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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3화 (3/150)
  • 3화.

    엘라는 그간 꾹 참아왔다. 벨리타가 등산을 하고 웬 풀을 뜯어와 약초라며 사용인들에게 나눠줄 때도 참았다. 영지를 돌아다니며 평민들과 수다를 떨고 가깝게 지낼 때도 참았다. 영지 내부에서의 일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참고 또 참은 결과가 미혼인 남작의 저택에서 추태라니. 연약하지만 고아한 벨리타는 어디 갔는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쏘아붙일 생각이 들 정도로 맞먹는 편한 주인은 좋은 주인인가. 아무리 미쳤다고 해도 이렇게 다른 사람 같이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엘라는 울음을 삼키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소문은 빨라요. 너무 빨라서 잡기도 전에 커져 있어요. 아가씨께서 미쳤다는 소문이 돌 때에도 그랬고요,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벨리타를 바라볼 수 없다. 아랫것 주제에 주인에게 대들고 탓까지 했다. 두려웠지만 공포는 아니다. 벨리타는 그런 주인이 됐다. 엘라는 말을 멈출 수가 없어서, 쌓아 왔던 둑이 터져 추스를 수 없듯이 쏟아냈다.

    “후작 영애가 남작님의 저택에서 추태를 보이고, 직접 선물을 전해주고. 분명 염문설이 돌겠죠. 저는 아가씨가 좋아요. 변했어도 좋아요. 하지만 쉬워요. 아가씨가 어렵지 않아서 싫어요.”

    무릎을 꿇어 주저앉은 엘라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처량하고 서러워 보였다. 벨리타는 가만히 엘라의 이야기를 듣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 벨리타의 기억이 넘실댔다.

    벨리타라면 무례하다고 뺨을 내리치고 이 엄동설한에 내쫓아 얼어 죽게 해야 했다. 고압적인 귀족 영애니까. 잘못했다며 애원하는 아랫사람을 찍어 누르고 발아래에 두어야 한다. 벨리타는 그러고 싶지 않다. 잘 따르던 아이를, 게다가 딸보다 어린 아이에게 매정하게 굴 만큼 벨리타는 못돼 먹지 못했다.

    엘라의 나이가 열다섯이다. 중학생 2학년. 이렇게나 어린데, 내가 어떻게 그래. 벨리타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팡팡, 침대를 두드렸다. 잔소리나 좀 할 심산이었다.

    “이리로 와.”

    “……제가 어떻게 아가씨랑 같이 앉아요.”

    “좋은 말 할 때 와.”

    엘라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가씨 정신이 돌아왔나? 자신을 바라보는 벨리타의 얼굴이 자신을 혼내던 어머니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옛날처럼 벨리타가 무서운데, 조금 다른 무서움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엘라는 얌전히 일어나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왠지 벌써부터 등짝이 아리는 것 같았다.

    주춤, 주춤. 벨리타의 앞까지 다다른 엘라는 눈을 굴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눈알 굴러가는 모양새가 다 보인다. 신나서 쫑알쫑알 대더니. 벨리타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사람이 변했다고.”

    “…….”

    벨리타는 자신의 허벅지에 얹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엘라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인 게 맞으니까. 젊고 탱탱한 몸에 신바람 나서 염병천병을 해쌌으니까. 본래의 벨리타가 봤다면 머리채 잡고 몸 돌려내라 이년 저년 했을 터였다.

    겁을 집어먹어 눈치를 살피는 엘라도 한 번 바라봤다. 주근깨가 수놓인 순하고 말랑한 얼굴. 열다섯이면 충분히 동경할 만하다. 높은 신분의 연상이 멋짐이란 간지를 폭.발.시켰으니 곁에서 얼마나 동경하고 부러워했을까. 동네 아줌마같이 넉살 좋게 구는 벨리타에게 얼마나 실망했을지도 짐작이 된다.

    고민이 됐다. 벨리타는 엘라를 빤히 바라봤다. 엘라가 바라는 모습으로 호되게 혼쭐을 내줘야 할까, 그냥 훈계나 좀 할까.

    남의 집 딸내미인데 자기가 뭐라고 혼을 내고 매를 들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열다섯이면 말로 타일러도 알아들을 나이 아니던가. 물론 우리 집 딸랑구는 타일러도 못 알아먹었지만. 남의 집 아이인데, 내 아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지도 않다. 말 좀 해주고 말지.

    한식집 주인이었던 고용주의 마음과 옆집 아줌마의 마음으로 엘라의 한 손을 덮어 쥐었다. 엘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미쳤으니 사람이 바뀌지, 같겠냐. 너도 나 미친년인 거 아는데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니? 미친 사람이 뭘 한다고.”

    벨리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 리 없다는 것을.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으니 이해하라고 하겠는가. 정말 미쳤으면 똥오줌도 못 가려서 벽에 똥칠이나 했을 터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게는 설득력이 생긴다.

    동경의 대상이,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은 헛소리여도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벨리타가 열여덟의 아이이기 때문에. 엘라가 열다섯이기 때문에. 엘라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납득이 되지 않지만 이해해 보려는 얼굴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하더라도 나를 챙겨 준 거 알아. 알지.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하지만 엘라, 사람이 언제나 같은 모습이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이 있고 네가 모르는 내 모습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어지간히 해라. 어지간히.”

    남의 집 자식이니 적당히 듣기 좋은 말로 잘 타이르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하니 되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들기 시작했으니까. 벨리타는 열다섯의 제 딸을 떠올렸다. 역시 중2병은 매가 약인가. 벨리타의 인내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우선은 한 번 정도 참아 줄 생각이었다.

