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엘라는 벨리타를 따라가야 하나 정말 다 먹고 김치와 고추장을 챙겨야 하나 고민했다. 동경하는 도도한 모습에 감격도 잊지 않았다.
그러건 말건 벨리타는 사뿐사뿐 걸어서 난장판이 된 곳을 빠져나왔다.
‘소이트가 어디로 갔더라.’
복도 끝자락, 저 멀리서 뛰어가는 소이트가 보였다. 벨리타는 보는 눈이 없는지 둘러본 다음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한 움큼 쥐고 소이트를 쫓았다.
소이트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지만, 몇 번이고 휘청거린 끝에 간신히 그를 찾아냈다.
치맛자락을 그러쥐고 발바닥에 땀이 차도록 뛰어갔지만 코너를 돌고 나니 소이트는 사라져 있었다. 이 긴 복도를 순식간에 뛰어갔을 리는 없으니, 분명 이 복도에 위치한 방 중 한 군데에 들어갔으리라. 벨리타는 늘어선 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들어갔으면 인기척이 날 테니 숨을 죽이고 소리에 집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어딘가의 문틈으로 헐떡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근처다. 걸음을 딛을수록 흐느끼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복도의 시작점에서 세 번째 방.
패닉이 온 소이트가 숨어든 이곳은 그의 휴식처일 게 분명했다. 함부로 들어가도 되나. 자신의 딸 방이었다면 벌컥벌컥 열고 들어갔겠지만, 타인이니 조심스러워졌다. 들어갈까 말까, 노크를 할까, 고민하는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멎었다.
나아진 건가 싶어 잡았던 문고리를 놓았다. 돌아가자. 몸을 돌리는 그 찰나 기절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너무 울어서 기절해버린 거면 어떡하지. 주변에 아무도 없겠다, 정말 기절했으면 대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분명 이 안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널찍한 침대와 고급스러운 가구들 몇 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벨리타는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구석에서 소이트가 몸을 말고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뒤통수를 손으로 감싼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신이 매운 음식을 먹였다고 이렇게까지 무너질 리가 없다. 분명 트라우마를 건든 거다. 바들바들 큰 몸을 아이처럼 떨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고 안쓰러웠다.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벨리타는 발소리를 숨기며 조금씩 다가갔다. 벨리타가 다가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벨리타가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감싸 쥐고서야 소이트는 벨리타의 존재를 인식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벨리타를 뿌리치고, 밀어내 넘어트리고 더 이상 붙을 수도 없을 정도로 벽에 바짝 몸을 붙였다. 엉덩방아를 찧은 벨리타는 주저 없이 소이트의 무릎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소이트는 두려웠다. 갑자기 나타난 그가 고모와 겹쳐 보여서. 자신에게 뻗은 손이 폭력으로 이어질 것 같아서.
벗어날 수 없는 과거에 붙들려 아직까지도 그때의 기억에 잠식되어 있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겨우 들릴 정도로 지겹게도 중얼거렸다. 벨리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몇십 분 뒤에는 제정신을 차렸을 터였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웃을 수 있었다.
벨리타가 다 망쳐놓았다. 저 미친 여자가, 나를. 내 평판을, 약점을, 내 인생을. 내 어린 시절을…….
내가 뭘 어쩌겠어.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어.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어린아이인 내가. 어떻게 고모를, 고모부를……. 권력과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소이트는 발작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가파르고 떨리는 숨소리에 벨리타는 다급해졌다. 이대로 두었다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벨리타는 발작하는 아이를 어떻게 진정시키는지 알고 있었다. 옆에 놓인 큰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와 소이트를 덮었다. 폭신한 두께감과 햇볕의 향이 소이트를 남김없이 덮어냈다.
새하얀 이불에 감싸진 소이트를 끌어안았다. 한참은 큰 성인 남성을 작은 몸으로 감싸 안은 채 차분하게 널찍한 등을 토닥였다. 일정한 박자로, 같은 세기로 토닥이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잖아. 괜찮아, 우리 아가.”
익숙한 반응이었다. 평소에 해왔던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소이트의 넘어가는 숨이 진정될 때까지, 떨리는 몸이 잠잠해질 때까지 벨리타는 몇 번이고 등을 토닥였다. 이따금 느릿하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하나, 둘, 천천히 숫자를 세기도 했다. 이 모든 행동에서 부자연스러움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점차 소이트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벨리타의 큰 호흡에 맞추어 느려졌다. 넓은 방을 울리던 가파른 숨소리도, 간헐적으로 토해지던 흐느낌도 멎어 들었다. 벨리타는 소이트가 스스로 이불을 걷어낼 때까지 쉬지 않고 등을 토닥거렸다.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포근한 촉감과 햇빛의 냄새. 따뜻한 체온. 이리도 빨리 진정해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나 안정적으로 정신이 돌아온 적이 있었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평온하다고 느껴 본 적이 있었나. 남의 손길이 이다지도 벅차오르게…….
파텔 후작 영애, 당신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무엇이기에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곤경에 빠트려 무너트리고 감싸주나요. 나를 괴로운 기억에 몰아넣었으면서 다시 끌어내시나요.
소이트는 벨리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친 사람이라기에 우습게 봤고 정답게 굴기에 의심했다. 결국엔 묻어두었던 과거에 처박아버렸으면서.
