉아. 밥은 먹었니?”

셋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의 턱이 빠질 뻔했다. 대체 동생이랑 사이가 어떻기에 밥 좀 챙겼다고 자지러지는지. 벨리타는 데이비드의 옆에 대충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여기에서 벨리타가 제일 연장자였다. 그러니 다리 좀 꼬아도 괜찮다.

“예, 식사, 했습니다. 누님은 드셨, 습니까.”

아직도 서 있는 데이비드가 삐거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몸이 안 좋아서 대충 먹게 되네.”

앉으래도, 라며 다시 착석을 권하자 그제야 쭈뼛대며 앉았다. 단란한 가족 같아 보여서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파에 상체를 기대어 가족을 훑어본 벨리타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저만 빼고 무슨 얘기 중이셨죠? 가족끼리 단란한 대화 같아 보이는데, 제가 빠질 수야 있나요.”

대놓고 비꼬았다. 자기는 가족이 아니냐고. 유독 이 가족에게만 모나게 굴게 되지만, 벨리타는 이래야 하니까.

벨리타의 말에 테일러는 헛기침을 했고 라빌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시선을 돌리니 데이비드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리타도 질 수 없어 마주 바라봤다.

라빌이 큼큼,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라빌에게로 향했다.

“아카데미에서 잘 지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도 궁금한데, 왜 저는 안 부르셨나요?”

“관심 없어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관심 가지려고요. 누님이 동생 좀 챙겨보려는데, 어제부터 동생이 낯설어하네요. 서운하게.”

엄마 아빠한테 대놓고 일렀다. 라빌과 테일러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벨리타와 데이비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딸이 미쳤다는 것도 그러려니 하셨으면서 동생을 챙기려고 하는 거에는 그러려니 하지를 않는다. 동생의 얼굴을 보니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아, 옛 기억이 생각난다. 다섯째 동생이 나뭇가지로 콕콕 찌르기에 어머니께 고자질했었다. 동생이 누나를 찌르면 안 된다고, 내 편을 들어줬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아 울먹이던 동생도 머릿속에 스쳤다. 어머니의 얼굴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호미질을 하던 어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현실로 돌아가면 가족 얼굴을 봐야겠다. 언니, 오빠, 동생들을 불러놓고 술이나 한잔 기울여야겠다. 명절에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으니까.

벨리타는 목 언저리가 울컥해서 겨우 참아냈다.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가 하는 꼴이 뺀질거리는 게 딱, 여섯째 동생과도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말대답에 틱틱거렸다.

“그래, 이제라도 남매끼리 친해지면 좋겠지.”

관심 없다는 듯 툭, 던진 말을 뱉은 테일러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경주마를 타고 지나가며 본 대도 기분이 좋아 보일 것이다. 테일러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고 감격스러워한다는 건 알겠다. 벨리타도 모르는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벨리타는 참, 가족에게 무심했구나.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테일러가 얼마나 상냥한지 라빌이 얼마나 따스한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죽을 만큼 아팠으니 별수 없었겠지만. 나중에 벨리타가 돌아오면, 자신이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면 벨리타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사는지 알려주고 싶어졌다.

꼰대 같은 마음이겠지만, 사랑받고 주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든든한 편인지 모를 어린아이니까. 벨리타는 벨리타를 위해 조금 노력해 주기로 했다. 몸을 빌렸으니 빌린 값을 조금이라도 치러주고 싶었다. 죽지도 못하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저는 어머님, 아버님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제가 아픈 탓에 함께 보낸 시간이 적잖아요.”

기억이 남아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온 벨리타가 기억하지 못해도 사랑을 받았다는 흔적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부모의 관심이 중요할 시기에 병과 사투를 벌이느라 온전히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이고, 전부다. 적어도 그저 무심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그러길 바라니까. 내가 얼마나 내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부모 또한 아이가 세상이고 전부라는 걸 진심으로 느껴주길 바라니까.

그들이 사랑하는 벨리타는, 벨리타가 아니다. 그러니 할 수 있었다.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빌과 테일러를 곧게 바라보며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몸도 많이 좋아졌고, 가족과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요.”

이렇게 밑밥을 깔아두면 후에 벨리타가 돌아와도 가족들과 신나게 놀겠지. 지금의 벨리타는 시간이 별로 없다. 황태자 홀리러 가야 한다. 벨리타가 19세가 될 때 즈음에 수도로 가게 되니, 일 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라빌과 테일러는 감격에 겨운 분위기를 풍겼다. 주변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용인들도 훈훈한 분위기에 코를 슥, 문질렀다. 유일하게 데이비드만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벨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리타가 뭐, 꼽냐, 라는 얼굴로 바라보자 예, 꼽습니다, 라는 얼굴로 맞받아친 데이비드가 곧 표정을 바꾸었다. 온화하고 차분한 미소였다. 데이비드가 벨리타의 손등을 감싸 쥐며 감동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무지했습니다. 누님이 이렇게 깊은 마음으로 저를 신경 써 주셨다니요. 격조하여 익숙하지 않지만, 누님의 애정에 적응하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와, 이 새끼 부모님한테 꼰질렀다고 대놓고 멕이는 것 봐. 이름도 잊어먹은 누님이라고 돌려서 욕한다. 잡힌 손등에 소름이 돋는다. 벨리타가 툭, 손을 쳐내고는 마주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조곤조곤한 말씨로 대답했다.

“그래, 이제 와 동생을 챙기는 것도 우스워 보이겠지만 네가 이리도 기뻐해 주니 나 또한 기쁘구나. 아카데미에서 편지 한 통,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아 익숙하지 않을 만도 하지. 내가 섣불렀네.”

여섯째 동생 같아서 자꾸 대응하게 된다. 문철이, 뺀질거리던 녀석. 벨리타도 당해주지 않고 수도에 있는 학교 갔다고 집구석에 얼굴도 안 비치는 못난 놈이라고 욕했다. 자신의 관심이 익숙하지 않은 건 네 탓이라고 시비도 걸어줬다.

진짜 동생은 저렇게 곱게 얘기 안 해주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고 구워삶기도 수월했다. 문철이 그 자식은 말이 안 통해서 정말 짐승같이 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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