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1화 (11/150)
  • 11화.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죽어 보면 되겠지.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살 이유가 없다. 제 전부가 현실에 있었다. 몸은 점점 힘이 풀려 늘어졌다.

    벨리타의 목을 감싸던 밧줄이 끊여졌다. 동시에 천장에서 툭,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벨리타가 어안이 벙벙해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뭐야. 벨리타가 고통스러운 목을 감싸 쥔 채 기침을 토해냈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자 끊어진 밧줄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밧줄을 잡아당겼다.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숨이 막히고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목에 느껴지는 욱신거림만 남아 있었다. 벨리타가 더듬거리며 목덜미를 감쌌다. 이젠 얼얼할 뿐이다. 그마저도 얼마 못 가 멀쩡해졌다.

    혹시 이미 자신이 죽은 건가 싶어 방 안의 사물을 만져댔다. 아주 잘 만져진다. 안 죽었다. 죽은 게 아니었다. 벨리타는 확인 사살을 위해 꽃병을 바닥에 내던져 부쉈다. 산산조각이 났다. 도자기 조각을 주워 손목을 그었다.

    피가 쏟아졌다. 카펫을 역겹게 덮은 피가 벨리타의 이상이 되었을 때 멀끔히 멎었다. 조각이 스친 자국마저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벨리타는 제 손목을 난도질했다. 곧장 피가 멎고 살이 아물었다.

    아, 죽지도 못한다.

    이딴 곳에서 죽지도 못했다. 의지도 없이 눈을 뜬 이곳에서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벨리타는 도자기 조각을 집어 던졌다. 숨이 가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기 직전에 회복되어 버리는 몸이라니. 이딴 몸이 다 있냐. 하필 희망차게 죽는 순간에 살아버리느냔 말이다.

    피를 너무 쏟아 어지러웠다. 휘청거리는 시야를 감당하지 못해 벨리타는 바닥에 널브러진다. 아 씨부럴. 이게 사는 거냐. 말이 되는 일이냐고, 이게.

    벨리타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저택은 당연히 뒤집어졌다. 작은 주인이 쓰러져 있고 카펫은 피범벅이었으며 바닥을 나뒹구는 병 조각들이 살벌했다. 처참한 상황을 발견한 건 엘라였다. 열다섯의 아이가 발견한 거다. 고작 열다섯의 아이가.

    다행히 벨리타의 몸은 멀끔했다. 피의 근원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엘라는 눈을 뜨지 않는 주인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하얗게 질려 시체 같은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새하얀 이불 속에 파묻혀 새파랗게 질려 있는 피부도 익숙하다. 그래, 이 모습이 더 익숙했다. 벨리타는 허구한 날 누워서 앓았으니까.

    카펫은 아예 뜯어내고 새로운 것을 깔았다. 혈액이 굳어 처리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도자기 조각은 샅샅이 쓸고 닦아 가루조차 남지 않게 했고 피로 범벅이 된 드레스도 버렸다. 의원이 수없이 빠르게 들락거렸다. 벨리타는 3일을 내리 잠에 들었다.

    푸르스름하게 해가 내려앉을 즈음에야 벨리타는 눈을 떴다. 기지개를 켜면서 자신이 그리 오래 잠들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낮에 쓰러졌다가 저녁에 눈을 떴으니까.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를 헛챠헛챠 흔들어 젖혔다.

    몸도 움직이고 나니 정신이 좀 맑아진다. 죽음으로 현실에 돌아갈 수 없다면 역시 남은 건 소설의 끝을 보아야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나 때는 노예거나 평민인 여주인공이 바보같이 착하고 순수해서 사랑으로 다 홀린 다음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끝났는데. 요즘 소설은 어떨지 모르겠다.

    벨리타만 봐도 성격 더럽고 아프기는 더럽게 아파 허약한 데다 낮은 신분도 아니지 않나. 시대가 바뀌어서 여자 주인공의 설정들도 많이 바뀐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은 항상 같다. 여자 주인공이 높은 신분의 남자 주인공을 사랑으로 꼬시고 결혼까지 가는 거. 역시 황태자겠지, 남자 주인공은. 소설 대충 읽을 때 보니까 걔가 제일 불행하던데.

    로맨스 소설은 항상 그렇다. 남자 주인공이 제일 불행하다. 그래서 성깔도 더럽고 더러운 만큼 잘생겼다. 자신도 옛적에 소설이나 만화를 참 많이도 읽어서 알고 있다. 얼레벌레 결혼해서 끝을 보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내용과 다르겠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얼렁뚱땅 꼬셔서 결혼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빨리 침대로 엎어치기 해서 책임지라고 하고 결혼하면 해결할 것 같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까지만 가도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개운함에 크게 숨을 뱉어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누군가 자신을 옮겼을 텐데 이상하게 고요했다. 저녁 시간이라고 엘라가 찾아올 법도 한데 복도마저 조용하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건 영 아니꼽지만, 침대 옆에 놓인 끈을 흔들어 종을 울렸다. 곧 누군가가 부리나케 달려오겠지.

    예상을 뒤엎고 달려온 건 테일러와 라빌이었다. 부모가 왜 거기서 나와? 벨리타는 당황했다. 사용인을 불렀는데 부모가 와 버렸다. 벨리타는 새하얀 잠옷을 입은 채 헐레벌떡 달려온 테일러와 라빌을 맞이했다. 벌컥 열린 문 뒤로 사용인들이 알짱거린다.

    “오셨, 어요?”

    “왔다.”

    뻘뻘 흘린 땀을 닦으며 테일러가 답했다. 라빌은 문을 닫아 사용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왜 닫지. 기억상으로는 벨리타가 부모한테 맞고 자란 기억은 없었는데. 벨리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라빌이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꺼냈다.

