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쓴 로판 소설에 빙의되어버렸다-1화 (1/150)
  • < 딸이 쓴 로만 로설에 빙의되어버렸다 >

    1화.

    딸이 자기가 쓴 책이 출간되었다고 나에게 주더라.

    책 표지가 어두워서 타박을 조금 했다. 그래도 정말 대견하지 않은가. 공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구석에만 들어앉아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느새 책까지 출간하고 말이다. 오죽하면 내가 여든이 될 때까지 딸내미를 먹여 살려야 하나 걱정했을까.

    그래도 걱정은 덜었다고, 장하다고 하니 딸내미가 엉엉 울더라. 자기도 걱정이 많았다고 했는데…… 야 이 기지배야, 내가 방 정리 하라고 했어, 안 했어. 이게 돼지우리야, 사람 방이야.

    축하는 못 해줄망정 잔소리를 해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방이 뒈지게 더러웠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딸내미 방 청소를 해야겠냐고. 스물일곱 먹고 왜 자기 방 하나 제대로 치우지를 못하는가. 그래도 잔소리 조금만 하고 잘됐다, 천재 소설 작가 되라고 했다.

    모임으로 등산을 가기로 했던 탓에 딸이 준 소설책을 가방에 욱여넣고 급히 뛰어나갔다. 모임 가서 자랑해야지. 우리 딸내미 유명 소설 작가라고. 곧 사람들이 줄 서서 싸인 받을 거라고.

    가는 길에 빠르게 책을 훑어봤다. 친구들한테 자랑하려면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기가 막히게 자랑할 테니까.

    사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서 대충 읽었다. 공녀가 어쩌고 황태자가 어쩌고 하는데,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옛날에도 이런 게 있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요즘 애들은 이런 걸 좋아하나 보지.

    모임에서 빌린 버스를 타고 트로트 뽕짝에 맞춰 몸 좀 신바람 나게 흔들어 준 뒤에 딸내미 소설책을 자랑했다. 표지가 이게 뭐냐는 민지 엄마랑 뒈지게 싸우고 다시 자랑질을 했다. 내 눈에는 아직 아가 같은데 벌써 다 커서 작가님 소리까지 듣는다니, 묘하다.

    바리바리 싸 온 도시락을 산 정상에서 야물딱지게 애 엄마들이랑 나눠 먹고 내려오는 길에 수다도 떨었다. 내려가서 삼계탕에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바닥이 물컹하다. 이거 잘못하면 굴러떨어질 것도 같았다.

    어째 염병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 굴러떨어졌다. 신명 나게 굴렀다. 이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 죽었나?

    눈을 뜨니 난 딸내미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시부럴 이게 뭔 일이야.

    벨리타 릴레이나 파텔, 벨리타는 근 3개월간 수상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해괴한 단어를 부르짖거나 뼈밖에 보이지 않던 마르고 야윈 몸으로 흡사 언데드 같은 행동을 취하곤 했다. 벌레라면 질색하던 후작가의 영애가 평민 남성의 옷을 입고 산을 오르기도 했었다.

    이 기이한 일들이 어떠한 전조도 없이 시작되었기에 후작가의 사람들은 벨리타 영애를 구설수에 올렸다.

    ‘시름시름 앓아 가더니 드디어 미치셨다.’

    ‘귀신에 홀렸거나 귀신에 씐 것이다.’

    ‘망조가 들었다. 영애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후작가의 주인, 벨리타의 아버지 테일러 또한 자신의 딸이 구설수에 올라 미친 여자가 되는 꼴을 두고 보았다. 벨리타는 웃음 한 번 지은 적 없었다. 허약한 모습만 보이던 딸이었다. 그런 딸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산을 타고 시도 때도 없이 혼잣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당연히 미쳤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세르트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 병원도 알아봤다. 신전까지 찾아가야 하나 밤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인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벨리타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이 두려웠고 공포였으며 지옥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허약한 몸 탓에 하얗게 질려가던 벨리타의 혈색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살이 올랐다. 예절도 잊은 채 크게 웃는 모습은 몹시도 사랑스러웠고 건강해 보였다. 산에서 뜯어온 풀로 양념을 하고 시종들에게 먹여 주는 꼴이 살가웠다. 그럴 리 없어야 했지만, 저택에 활기가 돌았다.

    그 후 벨리타의 부모는 기이한 현상을 묵인하기로 했다. 딸이 미친 것 같고, 귀신에 홀린 것 같아도 어쩌겠는가. 죽어가던 딸이었는데. 복사꽃처럼 혈색이 도는 얼굴로 사랑스럽고 말갛게 웃는데.

    내 딸인데.

    벨리타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미친 여자가 되었다.

    화려한 저택, 넓은 정원, 넘쳐나는 돈. 벨리타는 정원에서 저택을 우러러보았다. 살아생전에 그리도 간절히 바라왔던 부유함이었다.

    집 안을 쿵쿵대며 뛰어다니던 딸을 혼낼 필요도 없고 학원을 다니고 싶다 조르는 딸에게 안 된다며 다그칠 필요가 없는 부유함.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줄 수 없는 비통함을 밤마다 욱여 삼키며 미안하다고 읊조릴 필요가 없을 만큼의.

    벨리타는, 작고 하얀 손을 힘주어 쥐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뱃속이 허했다.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뜬 지 4개월이나 지났다. 뜨겁고 물비린내가 났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공기마저 시린 늦가을이 되었다.

