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벨리타가 장갑을 벗어 조슈아의 손에 끼웠다. 제 주인을 찾아가니 알맞게 꼭 맞는다.
“슬슬 들어가야죠. 주인공이 없어서야 쓰겠어.”
“네, 들어가야죠.”
“그래도 그 눈 부은 거는 좀 식히고 와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 네. 주의하겠습니다. 영애에게 폐 끼치지 않도록 할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장갑 덕에 온기를 품은 손이 조슈아의 부은 눈을 덮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가려진 시선 너머로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보면 부끄러울 것 아니야. 그러니까 식히고 와요.”
눈꺼풀을 여린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손길이 떨어지고 감았던 눈을 떴다. 벨리타는 이미 몸을 돌려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파텔 후작 영애……!”
다급한 부름에 걸음을 멈춘 벨리타가 몸을 돌렸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마른침을 삼키고서야 겨우 말을 잇는다.
“저, 아직 제가 춤을……. 시작하지 않아서. 다들 못 추고 계실 텐데…….”
“그래요? 그럼 빨리 눈 식히고 와야겠네.”
“그게, 그러니까…….”
“알아요. 같이 추자는 소리잖아.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오라고요.”
입꼬리를 바짝 올리며 대꾸한 뒤, 벨리타는 여느 때처럼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커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벨리타에게 쏟아졌다. 빛을 두른 벨리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조슈아는 홀린 듯이 생각했다.
저 사람은 빛이 나는 사람이다.
내가 따를 사람이다.
생각보다 조슈아는 빨리 나왔다. 아까 수다를 떨던 부인들과 함께 수다를 재개한 벨리타는 부인들의 이름, 사는 곳, 현재의 고민거리와 지금 하는 일 등 모든 정보를 얻고야 말았다. 하루 만에 친구가 되어버린 부인들과 벨리타는 언제 우리 동네 놀러 오라며 나중까지 기약했다.
아직 눈가가 붉은 조슈아가 겨우 벨리타를 찾아냈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고. 제일 안 어울리는 곳에 있던 탓이었다. 조슈아가 손을 내밀고, 벨리타는 웃으며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이끌려 간 홀의 정중앙에서 바뀐 곡과 함께 벨리타는 조슈아에게 몸을 맡겼다.
익숙한 리드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유려한 춤사위와 빼어난 외모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약간은 빠른 템포인 노래에 벨리타는, 신명 나게 팔다리를 흔들어 젖히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참았다.
춤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자, 벨리타는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로 사람들 기다리니까 적당히 하고 끝내자고 속삭였다. 조슈아는 아쉬운 티를 팍팍 풍기며 춤을 끝냈다. 둘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짝을 이루어 춤을 췄다. 벨리타의 말대로 사람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아쉬움에 조슈아가 벨리타를 쫓자, 벨리타는 어딜 주인공이 쏙 빠지려고 하냐며 저기 가서 놀라고 쫓아냈다. 아까까지 훈훈하게 위로해주던 사람은 어디 가고 저리 매몰차게 굴까. 하지만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안달이 났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상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벨리타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은 벨리타에게 부담스러웠다. 뭔데 저렇게 쳐다보냐. 사람들하고 뭔 얘기를 못 하겠다. 어린 영애들은 대화가 안 맞아서 힘들고 영식들은 자꾸 자신을 꼬시려고 하기에 짜증 난다. 뭔 춤을 그리 추자고 들이대는가.
부인들과 대화가 제일 재미있는데, 시선들이 너무도 거슬리고 민망해서. 물론 후작 영애와 잘해 보려는 영식들도, 친해지려는 영애들도 이해는 갔다. 원래라면 얼굴도 안 비칠 파텔 후작 영애 아니던가. 이럴 때 아니면 그 대단한 영애와 언제 말을 트겠느냔 말이다. 결국 벨리타는 자리를 이탈했다.
인기 많은 건 좋지만 너무 많은 건 역시 부담스럽다. 벨리타는 유유히 연회장을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답답했던 드레스는 벗어버리고 머리를 대충 질끈 묶은 채 엘라와 야무지게 디저트를 먹었다.
*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파티는 끝이 났다. 겨울은 사교계 시즌이 아니었던지라 드물게 열린 파티에서 뽕을 뽑으려는 사람들 덕에 생각보다 오래 춤바람이 이어진 탓이다. 다들 녹초가 되어버려 조슈아의 저택에서 잠을 청하거나 곧장 떠났다. 그 자리에 붙들려 있던 조슈아도 비척대며 업무실로 돌아왔다. 딱 한 서류만 보고 자려고 했다.
책상에 놓인 벨리타의 디저트와 선물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독이 들었을까, 주술이 걸려 있을까 의심하느라 선물도 확인을 못 하고 있었다. 바쁜 업무도 한몫했고. 조슈아는 서류 확인은 미뤄두고 벨리타가 첫날에 주었던 선물 포장지를 뜯어냈다.
구두였다. 가죽으로 공들여 만들어진 구두. 웬 신발 선물일까. 그 위에 놓여 있는 짧게 쓰인 편지를 읽었다.
[좋은 신발을. 신으면. 좋은 곳으로 간대요. 잘. 신어요.]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적은 티가 났다. 단어마다 찍힌 점은 뭔지. 웃음이 샜다. 이 선물을 준비할 즈음이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몰랐을 텐데도. 어떻게 이리 잘 아는 것처럼 구는지.
타인이 보았을 때 자신은 이미 좋은 곳에 있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젊은 남작이 더 좋은 곳으로 가 봤자 더 얼마나 좋은 곳으로 가겠다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정말로.
