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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7화 (7/150)
  • 7화.

    벨리타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신관, 그거 무당이나 목사 같은 거 아니었나? 종교인이라면 이젠 질색이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우리 애는 몇 년 전에 사냥터에서 팔을 잃을 뻔했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했다가 신관한테 보여주면 치료해준다고 하기에.”

    백작 부인은 쏠리는 시선이 약간 부담스러운지 테이블에 놓인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더 감질났다. 말하는 도중에 끊으면 어떡하나. 재방송 드라마 중간에 광고 타임도 아니고.

    벨리타는 ‘그래서요?’하고 뒷이야기를 채근했다.

    “데려갔죠. 사정사정해서 치료 좀 해달라고, 내 아이 죽어 간다고 울고불고했어요.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애 죽어 가는데 체면이고 뭐고 없어지더라고요. 신관이 기도를 막 하더니 우리 애 팔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데, 저는 정말 살다 살다 그런 일은 처음 봐요. 빛이 나오면서 애 팔이 썩어가던 게 싹 나아지더라고요.”

    벨리타는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어느 종교인이 치료까지 하느냔 말이다. 무당이 굿을 해도 사람은 치료 못 하는데. 부럽다. 저리 쉽게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부러웠다. 자신의 세계에서도 신관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부인들은 조금 놀란 얼굴만 할 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음알음 신관이 치료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이 이야기의 시작을 끊은 남작 부인이 알려줘서 고맙다며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오늘 당장 돌아가서 아이를 신관에게 보여야겠다고 했다.

    저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안다. 벨리타에게 너무도 절절히 와닿았다. 저 남작 부인은 당장이라도 돌아가 아이를 데리고 신관에게 가고 싶겠지. 하지만 돈과 정보를 위해 참석한 자리를 벗어나면 불이익이 있을 테니 참을 뿐이다. 벨리타는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켰다.

    “저는 신관이 자잘한 상처만 치료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성력이 좋은 신관들만 큰 상처까지 치료해 준다더라고요.”

    “그럼 시간이 지난 흉터도 치료해 주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신관 능력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다들 숨기고 속에서만 앓던 문제들을 꺼내 놓았다. 자신의 아이가 달고 있는 흉터, 상처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던 어머니들이었다.

    내가 조금 더 세심하게 챙겼더라면, 내가 조심했더라면, 하고 속내에서만 끙끙 앓아왔던 죄책감들.

    이 이야기가 오가며 부인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벨리타의 얼굴도 밝아졌다. 밝아진 체였다.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도 신관이라는 존재가 있었더라면. 의학으로 불가능한 치료까지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이곳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희망찬 얼굴들이 샘이 나서 결국 벨리타는 대화 도중 몸을 일으켰다. 부인들이 어딜 가느냐고 잡자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요. 마저 얘기 나누세요. 다시 돌아올게요.”

    횡설수설, 말을 끝마치자마자 테라스로 걸음을 뗐다. 보이지 않는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어 테라스 앞에 도달하자 창문이 열린다. 상대의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코가 찡, 울린다. 코를 붙잡고 고개를 들자 식당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서 있었다.

    “아~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어…….”

    와 씨.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다. 얼굴이 백 점 만점에 이백 점이다. 사르르 접히는 눈이 야하다. 웃는 게 뭐 이렇게 야해. 로브 차림일 때 보았을 때도 잘났는데 제대로 차려입으니 식은땀 나게 잘났다. 조슈아도 나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벨리타의 취향은 어디 안 갔다.

    벨리타가 아프지 않다며 고개를 도리질 치자, 남자가 작게 웃으며 벨리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말이라도 걸어 보려 했지만 남자는 이미 벨리타를 지나쳤다. 눈 호강했다고 치자. 두 번 만나면 인연이라던데. 또 만나기를 바란 벨리타가 아릿아릿한 코를 문지르며 커튼이 쳐진 테라스 문을 열었다.

    “파텔 후작 영애?”

    그곳엔 소이트가 있었다. 뒤늦게야 커튼이 쳐진 베란다는 사람이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뜻임을 생각해낸 벨리타가 멋쩍게 웃었다. 아까 그 남자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던가? 혹시 둘이…….

    역시 잘생긴 남자는 게이 아니면 짝이 있다더니. 둘 다였다. 커튼을 친 테라스에서 둘이 있는 거라면 밀애라는 말이 있던데. 인생 씨불탱 진짜…….

    역시 나가줘야지. 나가줘야 예의지. 벨리타는 다시 백스텝을 밟았다.

    “……계셔도 돼요.”

    “들어오면 안 되는 거잖아요. 커튼까지 쳤는데. 아까 남자분이랑 있었고…….”

    “아, 그건 사업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뿐이에요.”

    벨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그렇지? 로맨스 소설 서브 남자 주인공이 게이일 리가 없었다. 그럼 그 잘생긴 남자도 아닐지 모른다. 제 남자가 될 것도 아닌데 김칫국만 한 대접을 들이켰다. 하지만 원래 김칫국은 시원하게 들이켜 줘야 제맛이다. 소이트가 피곤한 기색을 비치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남아 있는 거니까……. 혹시라도 염문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상스러운 미소였다. 가식으로 점철된 부드러운 미소. 벨리타는 백스텝을 물리고 소이트 옆에 섰다.

