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8화 (8/150)

8화.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계절이 지나는 것 모두 침대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 세계에서의 의학으로 밝혀지지 못한 병을 앓으며 한 번 병세가 도질 때마다 생사를 오가야 했다. 고통을 공감해 줄 사람 하나 없고 찾아주는 사람 없었다. 몸 주인의 성격이 더러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세계의, 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왜 이렇게 불행한지. 허구인데 좀 행복하게 살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가짜 인물들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벨리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데뷔탕트 한 번 했다고 죽기 직전까지 아팠어요, 나. 그래서 초대장이 쌓여도 한 번을 못 나갔어. 나가 봤자 고작 티파티 정도였어요. 그것도 상태 봐서 겨우 나갈 수 있었고……. 집이 넓어 봤자 뭐해, 난 침대에서만 사는데. 그쵸? 사람이 계속 시체처럼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미쳐요. 정신을 놔버려.”

그래, 미치겠지. 소설에서의 벨리타는 미치지 않았지만 그대로 계속 뒀다가는 미쳤겠지. 벨리타는 남 이야기 하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정말 남의 이야기였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누가 들어도 안타까운 과거, 현재의 벨리타 상태가 납득이 될 만큼의 괴로운 지난 일들을 들으며 조슈아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조슈아의 손을 덮어 쥔 벨리타의 손이 추위에 벌겋게 질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미쳤다가도 정신이 돌아오고, 괜찮다가도 정신이 나가버리고. 근데요, 나는 행복해. 미치고 나서야 행복한 게 뭔지 알겠어요. 몸을 움직이고 밖이 얼마나 넓은지 보는 게 좋아요. 나는 그래요.”

벨리타도 분명 그랬겠지. 자신이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세상에 나왔을 때 느꼈던 기분과도 같았다. 세상은 넓었고 어려운 만큼 즐거웠다.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왜 미쳤는지, 본래의 벨리타와 다른 짓을 해도 납득이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불행했지만 이렇게 되어버려서 지금 행복하다. 대체 누가 그 말을 듣고도 정신 차리라고 하겠는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스토리. 조슈아는 가슴 안쪽이 일렁거린다고 느꼈다. 이렇게나 아픈 과거를 가지고도 자신을 챙기던 어린 영애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새빨갛게 질린 벨리타의 손에 자신이 끼던 장갑을 끼웠다. 작은 손에 큰 장갑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조슈아가 일그러진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동상 걸리겠어요.”

“착하기도 하지. 고마워요.”

“……착하지 않아요. 저는…….”

“무슨 소리예요, 매일 끼고 다니는 장갑도 벗어 주는데 착하지 그럼. 그런 게 어디 쉬워요?”

늘어지는 장갑을 낀 작은 손이 허공을 흔들었다. 자랑이라도 하듯이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호의를 베풀었을 때 돌아오는 감사 인사. 조슈아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나 들뜨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마음 가는 대로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입 안이 시큼하다. 불쾌한 기분에 손을 들어 입을 가리자, 소스라치게 놀란 벨리타가 조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화 내내 일그러진 적 없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조슈아의 손등을 눈앞까지 끌어놓아 살펴보았다.

화상 자국과 살이 벌어져 헤집어진 흔적. 학대의 잔재. 처참한 손등이었다. 딸의 소설을 대강 읽었을 때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만 보았던 터라 이리도 심각할 줄 몰랐다.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나. 자신의 손등도 아닌데 본인이 더 아픈 얼굴을 했다.

조슈아는 가슴께가 일렁이고 코끝이 미어지는 감각이 낯설어 다급히 손을 빼냈다.

이런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다. 바보 같아지는 이 감각을 느낄 필요 없었다. 처참해지는 이 기분이……. 멀찍이 달아난 조슈아의 손을 다시 한번 끌어오며 벨리타는 높낮이가 엉망이 되어버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손이 왜 이런대요. 예쁜 손이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무, 례하군요.”

일종의 자기 보호였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이제 와서 무례를 따지기에 늦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벨리타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예쁜 손. 자신이 예쁜 손이었던 적이 있던가? 수치스럽고 괴로워서 검은 장갑으로 가렸지 않았나.

흉측하게 흉터만 남은 이 손이 예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어느 누가 이딴 손등을 보고 예쁘다고 하겠어. 눈가가 아려왔다. 아려오는 건지 시큰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들었는데 백작 부인이 신관인가 뭔가 안대요. 흉터도 싹 고쳐준다더라. 괜찮아, 나을 수 있어요.”

“……이것도 오지랖, 인, 가요?”

“아니, 이건 걱정.”

얼마나 오래 봤다고 걱정을 했다. 이 어린 사람이, 미쳤다는 이 사람이. 네가 뭔데 날 걱정해. 네가 뭐라고. 조슈아를 걱정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한 명이 없어서 지금의 조슈아가 되었으니까.

그래, 이미 늦었다. 이 역겨우리만치 간질거리는 따스함을 놓을 수 없다. 처음 받아보는 걱정과 따뜻함에 취해 이미 견딜 수 없다. 그리도 떨어지지 않던 입이 이제는 너무도 쉽사리 열렸다.

