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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7화 (107/109)
  • 107화

    *저택은 평소 두 사람이 드나드는 곳처럼 크지 않았다.

    다만 어디든 빛이 들 만큼 창이 많았고, 그 주위를 울창한 숲이 에워싸고 있었다.품에서 바르작거리는 비비안을 꼭 안아든 그가 저택 내 침실로 향했다.침대 위에 비비안을 눕혀놓고 여전히 곤히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어 발코니로 향한 그가 하늘거리는 하얀 커튼을 걷고 문을 열어젖혔다.꽃나무와 이제 막 연둣빛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 나무들이 한데 뒤엉켜 눈앞에 펼쳐진다.

    - 저는 꽃도 좋아하지만 나무가 더 좋아요.그리 말했었다.

    지금보다 계절이 흐르면 훨씬 울창해질 초록 물결을 상상한 디에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이윽고 뒤편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나자 그가 걸음을 옮긴다.햇살이 들기 시작한 것에 눈을 뜬 비비안이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맞춰 불쑥 고개를 튼 디에고가 눈을 맞춰온다.잠시간의 정적.

    “으아아악!”

    경기하듯 상체를 일으킨 비비안이 커다란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각하?”

    “깼어?”

    “대공령 가시지 않으셨어요? 여긴… 어디예요?”

    놀란 토끼가 사방을 경계하듯 잔뜩 움츠린 모습에 디에고가 손을 뻗었다.

    “비비안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서.”

    자신이 온전히 믿는 그의 미소에 비비안의 긴장이 사그라들었다.디에고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내려서자 그가 들고 있던 로브를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주었다.

    “…꿈인가?”

    작게 중얼대는 비비안의 목소리에 피식 웃은 디에고가 그녀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선사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늦어서 미안해.”

    열린 발코니 문 사이로 향긋한 바람 한 줄기가 흘러 들어왔다.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에 의문만 커져가던 차, 발코니로 발을 내디딘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비비안이 아는 향기가 맞았다.슈베른 왕국, 제 생애 손에 꼽을 만큼 생명력이 넘치던 그 시간 속에 선명히 박혀 있는 기억.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던 비비안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각하! 이거!”

    흥분한 비비안이 발을 동동 구르며 꽃나무를 가리켰다.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

    그녀 곁으로 다가간 디에고가 망설이며 입을 떼었다.

    “순서가 어긋났지만.”

    비비안의 손을 들어 나긋이 쓸던 그가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그녀의 약지 앞까지 가져갔다.그 앞에 멈춰 선 채 디에고가 비비안의 눈을 찾았다.

    이내 눈매를 휘며 웃은 그가 천천히 반지를 밀어 넣는다.투명하게 빛나는 반지가 햇빛을 받자 오묘한 색을 내며 반짝였다.

    “정원도, 이 저택도 모두 비비안 거야.

    비비안 윈데이너가 아니라.”

    그 말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던 비비안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네가 나를 만나 함께하는 것이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길 바랐어.”

    그래서 더 대공비라는 자리에 그녀를 앉히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앞으로도 비비안은 하고 싶은 거, 그게 무엇이든 하면 돼.”

    이렇게 말해도 모질지 못한 비비안이 결국 대공비라는 이름 아래 그만한 책임을 떠안을 것 또한 디에고는 알았다.여태 봐온 그녀가 그랬으니까.그렇다면 그런 비비안을 위해 선물하고 싶었다.구속, 책임이 아닌 자유를.

    “…작아.

    사실은 네게 완전히 자유로운 세상을 주고 싶었어.”

    하나 그것은 불가능했다.그래서 세상의 한 조각을 잘라내기로 했다.비비안이 좋아하는 걸로 가득한 공간.

    그녀에게 그 어떤 의무도, 책임도 주어지지 않는 시간.

    “그대와 나밖에 모르는 곳이지.”

    말문이 막힌 비비안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팔을 뻗어 디에고를 껴안았다.

    “이 말도 하고 싶었는데.”

    살짝 몸을 뒤로 물린 그가 비비안의 양 볼을 따스하게 감쌌다.

    “결혼해 줘, 비비안.”

    언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지 이미 눈물, 콧물 범벅인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요, 으허엉.

    결혼할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디에고가 참을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비비안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렸다.

    “응, 고마워.”

    그 모든 자잘한 입맞춤을 받아가며 엉엉 우는 비비안.

    “꽃나무 뒤로는 작은 호수도 있어.

    그때 후작가의 숲에서 본 호수 빛깔과 흡사하지.”

    울어도 너무 울었다.

    “슈베른 왕국 향신료도 들여왔어.

    …매운 거.”

    뒷말은 좀 소리가 작았다.

    어떻게든 이제 좀 달래보려고 꺼낸 말이었다.

    비비안이 이러다 또 탈진할까 싶어 걱정이 될 정도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어서.

    “풉.”

    비비안이 눈물을 흘리면서 입은 웃었다.

    그게 퍽 우스울 만도 한데 디에고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비쳤다.

    “…같이, 먹어줄 거예요?”

    이 와중에 착실하게 이득을 챙기는 모습이 야무졌다.

    “…그럼.”

    사실 이제는 매운맛보다 그날 본 비비안의 꿈이 더 신경 쓰였지만 디에고는 그저 웃었다.

    “원하는 건 다 해줄게.”

    진심이었다.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어주고, 자신에게 없는 것이라면 찾아줄 것이었다.

    “…저도 다 해줄게요.”

