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3화 (13/150)
  • 13화.

    “이제 와 뭐? 가족이 밥 같이 먹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 앉아.”

    남자를 쏘아보는 시선이 어떠한 뜻도 없어 보였다. 정말 당연하다는 얼굴로 같이 밥이나 먹자는 눈이었다.

    밥도 먹지 않고 곧장 달려온 남자의 배가 낮게 꾸르륵, 울렸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당장 자리를 뜨려고 몸을 틀자 다시 한번 벨리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중에 주방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와서 먹어. 지금 한꺼번에 먹어야 애들 고생 안 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사용인들이 쉬지도 못하고 밥하면 힘들 테니까. 게다가 이미 준비하라고 했으니 자신이 먹지 않으면 음식 쓰레기가 될 것 아닌가.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저엉말 어쩔 수 없다.

    쭈뼛대며 의자에 앉은 남자는 벨리타를 살펴봤다. 일말의 감정 동요도 없었다. 그래, 저 사람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이겠지. 미쳤으니 한 번 챙겨줄 수도 있다.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자.

    남자는 남은 식전 빵을 입에 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둘의 대화가 끝났음을 눈치챈 엘라가 벨리타에게 쪼르르 달려와 이러쿵저러쿵 서러운 얼굴로 조잘거렸다.

    작은 소리인 탓에 엿들을 수는 없었지만 담당 하녀가 쫑알거리는 걸 묵묵히 들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모습에 남자는 먹던 빵을 뱉을 뻔했다. 저 사람 저런 사람 아니잖아. 저렇게 다정하게 웃는다고?

    엘라와 벨리타가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눈꼴 시려워서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벨리타가 뭐 어쩔, 이라는 얼굴로 봤지만 엘라는 파드득 놀라며 저 멀리 물러났다.

    벨리타는 어이없는 얼굴로 엘라와 남자를 번갈아 봤지만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얼마 가지 않아 식사가 놓였다. 소를 구운 스테이크와 라임으로 상큼하게 맛을 낸 샐러드.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식기를 들어 고기를 가르니 피가 배어 나왔다. 이 정도 굽기가 딱 좋다.

    슬쩍 벨리타를 보니 벨리타의 그릇에 자신과 다른 게 놓여 있었다. 빨간색으로 양념된 야채.

    남자가 빤히 바라보자 벨리타는 웃으며 먹으면 후회할 거라 일렀다. 조슈아와의 사건으로 섣불리 권하지 않게 됐다.

    남자는 쓸데없는 모험심이 없었다. 후회할 거라 말하기에 냉큼 안 먹는다고 했다. 벨리타는 크게 웃으며 잘 생각했다며 고기를 갈랐다.

    답지 않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벨리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름이 뭐였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적막을 깨고 벨리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달그락거리는 식기들의 소음과 뒤섞인다.

    “이름 잊었다고 삐쳤잖아. 말해봐.”

    가벼워 낭랑할 정도의 톤이었다. 남자는 그 말에 비참함까지 느껴야 했다. 삐쳤다고 할 정도의 가벼운 감정이던가. 나이프가 고깃덩이를 짓눌렀다. 꾸덕한 소리와 함께 나이프와 그릇이 부딪친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벨리타를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 화가 난다. 얄미웠다.

    “기억해 내셔야죠. 동생의 이름 아닙니까.”

    고기와 붉은 채소를 한입에 넣어 씹는 벨리타는 눈만 깜빡였다. 물론 씹는데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표정이 너무 짜증 난다. 이 새끼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얼굴. 태평한 태도.

    휘두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신나게 휘둘린다.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벨리타는 음식을 삼켜내고서야 입을 열었다.

    “고집부리지 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어.”

    “그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그러십니까.”

    “그랬으면 좋겠어?”

    벨리타가 탁, 포크를 내려놓았다. 네가 그럴 리가 없다는, 다 안다는 듯 하는 태도였다. 하늘과 풀이 섞인 푸르른 눈동자를 바라보자면, 숨길 수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무게감. 섣불리 대할 수 없는 거리감이 벨리타의 시선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아팠으면서, 나이도 어리면서 그 나이에는 가질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한 번밖에 본 적 없다고 해도 어려운 사람이다. 남자는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입니다.”

    “그래, 데이비드. 올해 몇 살이지?”

    “열일곱, 입니다.”

    “졸업은 언제 하고?”

    “내년에…… 합니다.”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뭘 하는지, 성적은 어떤지, 친구는 많은지. 쉼 없이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홀린 듯 대답했다. 당연하게 대답해야 하는 것처럼. 데이비드는 미묘한 감정에 고기 조각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간 알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알아가겠다는 건가. 그동안 없는 사람 취급 했으면서. 미쳤다고 했지만 이렇게 미치기도 하는 건가? 미치면 남의 사생활을 캐묻고 싶어지는 걸까?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 그래, 방학은 언제 끝나?”

    “두 달 뒤지만, 조만간 돌아갈 예정입니다.”

    “왜? 더 있질 않고. 집 나가면 고생인데.”

    집이 더 고생인데요, 라는 말은 꾹 참았다. 달그락, 나이프가 접시를 가른다. 두 덩어리만 남은 고기를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불편하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미친 것도 봤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도 했으니 미련은 없다.

    열심히 가득 찬 볼을 움직이며 씹었다. 후식도 있겠지만 분명 속이 안 좋을 테니 다 못 먹을 거다. 물 한 모금 들이켜고 자리를 일어나려는 순간, 벨리타의 말에 가로막혔다.

