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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자꾸 내 속을 훔쳐본다-106화 (106/109)

106화

청혼은 대성공이었다.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막 몰아붙인 감이 없지 않아 있기에 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빠르게 결혼을 진행시키는 중이다.

- 아버지,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 같아요.너무 기쁜 나머지 당장 달려가 그리 말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 새, 새로운 가족이라니!? 대공, 이 자식을!

- 예? 저 결혼하면 각하도 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 결혼……?작은 오해가 있었다.

설마 새로운 가족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가 될 수도 있다니.

“저택에서 먼저 결혼식 치르시고, 대공령 가서 한 번 더 결혼식을 여시는 거 맞죠?”

“응응, 그렇게 하기로 했어.”

무려 황가 측이 황궁에서 결혼식을 열어주겠다는 엄청난 제안을 해왔지만, 그건 아니었다.우리는 정중히 사양했고, 마침내 두 번의 결혼식을 열기로 결정을 내린 참이다.그리고 그날.청혼 이후 한참을 놔주지 않아 결국 그의 침실에서 잠이 들었었다.

심지어 초상화들은 다 제가 갖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애먹었다.그걸 디에고에게 남기기에는 내가 너무 그에게 밀리는 외모로 그려져 있었다.

‘…화가가 디에고 추종자라도 되었던 걸까.’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초상화만은 돌려줄 수 없다며 가져가 버렸지만.초상화를 앞에 두고 한참을 방싯대는 모습에 차마 뺏어올 수 없었지.결혼 준비는 어렵지 않았지만 번거롭기는 했다.

뭐가 이렇게 선택할 사항이 많은지, 하나하나 살펴보느라 피곤했다.침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해본다.

너무 일했다, 나 지금.

“각하는 어제 대공령 돌아가신 거죠?”

디에고는 떠났다.결혼식이 정해졌으니 대공령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진 듯싶었다.

“벌써 기대된다니까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그것도 봄에 말이에요.”

- 봄에 데리러 올게.아직 겨울 냄새가 가득한 정원에서 디에고가 인사를 전했다.봄의 대공령을 만나러 갈 생각에 벌써부터 떨렸다.

그것도 대공비로 간다니.

“어흑,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결혼 나중에 할 걸 그랬나?”

마리가 또 시작이냐는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했다.

“좀 더 이것저것 준비된 다음에 지를 걸 그랬나 봐, 마리.”

『영지 알아보기』, 『영지란 무엇인가』, 『영지에서 살아남기』 등등.

영지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모으는 요즘.아직도 남은 서적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미룰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봄은 봄인데, 내년 봄이었다! 짜잔! 어때, 안 되겠니?

“진정하세요, 아가씨.

우리에겐 비밀 무기가 있잖아요.”

그래? 우리한테 그런 게 있었어?

“아가씨는 이제껏 기막히고 어이없는 일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까지 엮이지 않은 사건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랬나?”

“최근에 크기부터 남달라지시긴 했는데, 아가씨는 원래 좀 그러셨어요.”

단호했다.

“작년, 자잘한 걸 제하고도 독을 먹지 않나, 납치를 당하지 않았나.

아니지, 애초에 노예 경매라는, 아가씨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에 턱하니 휘말리셨잖아요.”

틀린 말이 없었다.

“와, 나 작년에 진짜 엄청났네.”

돌이켜보니 살아 있는 게 용했다.

죽어도 몇 번을 죽었겠구나.고개를 끄덕이던 마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가씨는 타고난 운이 있으세요.

불행 중 다행, 이라고.”

마리, 너 그걸 말이라고, 지금.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가만있어도 사람을 끌죠.”

“이상한 것들도 잘 붙어서 탈이긴 하지만.”

이라고 작게 혼잣말하는 거 다 들린다, 얘.

“마지막으로 아가씨는 세상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계십니다.”

좀 기대가 됐다.

뭘까, 그게 뭘까.

“돈과 정보.”

마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상쾌하게 웃었다.

난 허망했다.이 장황했던 대화는 결국 내가 딱히 잘난 게 없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아―”

이럴 시간에 책 한 권 더 보자, 그래.내가 시무룩하게 도로 침대에 눕자 마리가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현명하게 살아남으시고, 워낙 심성이 바르고 고우시니 사람이 꼬이는 거고, 돈과 정보를 제대로 쓰실 줄 아시는 게.

아가씨잖아요.”

너어― 너 진짜! 잔망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마리가 씨익 웃었다.

“마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면 가지고 싶은 거라든가.”

마리랑 대화하다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치솟기 시작했다.

뭐, 어떻게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번화가에 새로 디저트 상점이 생겼던데요.”

“그래? 가자.

지금 가자.”

사람은 역시 바깥바람을 쐐야 한다.

공부하랴, 식 준비하랴 울면서 하고 있는데.달달한 것도 먹고 좀 걷다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구나.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거리를 뒤로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리, 정말 나랑 같이 대공령 가도 괜찮아?”

“아가씨,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세요!”

별안간 들려오는 외침에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가 왕국으로 망명을 하신다 해도 따라갈 거라고요, 저는!”

박력이 넘쳤다.

“그, 그래.

고마워.”

