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윈데이너 후작가, 초록이 싱그럽고 색색의 꽃이 가득한 어느 봄날.황제 내외가 따듯한 봄볕 아래 마주 앉았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황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오른다.
“글쎄, 그려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군.”
두 사람의 곁으로 디에고가 다가왔다.
“폐하.”
“좋은가 보구나.”
황제가 능글맞게 웃으며 디에고를 곁눈질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눈썹 한 번 움찔하지 않은 디에고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허허, 정말 많이 변했구려.”
황제의 너스레에 황후가 진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변한 모습이 훨씬 나은 것 같군요.
…기억하십니까, 저와 온실에서 나눴던 이야기.”
원하는 것이 생겼냐는 물음에 그렇다, 답하던 순간.그때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듯함이 가득 서린 얼굴로 황후가 디에고의 손을 잡았다.
“기쁘군요.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언지 찾은 거 같아서.”
마주 웃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서 있는 한 사람.
“전하.”
디에고가 리안 주변에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봤고, 더없이 맑은 기운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대공, 축하드립니다.”
덧없이 웃은 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쳐다본 디에고가 마주 잡았다.아직 비비안에 대한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했을 리안에게 디에고는 그 어떤 말도 전하지 않았다.잠시간 시선을 맞춘 그가 뒤돌아 자리를 옮기려다 우뚝 멈춰 선다.성큼 리안에게 다시 돌아간 디에고가 입을 떼었다.
“고마웠다, 리안.”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리안이 굳은 채로 바라보자 디에고의 입매가 유려하게 올라갔다.이윽고 몸을 돌려 다시 멀어지는 디에고의 등 뒤에서 황태자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가 디에고에게도 닿은 순간,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그렇게 비비안 윈데이너와 디에고 브라이트의 결혼식이 열렸다.*비비안이 새벽부터 시작된 치장을 끝마치고 응접실에 앉아 있다.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드레스에는 촘촘히 보석이 박혀 있었고, 느슨하게 틀어 올린 분홍빛 머리칼에는 두 사람을 상징하는 머리 장식이 조화롭게 자리했다.복숭앗빛 뺨, 투명하게 빛나는 얼굴, 그리고 물 위에 꽃잎이 번지듯 덧그려진 입술에서는 더욱 눈을 떼기 어려웠다.
“마리, 진짜 벌써부터 너무 힘든데?”
평소 연회 나갈 때처럼 일이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혼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우선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마리부터, 쉽지 않았다.
그녀는 제 아가씨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날, 그 어떤 틈도, 흠도 허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그렇게 까다로운 안목과 칼 같은 지시로 완성한 비비안.
“아가씨…….”
마리의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원래도 아름다우시지만, 오늘은! 오늘은 정말!”
그녀의 말이 빈말은 아닌지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전부 넋이 나간 채 비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마리 덕분이지, 뭐.”
생긋 웃는데 사방으로 꽃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아가씨, 마이어 백작 영애 오셨어요.”
“어머! 들어오시라 해.”
차분한 감색 드레스에 붉은 머리칼을 땋아 올린 스텔라가 비비안 가까이 다가섰다.
“영애, 오늘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을 건네자 비비안의 볼이 붉어졌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스텔라야말로 오늘도 눈부셔요!”
눈을 찡긋 감으며 두 손으로 스텔라를 가리는 시늉까지 곁들이는 비비안을 보며 그녀가 실소했다.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럼 이만.”
“아니, 벌써 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스텔라가 느릿하게 비비안 곁으로 몸을 숙였다.
“축하해요, 비비안.”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 스텔라가 진한 웃음을 끝으로 미련 없이 응접실을 나선다.
“와― 와.”
스텔라가 지나간 귀에 손을 대고 연신 감탄을 내뱉던 그녀에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어딘가 고생한 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으나 그만큼 더 분위기 있어진 미남이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이런.
이거 너무 아름다워서 대공에게는 아까운데.”
장난스레 미간을 찌푸린 그가 천천히 비비안에게 향했다.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누구보다 반가운 듯 리안을 맞이하자 그 또한 푸스스 웃어 보인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이었다.
비비안에게는 누구보다 귀한 발걸음이었다.
“안 올 리가 없잖아.
내 누이의 결혼식인걸.”
그리 돼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먼 훗날, 연습하지 않고도 서슴없이 이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갖고 싶었던 비비안을 놓고도 제 곁에 머물러준 그녀를 다 떼어낼 수 없었던 탓이다.리안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던 비비안은 그저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미소를 선보였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전한 리안의 입가가 어여쁜 호선을 그렸다.