    “제가 아가씨를 어떻게 몰라요? 매일 봤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미치신 것도 그래요.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람이 미칠 수가 있나요? 귀신 들리신 거 아니에요? 큰 주인님께서도 고민하셨어요. 아가씨를 신관한테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정신 병원도 알아보셨어요.”

    벨리타의 눈썹이 까딱였다. 이 맹랑한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미쳤다는 소문이 돈 뒤의 행실에는 이제 어느 정도 납득하고 넘어갔나 보다. 미쳤으니 뭔들 못할까, 라는 생각이었겠지.

    엘라의 관심은 벨리타가 왜 미쳤는가, 언제 미쳤는가,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였다.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엘라가 귀찮았던 벨리타는 그녀의 손에서 손을 떼고, 허공으로 뻗었다. 꼰대는 몸이 바뀌어도 꼰대다. 남의 딸 훈육하려는 마음 없었는데. 어른이 말을 하면 그냥 네, 할 것이지.

    “회초리 가져와.”

    “네?”

    “회초리 가져오라고 했다. 하나, 둘…….”

    “갑자기 왜요?!”

    “잘릴래, 회초리 가져올래.”

    만만하고 쉬운 벨리타 아니었던가. 허공에 뻗은 손이 까딱이고 한숨을 길게 내쉬니 위압감이 대단했다. 한두 번 이 일을 시켜본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도 익숙하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고, 거부하니 협박이 섞인 명령을 툭, 쏘아냈다. 엘라가 당황하고 왜 이러시냐 매달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손을 까딱거리며 숫자를 세어 나갔다. 하나, 둘…….

    회초리로 맞는 것은 싫고 잘리는 것은 더 싫다. 그리고 벨리타가 세는 숫자가 셋이 되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짓던 엘라는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남의 저택인데 회초리로 쓸 만한 게 어디 있을까 싶었지만 엘라는 해내고야 말았다. 제 무덤을 제가 팠다. 벨리타의 옷을 걸어두었던 나무 옷걸이를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이어도 아프고 나무라면 더 아픈 옷걸이. 벨리타의 손에 착 감겼다. 손에 알맞게 딱 들어온 옷걸이를 허공에 한 번 휘둘러 보았다. 휘익,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몇 대 맞을 거야.”

    “……한 대요.”

    “진짜 한 대 맞을 거야?”

    “……네.”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던 엘라는 어느새 얌전히 양손을 모으고 서서 벨리타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을 곧잘 패고는 했던 벨리타였으나 몇 대 맞을 거냐는 상냥한 물음은 해준 적 없었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마구잡이로 폭행을 당했으니 몇 대 맞을 거냐고 한다면 당연히 한 대였다. 익숙하게 손을 내밀고 눈을 꾹 감은 엘라는 매질을 기다렸다.

    이윽고 따끔, 손바닥이 저릿저릿해졌다. 옷걸이가 찰지게 엘라의 손에 감겼다. 그리 아프진 않았으나 조금 벌겋게 막대 자국이 남았다. 벨리타가 그래도 남의 집 딸내미라고 힘 조절을 한 것이다. 애초에 자기 딸 아니라고 봐줄 거였으면 때리지를 말았어야 했지만.

    엘라는 본래 벨리타에게 맞던 것보다 훨씬 아프지 않고 깔끔한 매질에 놀라 조금 붉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찍어 누르는 카리스마, 결단력, 심지어 체벌의 수위를 물어 딱 그만큼만 해주는 자애로움까지. 엘라는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거다. 벨리타는 여전히 멋짐이 폭발했으며 넓은 마음씨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련 없이 바로 옷걸이를 내려놓는 쿨함까지 엿보였다.

    ‘어쩜 이렇게 멋지실까.’

    그랬다. 엘라는 정말 열다섯의 나이만큼 높은 신분과 아름다운 미모, 귀족다움을 동경했던 것이다. 몇 년만 지나도 자다가 이불을 걷어찼을 가치관이었지만 엘라는 아직 어렸다. 아가씨를 의심했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바보 같아졌다.

    “엘라야.”

    “네, 네, 아가씨.”

    몸을 일으킨 벨리타는 엘라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맞은 뒤에 문지르면 더 아프다. 여린 어깨를 토닥토닥, 달래듯이 두드렸다.

    “내가 미쳤다고 해도 날 따를 거잖아. 그렇지?”

    “네, 물론이죠.”

    “너는 연장자한테 정신 병원에 넣으려고 한다는 둥, 귀신 들린 거 아니냐는 둥, 그런 말 하면 돼, 안 돼.”

    “……안 돼요.”

    “안 되지?”

    “네…….”

    “그럼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요.”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안 그럴게요.”

    “착하다, 옳지. 엘라야, 내가 이렇게 혼낸 거는 내가 엘라를 아껴서 그래. 알지? 너무 아껴서 나중에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런 거야. 나도 매는 앞으로 안 들고 소문 신경 쓸 테니까 엘라도 같이 조심하자, 응?”

    “네, 아가씨. 그럼요. 당연하죠.”

    아이고 예뻐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엘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채찍과 당근이라니. 아가씨, 너무 멋져요. 심장 아파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니. 아가씨, 언제 이렇게 성숙한 매력까지 가져버리신 거냐고요. 아가씨에게 더 매몰차게 혼나고 싶어. 그렇지만 상냥하게 칭찬도 듣고 싶어.

    엘라의 취향이 조금 이상해졌다.

    애초에 맞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정말 아끼면 매를 들면 안 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엘라와 정말 아껴서 매를 들고 자기 딸도 아닌데 오지랖으로 훈육을 한 벨리타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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