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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4화 (4/150)
  • 4화.

    야밤의 소란이 있었던 후, 기절하다시피 잠든 벨리타는 꼬까옷을 차려입고 식탁에 앉았다.

    함께 아침을 먹기로 했던 소이트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고깃덩이와 계란, 빵 덩어리를 보자니 벨리타의 속이 니글거렸다. 아침부터 속 부담스럽게 고기라니. 벨리타는 포크로 고깃덩이를 깨작거렸다.

    “속이 안 좋으신가요?”

    소이트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지의 국숫집이 기가 막힌다고 칭찬하고 맛집 추천까지 받아냈으면서 아침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양상추나 입에 욱여넣던 벨리타는 그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이 질문을 하는데 소이트는 마른침까지 삼켰다. 한참 높은 후작 영애의 입맛도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뱉어내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수준이 낮다는 걸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리고 예의상 정말 입에 맞지 않더라도 입맛에 맞다고 답변해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벨리타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난다. 일기예보와 같은 사람이었다.

    “미안하지만 제가 맵게 먹어서. 엘라야, 그거 갖고 왔어?”

    “네, 아가씨. 물론이죠.”

    대체 뭘 가져 왔다는 걸까. 남작의 저택에서 어찌 식사를 하겠냐며 개인 요리사라도 데려온 것인가. 혹은 남이 준 음식에 뭐가 들었을지 몰라 음식을 따로 준비한 걸까. 어느 쪽이더라도 소이트는 곤란해진다. 음식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바짝 긴장하여 벨리타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엘라가 식탁에 올린 것은 새빨간 덩어리와 빨갛게 양념된 채소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너무도 빨갛고 매워 보여서 먹어도 되는 걸까 의심까지 갖게 했다.

    그럼에도 벨리타는 이거지, 하며 활짝 웃었고 포크로 야무지게 채소를 찍어 고기에 얹었다. 소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애, 혹시…… 그 음식이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아~ 먹고 싶어요? 먹어, 먹어. 괜찮아. 맛있어요.”

    벨리타는 통에 담긴 채소와 양념장을 소이트에게 밀어줬다. 소이트는 벨리타가 온 이후 당황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먹어야 하느냔 말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벨리타의 눈치를 보자, 벨리타는 아, 박 터지는 소리를 내고는 포크로 채소를 들어 소이트의 고기에 얹었다. 야무지게 양념장까지 찍어 발라줬다.

    “쪼오금 매울 수도 있는데, 맛있어요. 한번 먹어보고 별로면 먹지 마.”

    “아, 네.”

    그냥 말로 해주면 될 것을 왜 직접 챙겨주는가. 이 영애는 대체 아무도 해주지 않은 짓을 해주는가. 정말 이 사람이 미친 건지 아니면 자신을 홀리려고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먹어도 될지 고민하고 있는 중에도 벨리타는 벌건 채소와 양념장을 야무지게 먹어 치웠다. 저렇게 먹는 걸 보니 먹어도 되겠다 싶어 조심스레 입안에 밀어 넣은 소이트는 드디어 감을 잡고야 말았다.

    ‘저 사람이 날 암살하려고 한다.’

    소이트는 저 벌건 것들이 너무도 매워서 물 세 잔을 한번에 비워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고추장과 김치라더라.

    소이트는 살면서 매운 걸 먹어본 적이 없다. 세르트제 제국에서의 매운 음식이라곤 평민, 외지인이 먹는 식문화였으니까. 아무리 학대받고 괴롭힘당하며 자라온 소이트여도 매운 음식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다 썩어 곰팡이가 핀 빵 쪼가리,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에서도 매운 식재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면역 자체가 없었다. 후추도 알싸하다고 느끼는 세르트제 귀족들 아니던가. 소이트는 흡사 고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콜록거리고, 눈물을 뽑아냈으며 물을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벨리타는 네 살짜리 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 딸래미도 애기 때 김치 씻어서 줬는데.’

    매워하는 아이에게 잘 먹히는 것은 역시.

    “여기 우유 좀 가져와 봐요!”

    우유였다.

    ‘딸내미가 허술한 건지 잘 모르는 건지 식재료까지는 현실과 똑같으니까.’