    “난 집에 없을 테니 여기 있어. 집 놔두고 왜 나돌아 다녀.”

    “……네?”

    “나 불편하잖아. 어차피 나도 갈 데가 있고 당분간 돌아올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쉬어.”

    벨리타는 샐러드까지 싹 비우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데이비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먼저 말을 한다니. 고도의 돌려 까기인가. 너 따위가 날 불편해하다니 눈치를 주는 건가.

    더는 꼬리를 말고 달아나지 않을 거다. 미친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데이비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한 말인지, 정말 눈치를 준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으라고 했으니 있어 줘야지. 지기 싫은 마음에 부리는 오기였다.

    몸도 안 좋고 정신도 놓은 사람이 간다면 어딜 가는 건가 싶어서. 얹힐 것 같은 속을 애써 누르며 대화를 이었다. 시비도 걸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다. 솔직한 데이비드였다.

    “멀리 가시나 봅니다.”

    “그렇게 됐어. 며칠 뒤에 갈 예정인데, 그동안 좀 참아보렴.”

    “하하, 정신병원이라도 가시나 봅니다?”

    선을 넘은 말인 건 인정한다. 무례한 말인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시비 걸고 싶은 마음에 심한 말을 했다는 점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등짝이 저릿저릿하다. 그 이유는 막 던진 막말에 벨리타가 열이 받아 데이비드에게 달려들었고. 앉아 있는 데이비드의 어깨를 잡아 눌러 작은 손을 활짝 편 채 찰지게 매타작을 날렸기 때문이다.

    짜악, 짝, 짜악!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르고 작은 손이 벨리타가 먹던 빨간 야채보다 매울 정도였다.

    눈물이 고일 정도로 따가운 아픔에 데이비드는 눈물을 찍, 흘렸다. 눈물 나게 아팠다. 사용인들을 마음에 안 들면 쥐어 팼다고 하더니 손목 스냅이 예사롭지 않았다. 올해 여름 들어서 손 안 댔다더니, 반년 정도가 지나도 경력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데이비드는 욱신거리는 등을 부여잡지도 못하고 근처 언저리만 겨우 문지르며 벨리타를 쏘아봤다. 사용인들 앞에서 이런 추한 꼴을 보이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신나게 벨리타에게 시비를 걸던 모습은 기억에서 삭제된 듯했다.

    갑작스러운 폭력 사태에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며 간섭하려고 하자, 벨리타가 소리쳤다. 호랑이 같은 기세였다.

    “쳐다보지 마. 하던 거 해.”

    소곤거리며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이 싹,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데이비드는 수치스러웠다. 열일곱이나 먹어서 의기양양하게 덤볐던 가녀린 누나에게 얻어터진 꼴이 부끄러웠다. 키도 한참이나 차이 나는데. 데이비드는 이를 으득, 갈고 벨리타에게 조용히 쏘아붙였다.

    “말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폭력으로 다스리려 하십니까?”

    “대드는 동생을 말로 타이르지 못하면 매를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니?”

    “야만적이시군요.”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는 건 야만적이지 않고?”

    볼 때마다 책만 읽고 있더니 말빨도 좋았다. 얻어맞았을 뿐 아니라 말다툼에서도 졌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확 같이 머리채 잡고 싸워버려? 아니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남들 눈치 안 보이는 방법으로 이길 수 있을 거다.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방법으로.

    데이비드는 입매를 비틀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만큼 한심한 짓거리는 없다. 말로 승부를 본다. 데이비드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 하나가 차이 나는 벨리타를 내려다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니 폭력을 사용하시는군요. 제가 미처 몰라보고 실례를 저질렀네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누나에게 시비를 걸고 비꼬는 동생이 참 대견하구나. 못 본 새 참 잘 컸어?”

    “누님을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을 어찌 시비와 비꼼으로 들으실 수 있으십니까.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이해한다고 하더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뉘앙스와 표정이 있단다. 내가 그간 들여다보고 가르쳐주지 못해 참으로 아쉬운 일이구나.”

    “그러게 왜 저를 무시하셨습니까. 왜요.”

    갑자기 훅 들어온다. 자신도 모르는 기억이어서 곧바로 반박할 수 없었다. 벨리타는 입을 잠시 다물었다. 무시했다기보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렴풋이 쪼끄만 아이가 눈치를 보는 기억이 날 것도 같다. 벨리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하지 않자 데이비드는 하! 크게 웃는 소리를 냈다.

    큼지막한 손으로 테이블을 누르며 몸을 지탱한 그는 벨리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왜요? 그렇게 거침없이 대답하시더니 어찌 이제는 말이 없으십니까?”

    데이비드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왜 여태 자신을 무시했냐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이, 역겨웠다. 다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하면 해결되는 줄 아는가? 분통이 터져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소리를 내며 식기들이 흔들렸다.

    “누님은, 정말……. 너무하십니다.”

    한 단어마다 짓씹듯 겨우 뱉어낸 후, 데이비드는 테이블에서 손을 거뒀다. 새하얗게 질려 핏줄이 두드러진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테이블을 바라본다. 벨리타는 본래의 벨리타의 잘못으로 인해 화를 내고 있음을 눈치챘다.

    달래주기에는 무슨 문제인지 모르고, 내버려 두자니 안쓰럽다. 그렇다고 왜 화를 내냐 묻는다면 일종의 기만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