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사흘간 내리 앓아 힘도 없고 밥도 못 먹은 벨리타는 힘없이 질질 끌려갔다. 웬만하면 쉬게 두지 않나. 벨리타가 어지간히 얼굴도 안 보여 줬나 보다.
응접실에 끌려 도착하니 소파에 장정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잠옷 채로 끌려온 벨리타는 오는 길에 벗겨진 슬리퍼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엘라가 호다닥 주워서 신겨줬다.
포근포근한 슬리퍼를 장착한 벨리타가 라빌의 손을 떼어내고 자기 발로 걸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노란빛이 도는 옅은 주황색의 머리를 했다.
그는 라빌과 테일러에게 예의 넘치게 인사를 건넨 뒤 뒤에 서 있는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벨리타는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님이 아니십니까. 이번이 두 번째 뵙는 거군요.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다 들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살갑게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얼굴을 못 봤다고 해도 겨우 두 번 만나는 동생이라니 말도 안 된다. 벨리타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서 두 번밖에 만나지 못한 동생이 있을 리 없다.
벨리타는, 필사적으로 벨리타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나지 않는 걸까, 기억하기 싫은 것이라 지워버린 걸까. 남자는 벨리타에게 가까이 다가가 볼도 닿지 않는 허공에 쪽, 입을 맞췄다. 살가운 인사였지만 허공에 하는 건,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뜻.
빠르게 벨리타에게서 떨어진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 이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벨리타, 누님.”
옅은 푸른빛의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태까지 한 번 얼굴 보여 줬다고 이 망할 동생이라는 새끼가 교묘하게 돌려 까고 있다. 아니라고 기억한다고 쫌생이로 몰아가 줘야 하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무엇도. 벨리타는 남자를 따라 부드럽게 웃었다.
“날 너무 무시하는구나.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어쩌려고?”
벨리타는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꼬리만 샐쭉 올리는 꼴이 여유로웠다. 실상 머릿속은 난장판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원래의 벨리타를 생각해라, 그 애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시험해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네. 엘라, 난 아직 식사하지 못했으니 준비하라고 해.”
“네, 아가씨.”
깨어나셔서 기쁘다는 말을 속사포로 뱉어낸 엘라는 백스텝을 밟으며 쪼르르 응접실을 나갔다. 저건 어떻게 하는 거야.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엘라를 흘겨본 벨리타가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빤히 바라본다. 이제 밥 먹는다는 핑계로 얼굴을 안 보면 된다. 신난다.
“더 할 말이 남았니? 사흘 만에 깨어나서 식사를 좀 하고 싶은데.”
“앓아누우셨다더니 지금에야 일어나신 거군요.”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길게 찢어진 눈이 눈웃음에 접히니 순박해 보였다. 말로 사과 깎듯이 야무지게 까댔으니 신뢰는 가지 않았다. 벨리타는 의미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겨워져서 냉큼 몸을 돌렸다. 응접실 문을 잡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하지만 누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날이 밝으면 인사를 드리러 가도 될까요?”
라빌과 테일러는 냉큼 그래라 답했다. 도움이 안 되네. 부모 자식 사이면 오랜만에 만났다고 얼싸안고 눈물도 좀 흘려주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어땠니, 수다도 떨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문손잡이에 힘을 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손 위에 큼직한 손이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벨리타를 내려다봤다.
저 새끼, 저거, 따라오려고. 한 번밖에 안 본 사이라면서 뭔 할 말이 있어. 시간 보낼 게 뭐가 있느냐고.
벨리타는 하! 웃음을 쏘아붙이곤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뒤에 졸졸 따라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지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냐고. 저거 분명 시비 걸려고 따라오는 거다.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한 작은 주인 탓에 주방은 정신이 없었다. 벨리타는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사용인이 내온 식전 빵을 씹어 먹었다. 저 새끼를 씹어 먹을 순 없잖아. 벨리타의 앞에 마주 앉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묘하게 얄밉다. 괜찮으니 천천히 준비하라는 벨리타에게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벨리타는 저 남자도 귀찮고 배고프니 밥은 빨리 먹고 싶고, 자신에게 걱정의 말을 쏟아내고 싶어 알짱거리는 엘라도 신경 쓰였다. 그냥 가만히 있을까. 죽다 살아나서 왜 이렇게 귀찮은 일이 생기는가. 물로 목을 축인 벨리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따라와도 좋다고 이야기한 적 없는데.”
“동생에게 야박하시네요.”
“우리가 야박하다 따질 사인가? 내 기억으로는 아니어서.”
“제 이름을 기억하시냐에 대한 답도 못 들었습니다만.”
“답했잖아.”
남자는 벨리타의 앞에 놓인 식전 빵을 하나 들어 입에 물었다. 밥 안 먹었나. 벨리타가 슥, 빵이 담긴 그릇을 남자의 앞으로 밀었다.
“……이름도 기억 못 하시는군요.”
눈앞에 놓인 빵을 바라보며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망해 보이기도 했다. 식전 빵을 반도 먹지 않고 입에서 떼어놓은 남자는 얼굴을 팍, 구겼다.
“잘 살던 사람 인생 망쳤으면, 이름이라도 기억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건 또 뭔 개소리야. 벨리타가 언제 남 인생을 망쳐. 지 몸 건사하기도 힘든 앤데.