놓고 가기라도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올 성싶게 눈에 열정이 가득했다.

“풉.”

고맙고 귀엽고 웃기고.

온 얼굴로 웃기 시작하자 마리도 따라 웃는다.다행이었다.

그래도 낯선 곳에 가는 게 마음 한구석 두렵고 걱정되었는데.

마리가 곁에 있어주면 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럼 쉬세요.”

마리가 나간 침실, 고요함이 감돌았다.

‘디에고, 지금쯤 대공령에 가는 중이겠지?’

*

“이제 가십니까, 각하?”

디에고에게 보랏빛 보석으로 만든 커프스를 달아준 콘라드가 능글맞게 웃었다.

어쩐지 들뜬 그 모습을 힐긋 본 그가 무심히 돌아섰다.

“저는 진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윈데이너 영애가 각하께 청혼하신다고 했을 때 정말 기겁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물론 그 얘기를 딱 처음 들었을 때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만큼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그리고 후에 그녀가 준비한 것들을 보며 콘라드는 남몰래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사랑이었다.

“행복하시겠어요, 각하.”

준비를 끝마친 디에고가 나가기 전 콘라드를 바라봤다.

“네가 시일을 좀 늦춰줬더라면 더 행복했을 것 같기는 하다만.”

뜨끔한 콘라드가 눈동자를 굴렸다.

안 그래도 시도는 해봤었다.

이쪽에서도 준비하고 있던 게 있었으니.하나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는 아주 야생 멧돼지 버금가게 들이박듯이 일을 처리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제 상관이 대공령에 내려가기 전에 해야만 했으니까.그 덕에 콘라드 자신도 최대한 애썼지만 그녀보다 빠른 시일 내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일찌감치 포기했었다.결과적으로 다 잘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콘라드는 이제 막 비비안에게 가려는 디에고에게 외쳤다.

“각하! 힘내세요!”

그렇게 새벽빛이 이제 막 어둠을 밀어낼 때쯤, 그 푸른빛과 함께 디에고가 비비안의 침실로 스며들었다.색색, 잠들어 있는 그녀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마리.디에고에게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넨 마리가 분주히 움직인다.비비안에게 다가간 그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치우고 그녀의 등과 무릎 뒤를 감싸 들어 안았다.그 위로 하얀 털이 보송보송한 로브를 비비안에게 덮어준 마리가 디에고와 시선을 맞춘다.

- 비비안을 잠시 데려가고 싶은데.그제, 디에고가 대공령으로 떠나는 날이라 알고 있던 비비안에게 인사를 하고자 후작저를 찾아왔던 그는 우연처럼 마리의 앞에 섰었다.그렇게 일러준 이야기.그녀가 사라져도 자신이 데려간 것이니 그리 알라며 굳이 얘기해 주는 이유는.디에고가 비비안이 아끼는 이들까지 존중한다는 뜻이었다.단단한 팔로 로브까지 함께 비비안을 감싸 쥔 그가 침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돌아섰다.그러다 멈칫한 디에고가 뒤를 돌아봤다.

“…청혼.”

“예?”

무심히 말을 던진 그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침실에 남겨진 마리가 미간을 찌푸리다 돌연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어머! 어머! 청혼하시려나 봐!’

한편 후작가 밖, 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바람이 부는 것에 설핏 찡그린 디에고가 비비안을 더 끌어안았다.그대로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탄 그가 비비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런데도 깨지를 않네.”

귀엽다는 듯 미소 지은 디에고가 고개를 젖히고 심호흡을 했다.꿈만 같던 그날.비비안이 제게 결혼을 청한 그날이 아직 생생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실 비비안이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 날부터 디에고는 청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게 하나 있어서 늦어졌지만.지금도 그는 비비안이 선물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둔 초상화를 보면 행복해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제가 내비친 그 속마음 하나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비비안이 떠올라서 한참을 먹먹해했었다.서서히 멈추는 마차에 맞춰 디에고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슈베른 왕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에녹과 클라라를 만났던 디에고와 비비안.비비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디에고는 왕국 남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분명

‘한 가지 부탁’

이라고 했으나 좀 여러 개였고, 더불어 부탁이라기엔 강압적이었다, 라고 남매는 기억하고 있지만.

- …진심인가?

- 그렇다만.

-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에녹은 미간을 찌푸리며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변한 디에고를 바라봤었다.반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라라는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호쾌하게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 각하는 정말.

비비안 윈데이너 영애에게만 최고의 남자군요.

- …그거면 된 것 같은데.그렇게 적극적인 슈베른 왕국 남매의 협조 끝에 그가 준비한 것.사실은 그저 비비안이 좋아해서, 그런 건 다 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이지만.비비안이 결혼을 거론한 순간, 생각했던 그림을 바꿔보았다.네게 의미 있는 것을 주고 싶어서.적어도 비비안이 맑게 웃어줄 수 있는 그런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비비안을 안고 내려선 곳, 새하얀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풍경.

왕국에서 끝없이 입을 맞췄던 그 풍경이 통째로 이곳에 옮겨 심어졌다.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소담한 저택 한 채.물끄러미 제가 준비한 것들에 하나씩 시선을 주던 디에고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디 비비안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얼굴에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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