“저도 전하가 늘, 항상 행복하시기를 바라요.”
서로의 행복을 간곡히 빌어준 시간도 지나가고.비비안을 맞이하러 디에고가 들어섰다.그녀의 앞까지 걸어온 디에고가 멈칫한다.
잠시 멍한 표정을 보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는다.
“각하?”
“…새삼 실감이 나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디에고의 귀가 붉었다.
“풉.”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에 긴장이 풀린 비비안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디에고의 귓가를 쓰다듬은 그녀가 곱게 눈매를 휘었다.
“오늘 되게 멋있네요, 디에고.”
“…그대만 하겠어.”
고개를 든 그가 비비안의 얼굴에 살포시 손을 대었다 떼었다.
“사실 내 눈에는 매 순간 아름다운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그런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기 위해 상체를 숙인 디에고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생 선명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비비안.”
봄 햇살보다 따사롭게 웃는 비비안의 모습을 담아낸 디에고가 봄꽃처럼 입을 맞춰왔다.
그 말캉한 감촉에 마음이 동한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비비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금, 데리고 도망가고 싶어졌어.”
장난 같은 말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비비안이 그런 디에고를 흘기더니 그대로 그의 상체를 제게 끌어내린다.쪽―찰나의 순간, 닿았다 떨어진 그 감촉에 그의 동공이 흔들린다.
“흐음.”
이내 행복한 듯, 고통스러운 듯 미묘한 표정을 한 디에고가 비비안을 품에 안았다.정원으로 이어진 커다랗고 웅장한 문을 향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넓디넓은 후작가의 정원, 그 자체가 커다란 결혼식장이 된 곳에서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기다렸다.이윽고 느리게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끝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그 길의 끝에 이미 눈시울이 붉어진 후작이 그들을 맞이했다.딸아이를 보내는 아비의 눈이 매서웠다.
비비안을 바라볼 때는 꿀이 뚝뚝 떨어지더니 디에고로 시선이 옮겨가면 대번에 그런 원수가 없다는 듯 노려보고는 했다.그리고 디에고의 가족으로서 참석한 황제 내외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
“보거라.
가족이 되었잖느냐.”
제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비비안을 바라보는 황제의 모습에 디에고의 헛숨이 연이었다.살며시 비비안의 손을 붙잡은 황후가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그대의 가족으로서도 온 거랍니다.
내 자매 같은 셀레나를 대신해.”
황후의 떨리는 음성에 비비안마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아야만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됐음에도 두 사람을 훔쳐보는 이들이 많았다.
디에고 브라이트와 비비안 윈데이너의 외모야 제국 내 모르는 사람이 없다지만.그들이 그간 봐왔던 모습과는 또 사뭇 달랐다.행복이 드리운 표정.서로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눈동자는 본래 그 색과도 달라 보일 정도였다.
“두 분이 잘 어울리시네요.”
의식하지 못한 채 튀어나오는 본심에 주변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부유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정원도.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의 외모도.모든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지만.그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치고 지나간 것은,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이었다.모를 수가 없었다.
손짓 하나, 눈빛 하나, 걸음 하나까지도 서로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흑흑, 우리 아가씨.”
한쪽에서는 마리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콘라드.
“제가 살아생전에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감격에 겨운 콘라드가 눈물을 훔친다.
같은 마음으로 비비안과 디에고를 아낀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혼식 내내 서로를 위로하며 친해진 두 사람이다.
“피곤하지는 않아?”
행여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까, 틈틈이 비비안의 안색을 살피던 디에고가 물었다.
“네, 괜찮아요.”
싱긋 웃는 얼굴에 그마저 따라 웃는다.
“결혼식이 끝나면, 그곳으로 가지.”
디에고가 말하는 그곳이 어디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비비안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디에고는 심경이 복잡했다.
평소에도 언제나 비비안은 어여뻤고 자신은 늘 그녀를 향한 갈증에 시달려왔다.그런데 지금.결혼식이라는 게, 비비안이 제게 속하고, 자신 또한 그녀에게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더 공고히 하는 것만 같아서.감정이 고조되었다.그녀를 품에 안고 한없이 사랑하고 싶었다.
그런 제 욕망에 눈가를 찌푸린 그가 눈을 감았다.그러다 제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손짓에 바로 고개를 튼다.비비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에 디에고가 곧바로 상체를 숙여 귀를 내어줬다.
“사랑해요, 디에고.”
그 간질거리는 속삭임에 그가 웃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 디에고가 비비안의 귓가에 입술을 맞대었다.쪽―
“사랑해, 비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