    디에고가 해사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너는 이미 존재 자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내 부족함을 메워주었다.내게 없는 것은 삶이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였으며.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이미 충분해, 비비안.”

    *

    - 결혼해 줘, 비비안.꺄아아―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말이었다, 내 마음에서.디에고가 선물해 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그건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았을까.”

    한바탕 울고 함께 둘러본 저택은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모습 그대로였다.

    소담한 크기와 밝고 아늑한 방들.심지어 언제, 어디서였는지 정작 나는 기억이 없는데 내 눈길이 닿았던 물건들이라고 했다.보고 웃었던 것.

    궁금해하던 것.

    갖고 싶어 했던 것은 물론이고, 내가 생각나는 것은 죄다 가져다 놓았다고.마치 꽃마차 사건이 떠오르는 모양새였다.그리고 사용인들이 무슨 다 모습을 감추는 데 특화된 암살자라도 되는 것인지.방금 한 따듯한 요리는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 와, 슈베른 왕국에서 먹었던 거랑 똑같은 것 같아요!

    - …그런가.스튜를 앞에 둔 디에고의 표정이 오묘했더랬지.

    눈을 반짝이며 응시하자 피식 웃더니 아주 용감하게 스튜를 입에 넣은 그.어김없이 붉어진 얼굴, 그를 보며 귀여움에 웃음 짓는데 이상한 일은 그때 일어났다.갑자기 제 셔츠에 손을 올리더니 느릿하게 단추를 푸는 것 아닌가!

    - 어? 뭐…….나른히 풀린 입매, 이제는 매운맛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던 상기된 얼굴.톡―톡―두 번째 단추마저 제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만 침 삼키는 소리를 내고 말았었다.세 번째 단추를 어루만지던 디에고의 손이 결국 다시 탁자 위로 돌아갔을 때, 아쉬움이 진득이 묻어나는 탄식을!나는 왜! 내뱉었을까.

    - 이 이상 하면 못 참을 것 같아서.그가 나와 눈을 맞추고 생긋 웃는데, 유혹적인 자태가 그런 거구나 싶었다.

    “후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짝 보인 가슴팍, 좋더라.”

    행복한 하루였다.

    내가 상정할 수 있는 하루 치의 행복을 훨씬 웃도는 기적 같은 하루.

    “결혼을 잘 하는 것 같아.”

    곱씹을수록 그랬다.

    디에고는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었다.

    내가 다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가씨, 정원에 티타임 준비 끝냈어요.”

    “아, 고마워.”

    결혼과 동시에 대공령행이 정해진 이후 하루 한 번 아버지와 티타임을 갖고는 했다.오늘도 정원으로 나가보니 먼저 나와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왠지 쓸쓸해 보이는 옆모습에 마음이 안 좋다.내가 가면 정말 혼자 계시는 건데.

    그래도 금방 다시 오기는 할 테니까.

    “아버지,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다.

    앉거라.”

    차만 마실 뿐 테이블 위 다과는 하나도 손대지 않은 아버지가 입을 떼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누가 보면 내가 어디 노예로 팔려가는 줄 알 정도로 표정이 어두웠다.

    비약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눈에 띄게 침울해지셨다.

    “예, 그래도 금방 돌아올 테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나는 웃었지만 아버지는 놀랐다.

    “돌아오다니……?”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나?

    “각하랑 이야기해 봤는데 자유롭게 수도랑 대공령 왔다 갔다 하기로 했거든요.

    우선 봄에 대공령에서도 결혼식을 치러야 하니, 아마 여름이 되기 전에 수도로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줄줄줄 설명을 할수록 아버지의 입이 벌어졌다.

    “아, 물론 제가 대공령 일에 많이 익숙해지기도 하고 그래야 해서 여름에 다시 그쪽으로 가볼 것 같기는 하지만.”

    한동안은 상황도 살피고 일도 손에 익어야 하니 대공령 쪽에 오래 머물 예정이었다.그래도 기본적으로 내 집은 수도, 디에고가 선물해 준 그 소담한 저택이었다.생각만으로 미소가 지어지네.윈데이너 후작가도 당연히 우리 집이고.

    ‘집이 세 개나 되다니.’

    “그랬나.

    그렇게 된 건가.”

    멍하니 읊조리던 아버지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예, 그러니까 그렇게 너무 침울해하시지 마세요.

    자주 올게요.”

    이제야 미소 한 자락을 걸친 아버지가 먼 곳을 바라보듯 허공을 응시했다.

    “너는 나보다 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의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나는 줄곧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지.”

    “…….”

    황후 폐하와 종종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그녀가 그랬다.

    윈데이너 후작 부인, 셀레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다고.어머니가 그런 분이셨다면, 분명.

    “행복하셨을 거예요.

    알 것 같아요.”

    아버지가 촉촉이 젖어든 눈가를 휘며 내 손을 잡았다.

    “그래.

    그러니 내 딸아, 행복하거라.”

    어쩐지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지는 아버지의 발언에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각하가 아닌 것 같으면 언제든 돌아오거라.

    아버지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 알겠니? 꼭 기억해, 네 뒤에는 내가 있음을.”

    분명 감동적인 말인데 전해지는 느낌이 묘했다.

    “그 자식― 아니지.

    각하가 혹시나 널 상처 입히면 언제든지 돌아오겠다고 이 아비랑 약속할 수 있지?”

    이미 예정된 일인 것처럼 아버지가 이를 갈았다.

    “…예, 정말 든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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