    사용인이 서둘러 가져온 우유를 들이켜고 조금 나아진 소이트는 정신을 차린 뒤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농락하고 암살까지 하려 한 벨리타에게 적의가 차올랐다. 게다가 이런 추한 꼴이라니. 약점을 잡아 협박하려는 속셈인가 싶기도 했다. 미쳤다는 소문으로 속이고 의심을 거두게 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심산일지도 몰랐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갈 사람으로 보였나. 소이트는 바보가 아니고 허술하지도 않다. 지금도 자신에게 뛰어와 괜찮냐며 그렇게 매워할 줄 몰랐다는 벨리타를 보라. 눈에 훤하게 보이는 수작질에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소이트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선.

    두렵다. 이 많은 눈알들이 자신에게 향하니 모멸감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이명이 돌고 숨이 가빠졌다. 환청, 피해망상. 소이트가 겪은 과거는 아직도 그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직도 남은 학대의 흉터들이 불에 덴 듯 뜨겁다.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짐승 새끼는 그에 어울리게 먹어야 한다며 바닥에 내던진 고깃덩이. 엎드린 제 위로 쏟아지던 와인과 샐러드. 며칠을 굶어 바닥에 뒹군 고깃덩이와 샐러드를 입으로 주워 먹어야만 했던 자신. 비참한 자신을 비웃는 시종들과 가족. 가족……. 그 징그러운 눈알들.

    소이트가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황급히 소이트를 다독이는 벨리타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귀중한 식사 중에 결례를 보였군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이고, 울었네. 어쩜 좋아. 아직도 매우면 우유 좀 더 마셔 봐요.”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편히 식사해주시길.”

    걱정하는 벨리타를 피한 소이트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날 비웃을 거야. 귀족의 핏줄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자신을 한심해하고 벌레 같다며 내려다볼 거야. 고모와 고모부의 경멸에 찬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머저리 같은 놈. 네가 글을 배워서 뭐 한다고?’

    ‘너에게 들어가는 돈도 아까워. 그냥 죽어버려.’

    ‘네가 어딘가로 사라져서 콱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매섭게 내리치는 채찍. 혐오가 깃든 시선. 다 썩어 문드러진 음식. 사용인들이 비웃으며 지나가는 정원에서의 매질.

    수치.

    모멸감.

    치욕.

    공포.

    두려움에 질려 복도를 내달렸다. 힘이 풀린 다리는 몇 번이고 휘청거렸지만 성큼성큼 걸음을 딛는다. 이제는 그 지옥에서 벗어났음을 알지만, 알아도.

    소이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쾅,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방구석으로 기어가 몸을 웅크렸다. 사지가 떨리고 숨이 가쁘다. 남작의 직위를 갖기까지 이런 일은 여럿 있었음에도 당최 익숙해지질 않는다.

    매번 숨을 죽이고 눈물을 훔치며 웅크려야 했다. 그래서 애초에 주도권을 자신이 잡지 않았던가. 대화의 중심에 서고 환심을 사고 약점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자신의 치부를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자신을 휘두를 때부터, 당황스럽게 했을 때부터 조심했어야 했다. 사람 좋은 척, 미친 척 혼을 쏙 빼놓고는 이렇게 순식간에 그 나락 같은 기억으로 처넣었다. 자신의 약점을 찾아내었으니 광산을 달라고 할지, 상단의 일부를 넘기라고 할지 모르는 일이다.

    이럴 줄 알았다. 의심했지만 경계하지는 못했다. 초면에 잡았던 손이 부드러워서, 자신을 보는 눈이 햇살처럼 따사로워서. 축하한다는 말과 억지로 쥐여 준 선물이 황당했기 때문에. 처음 느껴보는 온정에 홀려서.

    떨리는 몸 탓에 이가 부딪혔다. 파텔 후작이 미쳤다는 딸을 선뜻 사교계에 풀어놓을 리가 없었다. 이 사실마저 간과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벨리타 영애가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을 테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구석에서 숨을 죽였다.

    *

    “저거 안 따라가 봐도 되나?”

    “아가씨, 따라가면 실례예요.”

    “안 돼?”

