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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2화 (2/150)
  • 2화.

    벨리타는 뭔 동네가 스트레칭도 못 하게 하나, 싶어 삐거덕거리는 몸을 이끌고 소이트 남작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벨리타의 저택에 비해 초라할 정도였지만 벨리타는 이 정도의 집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소이트 남작은 소이트 자작가의 방계인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자작가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학대.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친 몸부림의 결과가 이 저택이다. 소이트 남작은 상단을 운영해 돈을 긁어모았고, 전쟁과 경제에 큰 기여를 해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어떠한 지원도 없이 혼자 힘으로 해낸 소이트 남작. 기특한 아이라고 벨리타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그 노력을 쉽게 치하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뼈를 깎고 몸이 부스러질 정도로 피나는 고생을 해야만 해낼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 개고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벨리타는 잘 알고 있었다. 결과만 중요한 세상이니까.

    저택의 시종들이 마중을 나왔다. 짐을 옮기고, 길을 안내 받으며 벨리타는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정갈하다. 어린 녀석이 깔끔하게 잘 하고 사는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의 영애가 방문한다는 소식은 집주인에게도 중요한 사안이다. 소이트가 긴 청록색의 코트를 두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파텔 후작 영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셨죠?”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옅은 금발이 흩날렸다. 순해 보이는 눈이 가늘게 접힌다. 소이트는 큰 키로 단정하게 계단 끝까지 내려와 벨리타의 앞에 섰다.

    ‘아이고, 이놈 참 멀끔하네.’

    소설에서는 이렇게 잘생기고 말쑥하다는 말은 없지 않았던가. 그렇게 고생이라는 고생은 죄 다 하고서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했다. 마치 가깝게 지내던 옆집 아들내미 대학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벨리타는 넓은 오지랖으로 소이트 남작의 손을 잡았다.

    가죽 장갑으로 감싼 소이트의 손이었지만 벨리타는 힘주어 쥔 채 부드러운 손길로 토닥였다. 고생했다. 잘 자랐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따뜻함이 묻어나왔다.

    소이트는 꽤나 당혹스러웠다. 생전 처음 본 영애가 외간 남자의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게다가 후작 영애다. 상단에서도 정치에서도 한 주름 잡는 파텔 후작가! 파텔 후작가 영애의 손을 함부로 내치기에는 소이트의 권력은 한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저 영애의 눈빛을 보라. 대체 뭔데 자신을 이리 따스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는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쳐내지도 못하고 그저 얌전히 손을 내어줄 뿐이었다. 난처함을 애써 숨기며 웃음을 지은 소이트의 머리에 파텔 후작가의 영애, 벨리타가 미쳤다는 소문이 스쳐 갔다. 장사를 하려면 정보가 빨라야 한다. 소이트는 정보에 능통했다.

    “저, 영애. 괜찮다면 제가 영애께서 지낼 방을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임기응변에도 특출 난 재능이 있었다. 소이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벨리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성을 대하는 태도도 무척 능수능란했다. 제삼자가 보면 벨리타가 소이트에게 반해 들이대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훈훈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두 분이 꽤 잘 어울리시는데.’

    ‘두 분 다 미모가 출중하시니 눈이 즐겁네.’

    ‘서로에게 반하신 것 아니야?’

    주변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은 둘의 사이를 감히 짐작해 보았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들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딸내미 소설 보니까 요 녀석 흉터도 많다던데, 여긴 약도 없나.’

    ‘이 미친 사람을 빨리 치워버리고 일해야겠다.’

    둘은 다른 생각을 하며 방긋 웃었다.

    *

    눈치 빠른 엘라가 그만하고 방에 가자며 벨리타를 말리고 나서야 간신히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방을 소개해준다는 말이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는지 소이트는 벨리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손님방으로 향했다.

    소이트는 벨리타의 뒤를 우르르 따라오는 사용인들을 무시하고 처음 본 사이임에도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오는 길에 보니까 동네가 참 예쁘더라고요.”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영주민들이 이곳을 좋아해주는 덕일 거예요.”

    “아이고, 말도 예쁘게 하지. 잘 컸네, 잘 컸어.”

    “네? 아니, 네?”

    “밥은 먹었어요? 쩌, 뭐냐. 요 앞에 국숫집 있던데 거기가 기가 막히더라고요. 먹어봤어요?”

    벨리타와의 대화는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도 곧장 다른 화젯거리로 넘어가는 통에 소이트는 대화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자기가 할 말만 한다는 느낌. 그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대화의 중심에서 상대를 쥐고 흔들어 혼을 쏙 빼놓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던 평소와는 달랐다. 실없고 평범하기만 한 이 대화는 전혀 영양가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독사처럼 서서히 조이던 대화만 나누다 보니 그저 따라가기 바쁜 이 담소가 생소했다.

    맞잡은 손도,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툭툭 쳐오는 손길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따뜻함 모두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이 낯선 느낌이 곤혹스러움인지, 난처함인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얻어낼 정보를 위해 경계를 허물려는 속셈인가 싶기도 했다.

    ‘미친 사람은 대화를 이렇게 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 따뜻하고 순수해서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 이런 유의 대화는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울렁거리는 편안함에 속아 자신의 치부, 정보를 빼앗길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벌써 도착한 손님방에서 벨리타의 손을 놓으며 소이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파티 일정보다 일찍 오셨으니 며칠 있다가 가시겠네요.”