    벨리타는 착실히 낯설고 기이한 이곳에서 적응해 나갔다. 몸의 주인, 본래의 벨리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차츰 기억이 돌아와 파악했지만 새로운 벨리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등산하다가 본 민들레 잎사귀를 뜯어 절임을 해먹고, 직접 마을로 나가 장을 보며 평민 여인들과 수다를 떨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배추 열 포기에 1실버를 70코퍼로 깎아버리고 저택으로 돌아와 김치까지 담갔다. 본래 벨리타의 언행과 버릇, 성격까지 모조리 무시한 채 새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아가씨, 제발요.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벨리타의 담당 하녀 엘라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려도 벨리타는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벨리타는 쉬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 하루도 집안일에 손대지 않은 적이 없었고 7일 중 6일을 식당에서 일해 밤마다 쑤시는 무릎과 팔목을 부여잡고 앓았다. 갑자기 쉬려고 해 보았자 쉬어 본 적이 있어야 야무지게 쉬지 않을까.

    시종들이 척척 집안일을 해 놓아도, 끼니마다 완벽히 조리된 음식이 나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말랑하고 쫀득한 볼을 주무르며 젊음을 즐겨 보자고 생각했었지만, 버릇은 무서웠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며 매달리다가 철퇴를 맞아 울먹이며 이불 빨래를 함께 하던 엘라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엘라야. 만약에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자유롭다면 뭘 할래?”

    “예?”

    철퍽, 이불을 밟아대던 발이 멈추고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빠르게 떠올랐으나 미친 영애 벨리타의 질문이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엘라가 들어 이불을 발바닥으로 문질렀다. 철퍽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생각 안 해 봐서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 어? 뭐 하고 싶냐고.”

    “글쎄요. 연애도 해 보고 사고 싶은 거 실컷 사고 놀러 다닐래요.”

    들뜬 얼굴이었다. 주어지지 않을 여유겠지만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했다. 차가운 공기와 얼음장 같은 발,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마저 잊은 행복감이었다. 벨리타는 꾸준히 발을 놀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랬지.’

    달콤해서 녹을 것 같은 연애도 해 보고 사치란 사치는 다 부려 보고 싶었다. 결혼해서 물 건너갔지만.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고 길지 않은 젊음을 누리려고 했었다.

    그래, 배우고 싶은 것. 원했던 공부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이미 깊이 파묻혀 희미해진 기억은 꺼내기 쉽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무수히 지나치는 기억들 속에 순간 어린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길바닥에 드러눕고 악을 쓰던 모습이 스쳐 갔다.

    딴 애들은 다 피아노 치는데 나만 안 시켜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서러움에 받친 얼굴이 선명하다. 치렁치렁하게 장식된 치마를 더 꾹 쥐었다.

    “그런데 아가씨,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벨리타가 엘라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태연히 물음을 던진 엘라의 얼굴이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요 근래에 벨리타가 달라졌다고 해도 평소의 벨리타는 말대꾸를 몹시도 싫어했다. 분명 뺨을 맞을 거야. 머리채를 잡힐 거야.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저 이불이 마찰에 뭉개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엘라는 더더욱 공포에 질렸다.

    “내가 뭘 해야 될지 모르겠네. 그런 거 있잖아, 길 잃은 기분. 알지? 모르나?”

    낭랑한 목소리였다. 벨리타답지 않은, 달갑고 살가운 말투. 엘라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가 변한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석양을 담아 주황빛으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파묻힌 벨리타의 얼굴은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미치셨으니까. 굳어진 표정을 겨우 풀어낸 엘라가 목소리 톤을 높였다.

    “천천히 생각해 보셔도 늦지 않으실 거예요. 아가씨는 18살이시고 시간은 많잖아요.”

    촌스럽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엘라가 웃었다.

    시간은 많다. 벨리타는 속으로 말을 곱씹었다. 시간이 많아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되려나. 이 짓도 그만하고 돌아가야 할 텐데.

    벌겋게 부어오른 발을 물속에서 꺼내 대강 닦아내며 쓴웃음을 삼켰다. 춥고 속이 시큰거렸다.

    *

    시간이 많다던 말이 무색하게 해가 뜨고, 저물었다. 벨리타가 미친 지 5개월이 넘어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실감하며 벨리타는 두꺼운 코트를 여몄다. 목적도 없고 삶의 방향을 잃은 감각은 괴롭기만 하다. 돌아갈 수 있으려나. 무의식이 때를 가리지 않고 떠다녔다.

    덜그럭거리는 마차가 이따금 크게 들썩였다. 몸이 휘청거리니 속이 메스꺼웠다. 촌년이라 멀미를 하나 보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기대되지만 달갑지 않다.

    쉼 없이 떠들 수 있는 벨리타였지만 사교계는 함부로 말을 뱉었다가는 큰 화를 입는다. 벨리타의 기억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래서 무수히 쏟아지던 초대장을 불쏘시개로 썼었지만 이번 초대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소이트 남작의 즉위를 축하하는 파티.

    딸의 소설 속 서브 남자 주인공의 파티였다. 무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대충 읽었을 때에도 애잔해 죽겠던 녀석이었는데 얼굴 한 번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딸내미가 만든 캐릭터는 봐야지.’

    우리 딸랑구가 얼마나 잘 만들었으려나. 천재 같은 딸랑구가 어떤 캐릭터를 만들었을까.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덩이를 꾹꾹 주무르며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참 오래도 달렸다. 이른 아침부터 마차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오래 걸린다는 엘라의 말만 믿고 할 짓도 없으니 빨리 출발했는데 하루 만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속도 메스껍고 온몸이 쑤셨다. 하도 오래 앉아 있으니 허리도 뻐근하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헛 둘, 헛 둘, 스트레칭을 했더니 엘라가 아가씨, 제발요. 라며 우는 체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