대놓고 벨리타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남자 또한 자극을 받았는지 라빌과 테일러 앞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미치셨다 하기에 구경하러 왔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셨다고 편지로 받아보았을 때는 드디어 내쳐지는구나, 했는데. 미치셨을 줄이야.”
“듣는 귀가 많아.”
“그래서요? 듣는 귀를 신경 쓰시느라 이름도 대답 안 하셨습니까? 차라리 잘됐습니다. 어찌 됐던 저는 가주가 될 테니까요. 제가 가주가 되면, 당신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벨리타는 남자의 말에서 기이함을 잡아냈다. 남자는 친동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과 방학 동안 집에 온 적이 없다는 것.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동생이라는 존재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충 훑어봤을 때 벨리타는 19살이 되는 해에 사건들이 휘몰아쳤다. 앓아눕지 않을 만큼만 건강을 회복해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가고 조슈아와 황태자랑 얽히면서 얼렁뚱땅 사랑을 했다.
그 과정에서 동생이 나올 타이밍은 없다. 그래서 몰랐던 거다. 어쨌든 소설을 쓴 딸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마 분명히 몸이 안 좋은 벨리타가 언제 죽을지 몰라 남의 자식을 데려온 거다. 가주 시키려고.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가문과는 별개가 아니겠는가.
나 때도 첫째 아들이 아들을 못 낳으면 둘째나 셋째 아들을 데려다 첫째한테 입양시키기도 했으니까. 익숙한 일이다. 그러니 이 남자는 친동생이 아니다. 친척이다. 생판 남의 아이를 데려와 가주 시키지는 않을 테니 분명 친척이겠지. 잘 살고 있는 아이 데려다가 가주 시키려고 드니 아이가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벨리타가 왜 외면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남자와의 관계를 알겠으니 그에 맞춰주면 될 터였다. 게다가 이 아이와는 한 번 보고 만 사이니 본래의 벨리타가 어떤 아이인지도 잘 모를 거고. 관계에 맞춰 편하게 대하면 될 일 아닌가. 그나저나 이곳 아이들은 어째 하나같이 다 불쌍해 죽겠냐. 아무튼 개운한 머릿속 덕에 벨리타는 미소를 지었다.
“가주 해. 난 관심 없어.”
난 황태자랑 쎄쎄쎄하고 현실로 갈 거니까. 이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관심 없다는 경쾌한 대답에 남자는 말문을 잃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빵을 물어뜯는다. 가주가 되려면 이것저것 공부 많이 해야 한다고 하던데. 불쌍하기도 하지. 팔자에도 없는 고생하려니 죽을 맛이겠다. 적당히 챙겨주고 데면데면하게 굴어야겠다.
먼저 시비를 걸어서 날이 선 태도로 굴었지만 이렇게 불쌍한 아이인 걸 알게 되니 매정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주가 되면 볼 일도 없고 지금 아니면 달래줄 시간도 없다. 자기는 떠나더라도 벨리타는 이곳에 남게 되니까 나중 생각해서 좀 챙겨둬야지. 심지어 벨리타 때문에 인생 꼬인 녀석 아닌가. 벨리타 이 기지배도 양심이 있으면 좀 챙겨주고 하지.
테이블 뒤에 서서 시중을 드는 시종에게 벨리타가 소리쳤다.
“얘 식사도 챙겨줘요. 내 거랑 같이 가져다 줘.”
“네, 아가씨.”
벨리타의 말에 남자는 물어뜯던 빵을 툭, 떨어트렸다. 저 사람 미쳤다더니 정말인가 봐. 자신이 알던 벨리타는 저런 사람이 분명 아니었는데.
바보같이 굳은 얼굴로 빤히 바라보자 벨리타는 눈을 접어 웃었다.
“뭘 봐. 뭐.”
“…….”
저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분명 벨리타가 맞는데. 이상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아카데미에도 소문이 쫙 퍼져서 몇 달은 얼굴 들고 못 다녔다. 네 누나 정신 놨다며? 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나 미쳤나 구경하러 왔더니 매섭게 굴었다가 갑자기 챙겨 준다.
건강을 회복했다는 편지를 라빌에게서 받았을 때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항상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지만, 막상 내쳐질 상황이 되니 두려웠다. 소가주가 되기 위해 입양되었다가 쫓겨난 사람들의 비참한 결말을 알고 있는 탓이다.
여태껏 우격다짐으로 머리에 욱여넣은 교육들도 쓸모가 없어지는 게, 인생의 반이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무서워서 잠도 편히 자지 못했다.
그래서 벨리타가 미쳤다는 소문이 내심 달가웠다. 그렇지만 벨리타가 건강했더라면 자신이 이런 고민도, 고생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미웠다. 그의 몸 때문에 팔려온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아서. 차라리 죽어버려서 정말 이 가문의 유일한 아이가 되길 바라기도 했다.
이름도 기억 못 하잖아. 얼굴도 못 알아봤잖아.
미워해도 충분하지 않나.
“같이 식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밥 안 먹었지?”
“……왜 궁금해하십니까.”
“빵 먹길래. 앉아, 밥 먹자.”
남자는 울컥했다. 그간 버거워서 간절했을 때는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이제야 자신을 챙겨준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이건 기만이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앉으라고 했어.”
“우리가 사이좋게 식사할 사이입니까? 이제 와 이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