엉성하게 되어 있는 포장을 풀어 눅진한 마들렌을 입에 넣었다. 달고, 푹신했다. 목이 막힌다. 목이 막혀서, 눈물이 났다.
*
아침 식사도 챙기지 않고 벨리타는 나갈 채비를 했다.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떠날 예정이었다. 마차에 가득한 짐을 싣고 마차의 바퀴와 말을 정비하는 사용인들을 바라봤다.
저 녀석들은 밥은 먹고 일하는 걸까. 먹었겠지.
벨리타는 넓은 정원을 휘적거리며 산책했다. 뒤에 졸졸 따라붙은 엘라와 아침은 역시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벨리타는 저택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슈아의 침실이다.
간다는 말도 못 했다. 잘 지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거니, 생각했다. 자신의 말 몇 마디로 펑펑 눈물을 쏟던 조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한 놈. 고작 말뿐인 위로로도 세상이 떠나가게 울었던 안타까운 아이. 고생했다는 말 한 번 듣지 못해 힘들어한 여린 아이다.
한참을 울고 자신을 곧게 바라보던 그 시선을 기억한다. 자신의 말에 힘을 얻고 살아갈 의지를 얻은 빛나던 눈을 보았다. 남을 도왔음에서 오는 뿌듯함과 기쁨도 느꼈다.
하지만 그뿐이다. 벨리타는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말뿐인 위로가 제일 잔인하고 무서운 법이다.
조슈아가 벨리타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따른다고 하더라도 벨리타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가 벨리타를 위해 재산을 나누고 혹여 사랑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벨리타가 받아 줄 의무도 없었다. 그저 말뿐이라서. 쉽게 나오는 가벼운 것일 뿐이다. 그 어떤 사람도 생각 없이 뱉어낼 수 있는 흔한 말이니까.
무책임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한마디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벨리타는 이곳에서까지 남을 건사할 생각은 없었다. 허구였고, 거짓이었으며 본인의 것은 없었으니까.
조슈아에게 그리 따뜻한 말을 건넨 건, 그저 오지랖이었고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 벨리타는 최소한으로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만큼의 호의만 베풀었을 뿐이다.
벨리타의 말에 구원이라도 받았다는 것처럼 구는 건 온전히 그의 책임이었다. 잠시 신세를 지게 된 집의 주인이 자신의 실수로 발작한다면 그 어떤 이가 외면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발작한 아이를 진정시킬 방법을 알고 있기까지 한다면. 대체 누가.
파티에서도 그랬다. 발작한 이유가 궁금할 수 있는 거고, 오지랖으로 챙겨줬던 아이가 손에 큰 흉터를 갖고 있다면 걱정할 수 있었다. 조슈아가 살아온 평생 속에서 타인의 악의 없는 호의를 받아본 적이 있었더라면 벨리타에게 구원받을 필요도 없었다. 벨리타를 따르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저 조슈아가 남의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어서. 자신의 편이 있던 적이 없어서였다.
벨리타는 최소한의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고, 조슈아는 매달렸을 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지 않으려 했다. 툭 던진 호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까.
마차의 정비가 끝났다. 정원을 가로질러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파텔 후작 영애!”
조슈아였다. 외투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허둥지둥 쫓아 나온 꼴이 우스웠다. 벨리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 앞까지 서둘러 뛰어온 조슈아가 문을 콱, 잡아 닫히지 않도록 저지했다. 아직까지 잠들지 못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말도 없이 떠나시다니요.”
“그렇게 됐네요.”
“조금 더, 계셔도 되실 텐데요…….”
문을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벨리타는 우악스러운 손을 바라보다 결국 조슈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허공에 흐트러졌다.
흉하게 부은 눈과 일그러진 표정이 볼만했다. 바보 같은 몰골이었다. 피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벨리타는 조슈아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힘없이 문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렇게나 날을 세우고 의심하던 사람이 이리도 무너진 꼴이 하찮을 지경이었다.
“오래 신세를 졌으니 이제 가야죠. 고마웠어요.”
“정신이 돌아오신 건가요?”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도 안 되어 사람이 변했다. 봄의 볕처럼 따스하던 사람이 이렇게 매몰차졌으니 의심스러울 법도 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했던가. 지금은 제정신인 걸까.
조슈아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벨리타의 얼굴 또한 찡그려졌다.
“……들어가서 잠 좀 자요. 얼굴이 이게 뭐야. 사람들 갈 때 인사해줘야 하는데, 그 얼굴이면 안 되죠.”
“……가지 마세요.”
조심스럽게 벨리타의 코트 자락을 쥐었다. 혹시라도 미움받을까, 거절당할까 두려움이 서린 소극적인 손길이었다. 애써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던 눈가가 뜨거웠다. 목 안쪽에 열이 오른다.
벨리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급해지는 마음에 조슈아는 체면도, 시선도 잊고 울먹거렸다.
“최소한…… 다음이라도 기약해주세요. 다음에, 나중에 또 만나자고, 말해주세요.”
아,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어떻게든 살아가던 아이를 내가 무너트렸구나. 회피할 수 있는 책임이라곤 없었다. 이 무게를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가볍게 여겼다. 어른의 책임을 아이에게 돌려버렸다. 내가, 잘못했다. 이건 벨리타가 무책임했다.
겨우 살아가던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놓고는 내빼버렸다. 저렇게 처량하게 우는데, 미움받기 싫어 눈치만 보는데. 벨리타는 외면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