왜. 나한테. 왜.
자신에게 얻을 것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정한 손길로, 목소리로 달래놓을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소이트는 받아본 적 없다.
빛도 들지 않는 이불 속에서 소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까까지는 알 것 같았는데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벨리타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지. 태도의 이유는 무엇인지. 이불을 걷어냈다.
눈이 부셨다. 창문에서 뻗어오는 빛이 벨리타를 감쌌다. 아까까지는 햇빛 한 줌 들지 않았는데. 석양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소이트는 벨리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
“남작, 정신이 들어요?”
“……네, 네. 듭니다.”
“다행이다.”
안도하는 한숨과 웃는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뭐라고 안심해? 귓가에 맴도는 괜찮아, 라는 말. 수십 번이고 말해주던 목소리. 어린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걱정과 안도감이 너무도 낯설고 두려웠다. 미지의 감정이었다. 온몸이 흐늘거리는 감각도 무서웠다.
그럼에도 하나는 알 것 같다. 벨리타가 자신에게 속셈이 있더라도 한 번 정도는 눈감아 줄 수밖에 없겠다는 걸. 딱 한 번은 눈 뜨고 코 베여도 괜찮다.
*
식사 시간에서의 소란이 있었던 후 소이트는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손님으로 찾아온 벨리타를 거들떠볼 만도 한데,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엘라는 손님을 모셔두고 어쩜 이럴 수 있냐며 화를 냈지만 벨리타는 이해했다. 그렇게 무너진 꼴을 보였는데 어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까. 쪽팔려서 죽고 말지.
소이트가 몇 살이랬더라, 스물둘이었던가. 사춘기가 지났대도 까칠하고 예민할 수 있는 나이다. 게다가 식사 시간에서의 일도 있으니 얼굴을 보지 않을 명분도 있었다. 남의 집 음식 입에 안 맞다 까고 이상한 거 먹여서 체면 구기게 한 데다 직원들에게 뛰쳐나간 집주인의 욕까지 했다.
자신 같아도 당장 꺼지라고 소금 뿌릴 수 있다. 후작가니까 그렇게까지는 못하는 거겠지. 신분이 무섭긴 무섭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산책하며 벨리타는 소이트의 침실을 바라봤다. 사람 자는 곳인데 사람 사는 티가 나지 않던 방. 잠을 자기는 하나, 벨리타는 오지랖을 부리며 혀를 찼다.
이틀간 소이트가 찾지 않으니 벨리타는 영지를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상가를 쏘다니고 맛집으로 추천받은 식당을 찾았다. 관광 온 것처럼 일정 꽉꽉 채워서 시간 낭비도 하지 않았다.
엘라가 이 집 디저트 참 잘한다며 데려간 곳에서 친구도 만들었다. 마흔 조금 넘은 나이의 주인이기에 언니 동생 하기로 했다. 평민들과 수다를 떨면 예의도 차릴 필요 없고 흥미진진한 소식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산책을 끝내면 다시 마을로 가서 디저트도 팔아주고 수다도 떨어야겠다는 일정을 만든 벨리타는 집무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일만 하는 것 같던데 밥은 먹고 하려나. 간식 좀 사다 줄까. 숨 쉬듯이 오지랖을 부렸다.
날이 추우니 산책도 짧았다. 나가자고 얘기하니 엘라가 그 디저트 가게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엘라는 좋아했다. 컵케익을 조져주겠다고 콧김을 뿜어냈다. 서둘러서 가져온 마차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곳 로틀 영지는 감자 요리가 참 맛있다. 명물이 감자인가 보다. 북적북적, 사람이 몰린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 끄트머리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로브의 모자를 벗으니 눈 돌아가게 잘생겼던 탓이었다. 이 소설은 엑스트라도 잘생겼나? 벨리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었다.
로브를 쓴 남자만 잘생겼다. 보랏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색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무척 잘생겼다. 단정하게 생기기도 했고…… 워메, 저 손등에 핏줄 좀 봐. 남자다, 남자야. 어깨도 떡 벌어진 게 태평양이었다. 안겨서 헤엄치고 싶어라. 쪼금만 젊었더라면 말이라도 걸어보는 건데.
벨리타는 자신이 어린 몸을 갖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잘생긴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고 침이……. 씁, 흘러내리려는 침을 삼킨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둘 중 하나다. 게이거나 이미 짝이 있거나.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지만 자신도 눈이라는 게 달려 있는 터라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자도 벨리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벨리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와, 정면으로 보니까 정말 잘생겼다. 딸이 이럴 때 자주 쓰던 말이 있었는데……. 개존잘? 뭐 그런 거였다. 훈훈한 걸 넘어서서 후끈후끈할 정도로 잘생겼다.
벨리타가 힐끔힐끔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곧장 자리를 떴다. 아쉽다. 그냥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다.
뭐하시냐는 엘라의 물음에 방긋 웃으면서 방금 잘생긴 남자 봤다고 대답했다. 엘라가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그런 건 바로바로 말해줘야 자기도 봤을 거 아니냐며 성질을 냈다.
밥을 먹었으면 당연히 디저트다.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가게를 들어서니 주인이 활짝 핀 얼굴로 벨리타를 반겼다.
“동생 왔어~?!”
“나 또 왔지~ 언니는 어째 어제보다 얼굴이 더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