    “미안해요. 내가 정신머리가 없어서. 너무 일찍 왔지 뭐야.”

    “괜찮습니다. 아침에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나는 너무 좋지요. 혼자 먹으면 너무 적적해.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네, 그럼 아침에 뵙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대화 즐거웠습니다.”

    벨리타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소이트는 문 앞에서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후작 영애가 무슨 속셈으로 이리 일찍 도착했는지, 이곳에서 자신의 무엇을 앗아갈 건지 꼭 알아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자신의 사업을 방해할 계획인가.

    순해 보이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싸늘하게 식은 소이트의 얼굴이 벨리타가 있는 문을 매섭게 노려본다.

    ‘파텔 후작, 당신이 뒷배인가. 꼭 더러운 속내를 알아내주지. 내가 놀아날 것 같으냐.’

    생각과 함께 자신의 서재로 향하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벨리타였다.

    “내가 이 말을 깜빡했네. 소이트 남작님, 축하해요!”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늘어지는 순백의 잠옷을 입은 벨리타가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와 소이트에게 다가섰다. 외간 남성에게 잠옷을 보이다니, 이리도 파렴치하고 무례한 꼴을 다 보았나! 소이트는 올해 받을 충격을 오늘 다 받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미간을 겨우 짚은 소이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봐. 어떡해. 이성을 챙기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화려한 포장지가 코앞에 다가왔다. 소이트는 정말, 정말로 당황했다.

    “이게, 이게 뭔……가요?”

    “선물이지 뭐예요. 내가 주는 걸 까암빡 했어. 자, 받고 빨리 가요. 바쁘잖아.”

    “네? ……어, 고, 마워요.”

    “나 더 방해 안 해. 빨리 가요, 나 가서 잘라니까.”

    화려한 포장지로 감싸인 선물을 얼떨결에 받아 든 소이트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진짜 뭐야. 진짜 미친 거야? 소이트는 혼란스러웠다. 뿌듯한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방으로 돌아가는 벨리타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 건지 짐작도 되지 않고, 왜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이트는 의외로 가벼운 선물을 꼭 쥐며 벨리타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미친 척을 하는 건지, 정말 미친 건지 그 사실이라도 파헤쳐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

    잊고 있던 선물을 전해주고 돌아오니 엘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벨리타가 대체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픈 거냐 물으니 또 치맛자락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벨리타의 치마는 공공재였다.

    “아이고, 아가씨. 제발요, 쫌, 제발!”

    “아니, 뭘? 내가 또 잘못한 겨?”

    “남의 집에서 잠옷 입고 돌아다니는 영애가 어디 있어요! 게다가 남작님도 미혼이시고, 아가씨도 미혼이시잖아요. 이러다 소문난다고요.”

    서럽게도 운다. 또 벨리타가 실수했나 보다.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곡소리를 내어가며 징하게도 잔소리한다. 벨리타는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하며 엘라를 치마에서 떼어냈다. 우는 체인 줄 알았는데 정말 울었다. 치맛단에 눈물, 콧물 자국이 얼굴 모양 그대로 남아버렸다.

    아이고 디러버라. 펑퍼짐한 소매로 엘라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소매에 콧물과 눈물이 묻어 색이 진해진다.

    “왜 울어, 울기는. 뚝 해.”

    “아가씨, 제가 어? 그동안 아가씨 모시면서 드러운 성깔 무서워 말은 못 했는데요. 이젠 말해야겠어요.”

    “내가 승깔이 드러워?”

    “몰라서 물으세요? 아니꼬우면 쥐어 패셨잖아요!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래, 계속 얘기해 봐라.”

    “5개월이나 지나서야 말하는데, 아가씨 너무 변하셨어요. 남작이 주최한 파티에 오신 것도 그렇고, 직접 선물 주러 가신 것도 그렇고. 그러시는 분 아니셨잖아요. 직접 움직이는 분 아니셨으면서……. 귀족 예절은 다 잊으신 것처럼 구시질 않나!”

    예절은 자기가 다 잊은 것처럼 굴던 엘라는 다시금 눈물을 뚝뚝 떨궜다. 말하면서도 울컥해 꺽꺽댔다. 세상 제일 서럽게 울다가도 벨리타의 눈치도 봤다. 혼자 제일 바빴다.

    이 푸념을 들어 주는 사람이 벨리타가 아니었다면 엘라의 목은 진작 날아갔다. 감히 후작 영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옷을 더럽히며 탓을 한다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그 사실을 엘라도 모르지 않았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엘라가 모시던 벨리타 또한 그런 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런 귀족이 아님을 안다. 너무나도 친근하고 정다워서 이런 무례한 짓조차 관대하게 넘어가 줄 사람인 걸 안다. 정말 좋은 주인이다. 주인이지만…….

    “전요, 아가씨가 귀족다운 귀족이어서 좋았어요. 숨 막히게 하는 카리스마도 좋았고요, 다가갈 수 없는 고고함이 너무 멋있었어요. 근데 이게 뭐예요. 아가씨, 이게 뭐예요.”

    자기가 모시는 주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모시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숨을 얼어붙게 만드는 매서움도, 완벽함을 추구하기에 묻어나는 까다로움도 없다. 만만한 주인. 언제든 휘어 잡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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