    “건강이 나아진 줄 알았더니, 3일을 앓아눕더구나.”

    “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단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라빌은 아무 감흥도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앙상하게 마른 벨리타의 손을 잡았다. 힘이 실린다. 라빌은 도통 얼굴 근육을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걱정과 안타까움이 무척이나 절절하게 느껴져서, 벨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죄어오는 크라바트를 당겨 느슨하게 한 테일러가 라빌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고 들어왔다. 어지간히도 뛰어온 모양이었다.

    “죽으려고 했다니,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냐. 우리가 그렇게 못 해줬던 게야?”

    “그건 아니에요.”

    그럼 대체 왜 그러느냐 바락바락 따져오는 테일러와 라빌이었다. 벨리타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너무 외로워서 자살 기도 했어요. 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어차피 내 몸도 아닌데 신경 끄세요. 라고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아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사흘을 앓아누웠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까. 벨리타는 너무도 이해가 갔다.

    티를 내지 않는 부모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벨리타를 아끼지 않았으면 그 많은 돈을 쏟아부어 간신히 명줄이라도 이어 가게 두지 않았을 터다. 그저 표현에 서툴 뿐이다. 그걸 자신이 이해했다고 해서 배려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차피 제 부모도 아니었다. 몸의 주인을 위해 달려왔고 걱정했다. 진짜 부모는 이미 죽어 없는데, 이런 상황이 닥칠수록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벨리타의 부모는 세월을 견디지 못했다. 가루가 되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었다. 울고 혼절하고 눈이 부어 쓰릴 때까지 눈물을 쏟아냈었다.

    부모의 걱정은 달다. 너무도 달아서 견딜 수가 없다. 제 부모가 아님을 알고 있어도 뱉을 수가 없다. 벨리타는 미지근한 온도로 겨우 미소를 지었다.

    “아픈 이유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 나가고 싶어요. 집은 너무 답답해요.”

    뱉을 수 없지만 삼킬 수도 없다. 이 걱정을, 느껴지는 애정을 피하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고 이곳에서의 것들은 가짜니까. 마음을 줘 봤자 자신만 아프다. 하루빨리 남자 주인공을 코 꿰어서 결혼 치르고 떠나고 싶다.

    젊음을 즐기는 건 좋지만 역시. 내가 있는 곳이 좋다. 나 자신 그대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곳. 내 전부가 있는 곳. 심지어 이곳은 불편하고 어렵고 음식도 별로다. 춤추면서 부비부비도 하고 연애도 좀 하고 실컷 놀려고 했는데 뭐만 하면 미치셨다, 보는 눈이 많다, 씨불여 대니 짜증만 났다.

    나가고 싶다는 말에 테일러와 라빌은 인상을 찌푸렸다. 깨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는데 나가고 싶다고 떼를 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가게 했더니 이상한 친구 놈을 만들어오지 않았나. 이번에 나가서 대체 어떤 친구 녀석을 만들어올지 아찔할 지경이다.

    “어딜 나가겠다는 거니, 집에서 잘 지냈잖아.”

    “샤를로트 백작 부인이랑 친구 했어요. 놀러 오라고 하셨으니 놀러 갈래요.”

    신관에 대해 말을 얹던 백작 부인이었다. 조슈아의 일도 있고 언제 같이 만나서 티파티 해요, 라고 했으니 찾아가도 된다. 물론 갔다가 황태자 자빠트리러 갈 거지만. 수도와 가까운 곳에 작은 영지를 두고 있으니 친구 핑계로 들락날락거리면서 황태자를 만날 구실만 찾으면 된다.

    “샤를로트 백작 부인……? 네 나이대의 영애가 아니고……?”

    “친구에 나이가 어디 있어요.”

    “그건 그렇다만……. 편지로 연락 보내 보고 답이 오거든 가거라.”

    “테일러, 여보. 그 이야기도 전해주어야죠.”

    “잊고 있었네. 네 동생, 아카데미에서 이번에 방학이라고 온다고 한다.”

    예? 벨리타에게 동생이 있다고요?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요. 벨리타는 펄쩍 뛸 뻔했다.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소설이 다 있나. 분명 소설에서는 동생 안 쓰여 있었잖아. 아무리 대충 읽기는 했어도 동생의 동자도 못 봤다. 딸내미 천재 작가라고 했던 거 다 취소다. 뭐 이딴 소설을 썼어.

    아카데미는 학교 아닌가. 귀족들만 다닌다는 학교. 벨리타는 몸이 약해 가정교사로 때웠지만 동생은 잘 다녔나 보다.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별로 보고 싶지 않다. 동생이 뭐야, 생판 남남이지.

    벨리타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자 테일러와 라빌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동생 안 반기는 누나가 당연한가? 벨리타 성격이면 그럴 만도 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편지를 쓰렴. 보내줄 테니. 답을 기다리는 동안 동생과 시간을 보내도 좋지 않겠어? 벨리타, 이제 그만 인정해 주거라.”

    라빌이 상냥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뭘 인정을 해요. 뭐 하는 녀석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뭘 인정을 해. 내가 인정하나 마나 동생이라면 동생인 거지. 벨리타는 동생이 뭘 하는 녀석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빨리 황태자랑 결혼식 뎅뎅 울릴 생각뿐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빌이 들어와도 좋다, 허락하니 집사장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도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현재 응접실에 계십니다.”

    라빌과 테일러가 그러냐, 대답하며 발걸음을 뗐다. 떼었다가.

    “얼굴은 보여주렴.”

    벨리타도 질질 끌고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