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동생 덕분이지. 엘라 씨도 어서 와요. 오늘은 뭐 사 가게?”
“언니가 추천 좀 해봐. 남작님한테도 몇 개 사다 줄까 하는데 뭐가 맛있어?”
이 영지에서 20년간 디저트 가게를 운영해온 주인장 이온은 디저트를 집던 집게를 놓치고 말았다.
영지의 새로운 주인, 남작의 입에 들어갈 디저트!
하늘같이 높은 남작님을 너무도 편하게 부르는 벨리타 덕에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했다.
너무 편하게 굴어서 벨리타가 후작 영애인 것도 잊은 이온은 서둘러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디저트들을 엄선해서 고르기 시작했다.
벨리타는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아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래서 어제 얘기한 옆 동네 자작 영애 맞바람은 어떻게 됐냐고 말을 걸어왔다. 물론 이온은 듣지 못했다.
“아, 맞다, 맞다. 언니, 나 내일 집 가.”
“뭐?”
“이제 못 올 거야. 우리 집 좀 멀거든.”
이온은 집게를 한 번 더 떨어트렸다. 아니, 쟤는 왜 심장 떨어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새 집게를 들고 마저 디저트를 담으며 이온은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파티 때문에 왔는데, 내가 너무 일찍 와 가지고 있지. 오늘 저녁에 파티 딱 끝내고, 내일 일어나자마자 출발해. 언니 과자들 너무 맛있었는데 너무 아쉽다.”
“그럼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어우, 언니도. 남의 집에서 며칠이나 있었는데 무슨 염치로 더 있어. 어디 가서 욕먹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괜찮지 않나. 집도 넓고 돈도 많은데 며칠 더 있는다고 부족할 게 뭐가 있겠는가.
든 자리는 모르지만 난 자리는 안다고, 그새 떠나버리는 벨리타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이온은 아쉬운 마음에 디저트를 몇 개 더 담아 포장하기 시작했다.
벨리타가 안 줘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온이 닥치고 받아 가라며 성을 냈다. 결국 벨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엘라가 받아 들었다. 벨리타는 서비스로 받은 과자까지 계산하려 했으나 이온은 한사코 거절했다. 이온은 벨리타의 손을 잡고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이별의 말을 건넸다.
“나중에 또 와. 귀족들은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듣는 귀족 상처 주네, 이 언니가.”
“상처받든지 말든지, 또 오라고 이 기지배야. 알았어?”
“어우, 알았어, 알았어. 또 올게. 시간 나면 올게. 언니 잘 지내고.”
“너도 잘 지내. 보고 싶을 거야.”
벨리타가 까르륵 웃었다. 이별의 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엘라는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지 못하고 벨리타를 끌고 나갔다.
곧 파티가 시작일 텐데 서둘러 단장하고 간식도 먹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벨리타를 욱여넣은 마차는 빠르게 소이트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
난 진짜 이 사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소이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파티가 당일인데 산책이나 돌고 마을로 떠나버렸던 영애가 언제 파티 준비를 끝마치고 돌아왔는지 신기하다. 게다가 어느 틈에 사 온 건지 품에 안은 봉투에서 투박한 디저트를 꺼내 권하는 의도도 모르겠다.
소이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벨리타를 흘겨봤다. 주황빛 머리에 부드럽게 섞이는 붉은 드레스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시선을 돌렸다.
파티 인원을 체크하는 중에 붙어 다니던 사용인을 시켜 몰래 끌고 와놓고는 한다는 말이 고작 자기 주려고 사 왔단다. 어디서 만들었는지도 모를 디저트를 주면서! 대체 뭘 믿고 먹는단 말인가.
물론 눈 뜨고 코 베여주겠다고 했지만 이건 아니다. 이렇게 하찮은 걸 하겠다고 그런 다짐을 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러 벨리타를 피해 다녔는데, 그런 일까지 있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얼굴을 할 수가 있나.
“영지에서 소문난 맛집이더라고요. 여기 거가. 나 여기 단골이 되어 버렸잖아. 사장님이 남작 준다고 예쁘고 맛있는 걸로만 챙겼으니까 먹어 봐요.”
“……사장님……? 아,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시니 무척 기쁘군요.”
“맨날 틀어박혀서 밥은 먹는지 잠은 자는지 모르겠으니까 이런 거라도 먹어요. 밥만큼은 못하지만 단 거 먹으면 머리도 잘 돌아가고 그런다잖아. 그 일하는 곳에 두고 야금야금 먹으면 돼.”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선물을 주고 미련 없이 떠나는 벨리타였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이트는 가슴 안쪽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조금 울고 싶어졌다.
벨리타가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선물 받은 디저트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과일이 얹어진 머핀과 조각 케이크, 그 외에 작고 아기자기한 과자류들이 신경 써서 포장되어 있었다. 단번에 자신을 위해 디저트를 사왔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묘하다.
소이트는 사용인을 시켜 집무실 책상에 두라고 지시했다. 평소 같았으면 남이 사 온 걸 어떻게 먹느냐며 갖다 버렸겠지만,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복잡 미묘한 이 기분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두어 번 빗어내며 마저 일에 집중했다.
*
연회장에 사람이 가득히 모였다. 어느새 해는 뉘엿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고 연회장 끄트머리 테이블마다 음식이 즐비했다. 구석 쪽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흘렀다. 남작이 신경 써서 준비한 파티임이 티가 났다.