“……저는 입양되었어요. 부모는 이미 다 죽었고 소이트 자작 부부는 아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모 없는 제가 후계자가 되려고 갔어요. 난 선택한 적 없었는데, 선택권도 없었는데……. 입양되고 겨우 2년 지났다고 아이가 생겨서, 난…….”

횡설수설 말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평소처럼 논리정연하게, 매끄럽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점점 심장 부근이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입 밖에 꺼내 본 적도 없는 말을 하려니 어려웠다.

“후계는 당연히 동생이 받았어요. 나는 쓰레기였어요, 벌레였고요. 밥 먹을 가치도 없고 숨 쉴 가치도 없는 벌레……. 눈에 띄면 맞고 또 맞았어요. 뭘 보냐고 채찍으로 맞고, 죽어버리라고 지팡이로 맞고……. 시종들이 비웃고 다 썩은 밥을 줘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나한테 아무것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엉망진창으로 쏟아지는 말에도 벨리타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안타까움이 배어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일평생 담아두고 썩혀만 두었던 말을 지금에서야 꺼낼 수 있었다.

“……살고 싶었어요. 인정까지 아니더라도, 그냥 살고 싶었어요.”

완전히 박살났다. 그간 어떻게든 막아두고 깊이 처박아두었던 과거들이 토해졌다. 단단히 봉해두었던 것이었다. 억지로 잊고,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견딜 수 없었던 조각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흩어진다. 대면하는 순간마다 처참히 짓밟혔던 기억들이, 뱉고 나니 찰나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무게가 덜어졌다.

숨통이 트였다.

“힘들었겠구나. 정말 잘 살아줬어.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 얼마나 힘들었겠어……. 이 어린애가 얼마나 고단했어. 잘했어, 잘 커줬어. ……너무 잘했어.”

눈가가 시큰거리던 게 눈물이 나오려고 그랬나 보다. 벨리타의 말 한마디마다 무거웠고 진심이 짙게 묻어났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이 말을 들으려고 악으로 버텨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벨리타의 말은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매 순간이 죽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살고 싶었다. 그래, 이딴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죽을 순간마다 이를 악물고 살아남았던 이유였다. 내가 살아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던 밤마다 울적한 기분에 속이 상하던 아침마다 꿋꿋이 일상을 이어 나간 보상 같았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고맙다, 잘 커줬다, 잘했다.

힘들었겠구나.

이 말을 듣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살았구나. 눈가가 뜨거웠다. 벅차오르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서럽게 울었다.

조슈아의 손을 잡고 있던 벨리타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조슈아를 끌어안았다. 그때의 침실에서 구석에서 그러했듯, 한참이나 큰 아이를 품에 가득 안고 토닥였다. 묵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졌다.

“고생 많았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니. 어른이 다 잘못한 거지. 너는 잘못 없어. 버틴 게 대단한 거야. 너무 잘한 거야.”

잘못한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부모가 죽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어른들의 입맛대로 입양되고 어른들의 마음대로 폭력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야 알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듣는 순간 온몸의 힘이 다 풀리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심장이 가라앉고, 뱃속이 뜨겁고 손발에 힘이 풀리는 이 감각은 뭘까.

고작 위로의 말일 뿐인데도 왜 이렇게 벅차오를까. 이 안도감과 해방감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조슈아는 무너지듯 벨리타에게 몸을 기댔다. 아이처럼 마음껏 울어본 적이 13살 이후로는 없었다. 코를 간질이는 향유의 향긋한 향과,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온기. 무거운 진심. 과거를 대면해도 잔뜩 꼬리를 말고 달아날 일이 없어졌음을 깨달은 순간, 조슈아는 직감했다.

구원이었다.

거창한 것만이 구원인가. 벨리타는 말 몇 마디만으로 조슈아에게서 어둠을 헤쳐 나갈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구원이었다.

한참을 소리 내어 울던 조슈아는 길고 긴 음악이 다음 곡으로 넘어가서야 눈물을 그쳤다. 퉁퉁 부어버린 눈과 흠뻑 젖은 벨리타의 드레스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보여줬다.

여인의 드레스에 체통 없이 눈물 빨래를 해준 조슈아는 허둥지둥 손수건으로 벨리타의 드레스를 닦아내려 했다.

벨리타는 기겁하며 이 녀석이 돌았나, 하고 조슈아의 길고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조슈아는 아악, 단말마를 토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몇 번이고 말한 끝에서야 벨리타는 조슈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검은 가죽 장갑에 금빛 실 뭉텅이가 남았다.

은인 벨리타에게 추위 속에서 눈물 젖은 드레스를 입게 하고 한참을 붙잡아두었다는 게 미안해서 조슈아는 안절부절못했다. 푸흡,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하던 조슈아는 벨리타를 바라봤다. 웃음을 참으려 했던 벨리타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우리 꼴이 이게 뭐예요. 남들이 보면 내가 남작님 혼낸 줄 알겠어.”

해맑은 웃음에 조슈아도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바보같이 굴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마음이 편한 순간은 처음이었다. 마음 놓고 크게 웃어본 적 없던 조슈아는 오늘 광대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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