    “네, 안 돼요.”

    벨리타는 소이트가 앉아 있던 자리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옆에 바짝 다가온 엘라 덕에 대화 소리는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파랗게 질려서 달아난 소이트가 계속 눈에 밟혔다. 보니까 눈깔이 정상이 아니던데. 역시 오지랖인가. 불쌍한 애고 맛탱이가 갔을 때 옆에서 잡아줄 사람도 없는 아이인 걸 아니까 더욱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자신 때문에 이 상황이 되었으니 죄책감까지 생긴다. 들썩거리는 발과 자꾸만 소이트가 사라진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신 때문에 이 사단이 났고, 소이트는 불쌍한 애고, 달래줘야 하는데 따라가면 예의가 아니란다. 왜 예의가 아닌지 알기는 알지만 넓은 오지랖은 소이트를 따라가라고 꼬드겼다.

    “진짜 안 돼?”

    “지인짜 안 돼요.”

    “따라가면 또 소문나?”

    “소문만 나겠어요?”

    초면에 손잡고 잠옷 입고 싸돌아다니고 선물까지 직접 쥐여 줬다. 거기다 따라가서 달래주기까지 한다면 둘의 염문설은 확실시되고 두 가문의 평판까지 나빠진다. 벨리타도 모르진 않았다. 눈치도 있었다. 아무리 가짜 세상이라지만 얼마나 이곳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밤에 엘라가 했던 말대로 소문을 신경 쓰는 게 맞다.

    그래야 하지만 자꾸 소이트가 눈에 밟힌다.

    벨리타는 엘라에게 몸을 기울여 귓속말했다.

    “내가 미쳤다는 소문 어디까지 났어?”

    “동네 사람들 다 알걸요. 그래서 파티 초대장도 엄청 줄었잖아요.”

    “그게 줄어든 거야?”

    “옛날에는 엄청 많았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산처럼 쌓였죠. 그런데 왜요?”

    ‘그렇단 말이지.’ 식탁 주변에 없는 듯이 서 있는 사용인들을 훑어봤다. 보는 눈이 많다. 아무리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어도 이 상황을 덮어주진 않을 터였다.

    본래의 벨리타는 어땠던가. 자신이 미쳤다는 소문이 얼마나 무마시켜 줄까.

    벨리타는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았다가 엘라에게 속삭였다.

    “음식 남기면 아까우니까 네가 먹어라. 고추장이랑 김치 꼭 챙기고.”

    “네?”

    벨리타는 식탁의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를 내며 사용인들을 흘겨봤다.

    “주인 없는 식탁에서 내가 어떻게 자리를 차지하겠니? 후작 영애인 내가 준비한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하시니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구나.”

    후작보다 낮은 남작이 어떻게 먼저 자리를 뜨느냐,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별로라는 티를 팍팍 내느냐, 소이트의 무례를 힐책한 벨리타는 새침하게 걸음을 뗐다. 자신이 먼저 경우 없는 짓을 했지만 후작 영애였고, 미쳤으니 어느 정도 참작되겠지.

    이 성깔 나쁘고 앙칼진 말투는 본래의 벨리타의 것이기에 오만한 귀족처럼 보일 거다. 벨리타는 어렴풋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법을 알아차렸다. 밤에 엘라가 울부짖은 귀족 특유의 거만함과 까칠함을 모두 보여 줬다. 미쳤다는 소문까지 덤으로 얹어서 든든하게 써먹었다.

    미친 짓거리를 하고 높은 신분을 내세워 새침하게 굴면 된다. 사용인들의 얼굴을 보니 확실해졌다. 후작 영애가 그럼 그렇지 뭐, 하는 얼굴이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정도껏 편하게 굴어야 한다는 사실도 새삼 느껴졌다.

    50대의 버릇이 너무도 짙어서 자꾸 자신이 열여덟의 아이임을 잊고 지냈다. 후작 영지에서는 편하게 굴어도 미쳤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뒤에서 수군대고 말았던 탓이다.

    벨리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의 건강 회복에 눈이 돌아 다 보듬어주고 감당하기로 했음을 벨리타는 몰랐다. 그 집구석은 티 내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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