벨리타는 꽉 끼고 불편한 드레스 탓에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펴고는 모여드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남작의 파티에 온 후작 영애라는 타이틀은 생각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대부분 남작이나 자작, 상인들이 권력과 거래를 돈독히 하려 모인 자리였다.
그 안에서 파텔 후작가의 상단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직물과 광물, 옷에 식재료까지 섭렵해 판매하는 상단을 가진 파텔 후작가에 어떻게든 얼굴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이 오지 않았는가. 까칠한 성미에 조금만 무리해도 자리를 떠버리는 다루기 힘든 영애가 파티에 왔다.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얼굴 한번 알려서 나쁠 건 없었다. 미쳤다는 소문도 궁금했고 아는 척해서 남들한테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영애의 쾌차를 바란다, 자신은 어느 영지에서 무얼 하는 누구이다, 등등 벨리타에게 얼굴 도장을 찍으려고 난리였다. 벨리타는 호호 웃으며 제법 능숙히 상대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였지만 벨리타에게는 눈칫밥과 누적된 사회생활이 있었고 본래 벨리타의 기억도 있었다.
미친 영애, 까칠한 영애, 몸이 약한 영애 3관왕을 달성한 벨리타는 언제든 자리를 뜰 수 있는 권한까지 있어 부담조차 없었다. 그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지치기 마련이다.
한 시간은 넘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벨리타는 결국 이 펭귄 떼 같은 인간 무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현기증이 나네요. 다들 즐겁게 대화 나누세요.”
너희 때문에 정신없으니까 난 간다, 라는 말을 예의 바르게 돌려서 말한 벨리타는 모세의 기적 인간 버전을 목도했다. 비켜주지 않아 후작 영애의 미움을 사면 그만한 불이익이 없으니까.
벨리타는 사뿐사뿐 새침하게 사람이 드물게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나이가 있는 부인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어머, 벨리타 영애 아니셔요. 잘 지내셨죠?”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자작 부인이었다. 말을 터봤자 벨리타에겐 이득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 여편네들 나만 빼고 재미있는 이야기하고 있다.
“덕분에요. 무슨 이야기 하고 계셨나요? 괜찮다면 저도 끼워주세요.”
“어린 영애가 듣기엔 재미없을 거예요.”
“그건 들어봐야 알겠죠. 자, 죄송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 주세요.”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착석했다. 어느 댁 아가씨가 헛바람 들어서 가수가 되겠다며 가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선뜻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 부인들은 벨리타의 눈치만 봤다.
자신을 불편해하는 분위기를 알아챈 벨리타는 테이블에 놓인 핑거 푸드를 한입 집어먹으며 먼저 화젯거리를 던졌다.
“옆 영지의 자작 영애가 몇 달 전에 결혼했잖아요. 근데 글쎄, 그 남편이 시종이랑 바람이 났대요. 그래서 저 새끼를 죽여 살려 난리가 났는데…….”
“어머, 영애도 들으셨어요? 그거 맞바람이었다면서요?”
“정말? 난 남편이 바람 난 것만 알았지.”
“아니래요, 그게 아니라 그 집 영애도 호위 기사랑 맞바람이 났다는 거야.”
“저도 그거 들었어요. 그래서 맞바람인 김에 그냥 이혼 안 하고 계속 살기로 했다면서요?”
역시 벨리타가 화두를 던지니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옹골지게 낚여준다. 오늘 낮에 이온에게 물었던 뒷이야기까지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남편 애를 임신한 줄 알았는데 호위 기사 애일지도 모른다, 시종도 애를 임신한 것 같다더라, 애가 둘이냐, 쉼 없이 떠들었다.
그러다가 우리 애가 이제 다섯 살인데 무슨 공부를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늦둥이라 더 챙기고 싶은데 어렵더라, 로 넘어갔다.
소재가 넘어간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애들 교육은 가정교사로 부족하다, 아카데미를 보내야 한다, 가 되었다가 수도의 어디 살롱이 옷을 잘한다더라, 로 바뀌었다.
심지어 한쪽은 옷 이야기, 한쪽은 머리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벨리타도 빠질 수 없다. 머리는 어느 집이 더 잘하고 옷은 어느 집이 제일 가성비가 좋다,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멀리서 보면 나이 지긋한 부인들 틈에 낀 어린 영애였지만, 벨리타는 대화에 잘 섞여들었다.
부인들도 벨리타의 나이를 잊고 신나게 입을 털었다. 황태자가 전쟁에서 돌아오더니 미쳐가지고 막 나간다, 황후가 둘째 황자만 싸고돈다더라, 그럼 황태자는 폐태자 되는 거냐, 등등 누가 들으면 황실 모독으로 잡혀 들어갈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지껄였다. 아, 재밌다. 너무 재밌다. 즐겁다.
본래 벨리타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렸다. 게다가 이 자극적인 대화. 아침 드라마 저리 가라 하는 미친 전개. 지루하지 않게 휙휙 넘어가는 대화거리. 이 얼마나 즐거운 대화인가. 아까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쪽쪽 빠진 기가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신명 나게 수다를 떠는 와중, 한 남작 부인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서서히 무르익어 가는 분위기를 더 불태워 줄 비밀스러운 본인 이야기였다. 벨리타는 귀를 활짝 열었다.
“우리 아이가 얼마 전에 낙마해서 다리가 부러졌거든요. 의사를 찾아가도 방도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후계라고는 그 애 하나뿐인데…….”
“어떡해. 낙마해서 다치면 정말 답도 없다던데.”
“그거 신관한테 보여주면 좀 괜찮아질지도 몰라요.”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백작 부인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