    겨울바람이 시렸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소리와 악기들의 선율. 바람 소리까지. 벨리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복잡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난간에 기댄 벨리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향기로운 향유의 냄새가 퍼졌다. 소이트는 한 폭의 명화 같은 벨리타의 자태를 바라보았다가 헛웃음을 삼켰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데도 어색함이 없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그새 편해진 걸까. 소이트는 위스키에 취했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영애는 자기가 이상한 사람인 거 알고 계시나요?”

    취했으니까. 취하면 속마음이 조금쯤은 나올 수 있다. 취하지도 않은 소이트가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뭐가 이상해.”

    벨리타가 조용히 웃었다. 이상한 말을 들은 반응이었다. 짧은 침묵. 벨리타의 흐트러져가는 웃음소리와 마른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섞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컴컴한 하늘에 별이 수놓여 있었다. 예쁘네. 벨리타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혼잣말을 뱉었다.

    “이상해요. 당신 정말 이상해. 알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요.”

    벨리타의 시선이 하늘에서 소이트에게로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빛 너머로 소이트의 찌푸린 얼굴이 담겼다.

    “나에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죠? 날 이용할 생각이라면 말해줘요. 한 번 정도는 당해줄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곱게 인위적으로 가려진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두려움이 남았다. 벨리타의 호의에 녹아 매달리게 될까 봐, 자신을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오늘 느꼈던 울 것 같았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베풀어준 온정을 잊지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거다.

    정말 벨리타가 속셈이 있어 자신에게 잘해 준 거라면 목적을 이룬 뒤에는 미련 없이 떠날 테니까. 차라리 빨리 해결해서 감정을 죽이고 싶었다.

    이 따뜻함은 독이었다. 자신을 녹여버릴 독. 회복도 되지 않을 치명적인 것이다.

    벨리타가 무엇을 요구할까, 광산의 공동 독점권? 유통권? 무엇이든 이젠 상관없었다.

    자신의 옆에 서서 평온한 얼굴을 하니까. 하늘을 보고 예쁘다고 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러운 속셈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제 머릿속에 위험신호가 떴으니까. 이대로 두면 자신은 속절없이 나락 끝까지 떠밀어질 거다.

    벨리타가 웃었다.

    “오지랖이지 뭐. 내가 뭘 얼마나 해줬다고 그만하래요? 나보다 남작이 더 이상한 사람이야.”

    조슈아 제이든 소이트는, 자신이 이미 나락 끝까지 떨어져 있었음을 알았다.

    표정 참 볼만했다. 가식으로 점철된 그 얼굴이 무너진 꼴이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스스로의 얼굴을 가렸다. 검은 가죽과 하얀 피부가 꽤 잘 어울렸다.

    벨리타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내고 조심스레 조슈아 제이든 소이트, 조슈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있잖아요. 남작.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죠? 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말씀해 보세요.”

    “전에 있잖아요. 밥 먹다가 뛰쳐나간 거. 왜 그랬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걱정이 묻어났다. 치부를 들추고 싶어서가 아닌 순수한 걱정이었다. 조슈아도 그를 모르지 않았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고 가식과 진심 정도는 쉽게 구분했다.

    그러나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고, 괴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목 끝까지 차올랐는데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에게 기대어 본 적도 없던 탓이다. 본인 이외의 타인에게 속내를 털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분명 이야기를 해도 벨리타는 자신의 치부를, 불쾌한 과거를 이용하지 않을 거다. 믿음이 있었다. 신뢰가 있어도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종류다. 조슈아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리던 벨리타는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의 손을 덮어 쥐었다. 차가운 가죽 너머로도 느껴지는 상냥함에 조슈아는 목 안쪽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말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듣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터놓기란 힘든 일이니까. ……그럼 내 얘기 먼저 해 줄까요?”

    서로의 비밀 하나씩 알면 공평하지 않겠냐며 웃는 모습이 부드러웠다. 벨리타도 안다. 듣는 이 없어도 혼자 힘든 일을 이야기하기 힘든데, 듣는 이가 있으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부담스러운지.

    벨리타는 자신의 기억 대신, 몸 주인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자신의 기억은 이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니까.

    몸만 빌려 실존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미쳤다는 소문이 있더라도 벨리타는 인정받지 못할 존재였다. 본래의 벨리타도 꽤 힘든 일을 여럿 겪었으니, 조슈아와의 이야기와 등가교환은 될 것이다.

    “남작도 알다시피, 나는 아팠어요. 원래부터 몸도 약해서 주위에 친구도 없었어요. 하루 종일을 침대에서 살았으니 책만 읽고 살았죠. 부모는 원체 무신경해서 내가 사랑받는 건지, 나한테 관심은 있는 건지 반신반의하고 자랐어요. 한번 아팠다 하면 죽기 직전까지 앓으니까 성격도 당연히 더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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